요즘 사는 맛 - 먹고 사는 일에 누구보다 진심인 작가들의 일상 속 음식 이야기 요즘 사는 맛 1
김겨울 외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2년 2월
평점 :
품절


영화 [인사이드 아웃] 개봉된 후로 새로운 별명이 하나 생겼다. 그것은 바로 슬픔이.

"(키득키득)  은숙이다 은숙!"  좌석 은혜가 낄낄거리며 말했다. 울다 지쳐 철푸덕 엎어진 채로 잠시 휴식을 선언한 슬픔이가 기쁨이에게 질질 끌려 나가는 장면에서 은혜는 다시   말했다. "- 은숙이네."

 번은 우리 4남매가 모여 [인사이드 아웃]  적이 있었는데 우리는 싸울  했다. 오빠와 명랑이는 슬픔이가 나올 때마다 " 진짜  저러냐!!?!" 연신 한숨을 푹푹 쉬며 답답해했고, 나는 "진짜 진심으로 이해가 안 되서 그러는거야? (절레절레)  기쁨이 같은 애들 제일 피곤해." 맞받아쳤다. 그와중에 막내는 소심이에 거의  빙의한 상태였기 때문에 우리  사람이 정말 같은 뱃속을 시작으로   지붕 아래 자란 존재가 맞는지 참으로 의아해지는 시간이었다.


나는 유독 슬픔이 많다. 사실 영화가 나오기  내가 그냥 우울한 아이인 줄로만 알았다. 우울질이 많은 아이, 하루의 절반, 일주일의 절반 이상은  우울한 아이. 뭐라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는 커다란 우울함이 때로는 옅게, 때로는 짙게 뭉게구름처럼 마음 안을 떠도는  같았다. 이런 나를 설명할 수도, 이해받을 수도 없을 것이라 생각했고 그래서 결론은 언제나 우울함... 그런데 영화  '슬픔이' 탄생과 함께  안에 떠다니는 뭉게구름 같은 것에 붙여줄 이름이 생겼고 나는 나를 설명할  있는 서사 샘플링 같은 것을 찾았다. 조마조마 마음 졸이며 슬픔이를 응원했고 영화가 끝나니 어딘가 후련하기까지 했다.

슬픔이와 나는 내면의 작동 방식이랄까, 주감정만 닮은 것은 아니었다. 키도 작고 뚱그란 것이 안경을  모양새가 나와  닮아 보이나보다. 어느 날은 강의 쉬는 시간   학생이  친구와  보며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 말았다. " 뭐야...  슬픔이 닮지 않았냐?" (영국아 우리 멀리 있지도 않았는데 그렇게 가까이서 말하기 있니...?)

슬픔이의 외모를 닮았다는 것을   모르겠지만(정말이야. 난 몰라...) 친구들은 어딘가에서 슬픔이를 발견하면  "! 쑥쑥이다!" 외치며 친근감을 표시했고  기억해줬다.


화요일 퇴근길이었다. 해가 제법 길어져서 퇴근길이 아직 밝았다. 칼바람을 정면으로 맞으며, 롱패딩을 여미며 생각했다. 입사한   달이  되어 가는데  하고 있는 것인지, 편집자 재직자 과정은 하필  올해부터 열리지 않는 것인지, 사회주택 입주 관련 문의한 내용은  아직 답이 없는지, 집을 어느 동네로 어디서부터 구해야 하는지. 버스 정류장까지 가는  짧은 337m 걸으며 칼퇴의 기쁨은 온데간데 없고 새어나오지 못하도록 막아두었던 걱정거리들이 하나  새어나왔.

 

"좀 기쁜 이야기는 없어? 왜 맨날 다 슬퍼?"

왜일까. 하나둘 떠오르는 걱정거리들을 비집고 은혜의 말과 표정이 생각나버린 .


4호선을 기다리는 중었다. 은혜는 말은 안했지만 그녀의 표정은 질려보였고 그 한 마디에 나는 정말로 슬퍼져버렸다. 슬픔이 켜켜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은혜 앞에만 서면 유독 이렇다. 이상하게도 슬픔은 은혜의  마디, 은혜의 표정에 더욱 민감. 집에 대해 이야기하는 중이었. 눈물이 찔끔 올라오는 것을 참고 은혜에게 물었다.

"혼자 살면 뭐가 좋아?"

"아무도 날 건들지 않으니까." 계속 사람들과 부대끼다가 집에서 쉬는 그 시간이 너무 좋다고 건조하게 대답한 은혜는 한 마디를 덧붙였다."너는 외로워할꺼지?"

'아니. 아닌데... 난 외로운 게 아니라 무서운 거야. 새로운 곳에서 혼자 살아갈 게 무서운 건데...'

'넌 여전히 날 이해하지 못하는구나.'

