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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른 여자들
다이애나 클라크 지음, 변용란 옮김 / 창비 / 2021년 7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음식 앞에 자유로웠을 때가 언제였을까? 사진 속 눈이 큰 어린이는 칼로리라든지, 몸무게나 부기 따위에 아랑곳하지 않고 마냥 행복했을까? 먹는 행위가.
초등학교 1학년, 처음으로 나의 통통한 살집을 인식했다. 초등학교에서 처음 만난 내 어린 여자 친구들은 정말이지 가늘고 말랐었다. 3층으로 선생님의 심부름을 다녀오는 길에 친구와 서로의 몸무게를 공유한 적이 있는데 우리는 10kg 정도 차이가 났다. 나는 속으로 조금 뿌듯했다. 내가 좀 더 어른스럽다고 느끼기도 했던 것 같다. ‘OO도 어서 잘 먹고 나처럼 튼튼해져야 할 텐데.’ 10kg이나 더 나가도 창피하지도, 스트레스를 받지도 않았었다.
초등학교 3학년, 남자친구들은 등하교를 같이하던 내 친구에게 ‘돼지’ 혹은 ‘뚱땡이’라는 식의 별명을 붙였다. 친구보다 키도 작고 덩치도 작고 힘도 약했던 남자아이들은 친구에게 찍소리도 못했지만, 은연중에 학습하고 있었다. 이제 10kg이나 더 나가는 건 조금도 뿌듯한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초등학교 5학년, 처음으로 다이어트라는 것을 시작했다. “우리 OO는 집에서 가만히 있지를 않아. 그러니까 살이 안 찌지. 밥은 안 먹고 과일만 그렇게 먹는다니까?” 엄마 친구 OO이모가 체구 작고 왜소한 딸이 속상해서 털어놓은 하소연은 ‘어떤 해법’과 잔소리로 나에게 되돌아왔다. 과일을 먹어도 도무지 살이 빠지지 않았다. 밥은 밥대로 과일은 과일대로 맛있어서 살이 빠질 리 없었다. 내 몸집에 대한 어떤 눈치와 1년에 한 번씩 했던 신체검사 결과표의 ‘체중 정상’이라는 네 글자, 그 사이에서 위축과 안도 사이를 오갔다. 그렇게 큰 스트레스는 아니었다.
중학생 시절엔 본격적으로 굶어보기도 하고 정 안 되겠다 싶으면 미숫가루로 하루를 버텨보기도 하고. 좀 더 과감하게 다이어트를 시도했다. 한 주 만에 교회에서 만난 친구가 “살 좀 빠진 것 같다?”라고 얘기하면 그 한 마디가 그렇게 기분이 좋았다. 검정 반스타킹이 위로 올라갈수록 전혀 굴곡지지 않고 매끈하게 ‘쏙’ 올라갔다가 벗어도 종아리에 압박 자국 하나 남지 않는 여자 친구들은 예뻤고 인기도 많았다. 맥주병 마사지, 밀대 마사지 등 다리 부기를 빼준다는 팁들을 서로서로 공유하고 시도했지만, 내 다리는 언제나 조선무였다(당시 아빠가 엘리베이터에서 내 다리를 보고 혀를 내두르며 하신 말씀). 마른 몸, 볼살도 턱살도 없는 갸름한 얼굴은 우리 모두의 선망이었다. 10대 시절부터 줄곧 이어온 다이어트이지만 한 번도 성공한 적이 없다. 음식 앞에서, 거울 앞에서의 강박만 늘었다.
우리 집 세 자매의 몸은 제각각이다. 키가 작고 퉁퉁한 유형, 키가 크고 늘씬한 유형, 키가 크고 통통한 유형. 제각각이지만 음식과 거울 앞에서 느끼는 강박만큼은 닮아있다. 배고픔과 맛있음 앞에서 ‘먹을까 말까?’를 고민하고, 거울 앞에 배를 들추며 ‘살쪘나?’를 수없이 반복. 제각각의 몸에 맞는 제각각의 운동 방법과는 달리 절식 – 소식 - 폭식의 주기는 닮아있다. 서로의 강박은 거울처럼 우리 자신을 투영해 보여준다.
