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화장 - 2004년 제28회 이상문학상 수상작품집
김훈 외 지음 / 문학사상사 / 2004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김훈의 화장은 잔혹한 소설이다. 소설의 잔혹함은 여러 층위에서 발견된다. 한 생명이 속절없이 꺼져가는 그 순간에도 다른 생명들은 그것과는 전혀 상관없다는 듯 배설의 욕구를 느끼고 수면의 욕구를 느끼고 허기를 느낀다. 한 생명이 투병으로 기진맥진할 때 또 다른 생명은 자신을 닮은 아이를 낳는다. 모든 생명은 그렇듯 개별적인 것이다. 한 생명은 다른 생명과 섞일 수 없다. 아내의 고통이 아무리 크다 할지라도 나는 아내의 고통에 가 닿을 수 없으며 아내의 고통을 응시하는 나의 고통만을 체감할 수 있을 뿐이다. 또한 종양은 생명 현상의 일부이지만 생명 자신을 위협한다는 점에서 반생명적이기도 하다. 생명 안에서 존재하는 종양 역시 생명과는 별개로 제 길을 뻗어 나간다. 설사 자기가 파멸에 이른다고 할지라도 중간에서 멈추지 않는다. 얼마나 잔혹한가. 인정사정 봐주지 않고 한 생명을 죽음으로 몰아간다는 것은. 생명을 향한 무차별적이고 무자비한 공격.

소설의 잔혹함은 비단 생명 활동의 무자비함에서만 오는 것은 아니다. 죽어가는 아내를 두고 회사의 젊은 여직원을 연모하는 화자에게서 독자는 잔혹함을 본다. 이것은 아픈 아내를 두고 어떻게 한눈을 팔 수 있느냐는, 도덕의 잣대로 판단을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저 사내는 언제부터인가 추은주의 이름과, 둥근 어깨와 빗장뼈와 흘러내리던 머리카락이 보였을 뿐이다. 그러나 여자들을 묘사하는 작가의 시선에서는 어쩐지 불편함을 감출 수가 없다. 종양과 싸우느라 살은 가죽밖에는 남지 않은 아내, 아내는 이제 후각과 미각이 마비되어 음식의 맛은 고사하고 자기 몸에서 나온 대소변의 악취도 느낄 수가 없다. 여자가 제 한 몸을 가누지 못하고 남의 손에 옷이 벗겨질 때, 몸에 병이 깊어 자신의 대소변조차 가리지 못할 때 그것은 차라리 죽음이 더 나을 수도 있는 수치다. 이러한 수치를 작가는 잔혹하리만큼 자세하고도 섬세하게 묘사를 한다. 아내의 몸은 더 이상 아내의 것이 아니라 간병인의 처리 대상이고 내 수발의 대상으로서만 느껴질 뿐이다.

아내의 몸은 이렇게 구체적인 악취와 무게를 가지고 죽음을 향해가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살아 있고 건강한 추은주의 몸은 닿을 수 없는 먼 대상이다. 추은주가 아이를 낳고 아이를 먹이는 것은 구체적인 생명 활동이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닿을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내가 아무리 추은주의 빗장뼈와 푸른 정맥, 둥근 어깨를 볼 수 있고 그녀의 체액에 젖는 살들과 그녀가 아이가 지났을 산도를 짐작한다고 한들 어찌 해볼 도리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어찌해볼 도리가 없다고는 해도 내가 추은주를 바라볼 때 짐작할 수 밖에 없는 그녀의 몸은 독자를 불편하게 한다. 무언가 보여지는 대상으로서 불공평함을 가지고 있는 느낌이다.

시선의 불공평함은 이 소설의 곳곳에서 드러난다. 아픈 아내의 몸을 묘사하는 장면이나, 추은주를 바라보는 장면, 화장품 회사의 영업 묘사 장면, 질 세척제 개발 과정에서의 회의 장면 등등. 특히 질 세척제를 개발할 때 여자들의 개별적인 질이 그 부위만 편집되어 총 천연색 화면으로 등장했을 때 여자들은 자신의 질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수치심을 느낄 수 밖에 없다. 여자는 오로지 표면으로만 다뤄질 뿐인가? 여자의 표면은 색조화장으로, 여자의 심층은 (마음이나 내면이 아니라) 그저 질 세척제의 사용 부위로 등장한다. 그나마 개별적인 질들의 '질적 차이'는 영업의 논리에 따라 깡그리 무시된다.