어떤 역할을 수행해야만 하는 그날 스케줄 때문에 은혜는 유독 날카로웠던 것일까? 지하철로 이동하는 내내 은혜는 조금 차가웠고 우리는 그렇게 헤어졌다.


그날이 아주 깊숙한 곳에 얹혔나보다. 불쑥 떠오른 기억을 곱씹어보자니 마음이 시리고 또다시 눈물이 차오를  같았는데, 다행히 알맞게 버스가 도착했고 버스에 몸을 욱여 넣었다. 버스로 이동하는 동안 날이 어둑어둑해졌다. 손잡이를 잡은  모습이 창에 비친다.

'슬픔이.'

진짜였네. 정말 닮았네.


울적한 저녁을 보내고 싶지 않았다. 훌훌 홀가분해질 수는 없어도 탈탈 먼지 털어내듯 당장 털어버릴 수 있는 것들은 털어버리고 싶었다. 정류장에서 내려 이끌리듯 마트에 들어갔다. '뭘 사지?' 야채 코너부터 둘러보는데 고구마, 가장 먼저 고구마가 눈에 들어온다. 안그래도 며칠 벼르고 있었는데. 울적한 주인 닮아 그리 쾌활하지 못한 장에 변비가 온 탓이다. 안녕자연에서 800g에 5,000원 꼴인 고구마를 눈에 봐뒀었는데 마트가 200원 가량 저렴하다. 상태를 살피고 고구마 한 봉지를 집어 들었다. 옆 냉장칸에 양배추가 있다. 안녕자연에서는 반토막에 2,400원 정도 하던데 여긴 한 통에 2,300원. 바구니 가져올 새도 없이 품에 고구마와 양배추를 안았다. 더이상 무거운 것은 안될 것 같아서 싱싱해보이는 상추 한 봉지, 깻잎 한 봉지를 추가했고, 마트 적립 번호를 만들었고, 묵직하게 아이들을 데리고 집으로 오른다. 만원도 안되는 가격에 필요한 녀석들만 쏙쏙 알뜰하게 데려올 수 있다니, 배송비도 아끼고 탄소 발자국을 아주 조금은 덜었다는 생각에 바람이 가볍다.


집에 오자마자 손을 씻고  팔을 걷어 붙였다. 차가운 물을 세게 틀고 제일 먼저 양배추를 세척한다. 절반은 다시 랩핑해서 보관, 나머지 절반은 냄비에 넣어 삶고, 나머지 절반은  썰어 다시   세척한다. 손이 깡깡 빨개질 정도로 차가운 물에 야채를 씻자니 여름 계곡에   마냥 시원하다.   양배추를  통에 나눠 소분한  고구마를 씻는다. 여섯 개와 여덟  사이 잠시 고민하다 여덟 개를 씻는다. 내일 간식으로 수지도 싸줘야지. 고구마를 씻어 맛탕 정도 크기로 깍둑 썰어 에어프라이기에 가지런히 담는다. 20. 버튼을 돌리고선 냄비에서 양배추를 건져 올린다. 절반은 소분, 절반은 접시에 담는다. 마지막으로 쌈채소를 씻는다. 상추도, 깻잎도  손바닥보다 크고 넓적하니 싱싱하다. 파릇파릇한 생기가 전해지는 기분. 쏴아 흐르는 물에 초록의 것들을 씻고 있자니, ! 시원하고 맑다. 넓적-하고 빳빳한 싱싱한 깻잎이 이렇게 만족스러울 일이던가. 부자가   같다. 서서히 은은하게 고구마 냄새가 퍼진. 쏴 흐르는 물에 초록초록한 야채를 씻을 때만 해도 지리산에 여름 휴가 온 것 같았는데 고구마 냄새에 주방은 순식간에 겨울이 된다.

물을 탈탈 털어 종이호일과 키친타올을 깔고 쌈채소를 켜켜이 쌓는다. 부자가 되었다, 초록 부자. (아주 잠깐 이 쌈채소들이 다 만원짜리였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지.) 냄비와 도마를 씻고    하기 위해 포트에 물을 올렸는데 - 고구마가  됐다. 젓가락으로 찔러본다. 부드럽게 쑤욱- 느낌이 좋다. 넓은 접시에 고구마를 옮겨 담다 그 새를 못참고 입에 하나를 . 노오란색 보드랍다. 은은한 단맛, 오랜만이다.

울적한 기분은 진즉 씻겨 내렸다. 야채 씻는 물에 하루의 노고를 흘려보내고 고구마의 온기로 저녁의 평온함을 충전한다. 엄마의 맛, 엄마의 온기다. 겨울이면 언제나 고구마를 한 가득 쪄놓던 엄마도 이런 마음이었을까? 식구들의 평온을 위해 바구니 가득 노오란 온기를 채워 놓는 마음. 왠지 남은 겨울은 온통 고구마와 함께 보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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