우리는 자유로울 수 있을까? 몸에 대한 강박 그러니까 체중이라든지 신체 사이즈라든지, 그런 것들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우리를 강하게 묶어두는 보이지 않는 코르셋은 그 역사가 깊은 만큼이나 영향력도 막강해서 머리가 자유와 속박을 외치는 것과는 달리, 몸과 맘은 여전히 코르셋의 강박에 묶여있다. 우리는 우리의 소중한 친구들을 코르셋으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 아름다움의 찬사와 격려를 아끼지 않지만, 스스로에게만큼은 관대해지기 어렵다. 보이지 않는 코르셋은 언제나 막강하다.
등 뒤에 있는 작은 점 하나 말고는 다를 바라곤 전혀 없던 일란성 쌍둥이 릴리와 로즈. 가정 – 부모의 애정과 돌봄의 결핍, 성 정체성을 숨길 수밖에 없는 말 못 할 고민, 또래 집단에 도태되지 않기 위한 부단한 노력 등. 어린이들이 감당하기엔 가혹한 세상에 내던져진 채 릴리는 폭식증으로, 로즈는 거식증으로. 서로 닮은 곳이라곤 한 군데도 찾아볼 수 없는 모습으로 변해간다. 변한 건 둘의 외형만이 아니다. 학대와 폭력을 일삼는 남자들로부터 자신의 존재 가치를 확인하는 릴리와 마른 여자들 사이 구토와 허기짐을 공유하며 존재 가치를 찾는 로즈는 모든 것이 상반된다. 상반되는 것 자체가 잘못되었을 리는 없다. 쌍둥이라고 해서 둘의 닮음을 유지해야만 하는 책임과 의무는 없으니까. 다만 각자의 결에 맞는 건강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자라주면 좋으련만, 서로 다른 방식으로 파국에 다다르는 릴리와 로즈의 이야기는 고통스럽기 그지없다.
책을 읽는 내내 정말로 고통스러웠다. 폭식증과 거식증의 양극단을 달리는 두 자매의 모습 – 그러니까 가스레인지 앞에서 울면서 맥앤치즈를 퍼먹는 릴리도, 식판을 비우기 위해 시설 관리자의 눈을 피해 매쉬 포테이토를 겨드랑이 사이에 척척 붙이고 그마저 공복에 구토까지 하는 로즈도, 형편없는 남자들에게 시퍼런 멍과 피딱지가 들면서도 사랑이라 착각하는 릴리도, ‘이성애의 정상성’ 범주에 들기 위해 환상을 살아가는 로즈도, 모든 이야기 한 장 한 장이 쉽게 읽히지 않았다. 하지만 소설의 극적 효과가 도가 지나치다고 넘기고만 싶은 릴리와 로즈의 설정을 설정으로만 넘길 수는 없는 이유는 면밀하게 들여다보면 나와 너 안에 릴리와 로즈가 공존하고 있기 때문.
3부에 들어서야 책이 술술 읽혔다. 릴리를 구하겠다는 마음으로 단단히 회복을 맘먹은 로즈가 그레이스와 제미마의 손길 아래 음식을 조금씩 입에 넣기 시작하고, 그림을 그리며 자기 삶을 찾는 이야기를 편안하게 읽었지만, 한편으론 여전히 시원스럽지 않다. 정말로 고통과 연대의 반복 속에 정말로, 결국은 연대가 웃을 수 있을까? 우리에게 덧입혀지는 수많은 강박으로부터 우리는 정말로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머리 길이, 좋아요와 구독 하나하나까지 뒷조사하며 온갖 낙인과 혐오를 싸지르는 속 편하고 비겁한 겁쟁이이자 한편으론 내게 두려움을 조장하는 공포의 대상 얼굴 없는 유저들과 섞여 살아가는 오늘, 정의당 장혜영 의원의 당찬 포부에 기대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