김훈의 '화장'은 잔혹하다. 모든 살아있는 것들의 몸은 부분적으로 절단된 채, 관찰되고 묘사되고 있다. 피가 낭자하지는 않지만 소설에서는 대소변의 악취와 체액과, 종양, 밥이 진동한다. 살아 있다는 것은, 정녕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그를 볼 수는 없는 일일까. 다른 생명은 영원히 가닿을 수 없는 불가능한 꿈 일 뿐인지. 문득 아찔해진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외딴방
신경숙 지음 / 문학동네 / 1999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소설 - 소녀의 자기 고백

신경숙의 외딴방은 자전적 소설이다. 작가가 서두에서 밝히고 있듯, 이 소설은 사실과 픽션의 중간 어디쯤 될 것이다. 완전한 허구도, 그렇다고 완전한 사실도 아닌 소설이다. 작가는 자신의 소녀 시절을 언어로 옮겨내는 작업을 통해 그 시절을 형상화하고 추억함으로써 문학이란, 혹은 소설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이 소설은 두 겹의 구성으로 진행된다. 소설의 쓰는 현재의 작가 '나'와 산업체 특별 학교를 다니던 소녀 시절의 '나'가 동시에 이야기를 풀어 나간다. 작가 '나'의 삶에서 열여섯부터 스무살까지의 5년간은 불연속적으로 절연된 시간들이다. 산업체 학교를 다니며 작가의 꿈을 키우던 소녀는 원하던대로 작가가 되었지만 산업체 학교를 다니던 시절은 작가에게 일종의 상처로 각인되어 있다. 그것은 공순이였던 자신의 과거가 창피하다거나, 숨기려해서가 아니다. 그 시절에 겪었던 사건들과 만났던 사람들, 특히 희재언니와의 추억이 작가의 내면에 있는 소녀의 입을 봉인해버렸기 때문이다. 내면의 소녀는 아직도 그 시절의 외딴방으로 걸어 들어 갈수도, 외딴방을 자신의 언어로 말할 수도 없다.

그 시절의 '나'는 공순이였고, 좁은 외딴방에서 오빠 둘, 외사촌과 함께 부대끼며 살아야했으며 언제나 고단했다. 그 시절을 함께 겪었던 '나' 주변의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지금으로서는 상상하지 못할 과중한 노동과 저임금, 인권 유린의 현장이 곳곳에 묘사된다. 마치 풍속화를 그려내듯 작가는 섬세하지만 감상적이지 않은 어조로 이들을 담담히 묘사한다. 노조에 적대적인 자본가 계급과 아버지 없는 도시에서 가부장의 역할을 묵묵히 수행하는 큰 오빠, 여자인 동시에 어리고, 배우지 못해서 사회의 가장 밑바닥에 놓일 수밖에 없는 여성들, 아울러 그 야만스러웠던 시대에 부당한 이유로 온몸으로 폭력을 감당해야 했던 가겟집 청년과 같은 수많은 사람들까지. 소녀 시절의 '나'는 이 수많은 부조리를 경험하면서 성장해간다. 학교에 진학하기 위해 노조를 탈퇴하고, 대학에 진학하기 위해 창과 이별하고, 희재 언니의 마지막 부탁을 들어주지만 결국 그녀의 비극적인 죽음을 불러오게 된다.

그 시절의 소녀가 하루를, 한 달을 버티는 것 외에 도대체 무얼 할 수 있었을까. 이 소설의 회상적이면서도 고백적인 문체는 그 시절 소녀의 무력함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면서 이 소설이 가진 한계를 드러내주기도 한다. 소녀 자신이 희재 언니의 죽음을 막지 못했고 심지어 그 자살을 방조했다는 죄책감 때문에 열여섯부터 스무살까지의 시간들을 말하지 못한다. 그 시절의 신산했던 삶 때문에 소녀가 쓸 작품에서는 그 '시절'만 있을 뿐, 그 '시대'를 다루지는 못한다. 시간이 흘러 작가가 된 '나'는 말한다. 그 시절을 돌아보면 쿠데타, 광주사태보다 연탄불이 꺼지지 않았는지가 더 중요했었노라고. 문학이 무언가를 변화시킬 수 있어서가 아니라 금지된 것을 꿈꿀 수 있어서 좋았노라고 말이다. 그러나 다만 금지된 것을 꿈꿀 수 있어서 문학이 존재하는 것이라면 문학은 그저 소녀의 취미로만 제 기능을 하지 않겠는가.

다행히 이 소설은 그저 소녀의 취미로만 기능하지는 않는다. 이 소설은 오히려 그 고백과 회상의 형식을 통해 제 자리가 없던 사람들의 자리를 찾아주고 그 사람들의 진실을 발언했다는데 그 의미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한 줄의 기록으로만, 혹은 통계로만 존재하는 사람들을 형상화해서 그들의 진실을 기록하는 것이 말이다. 소설에서 이들의 진실은 아주 구체적이고 핍진하게 드러난다. 국이 없으면 밥을 먹지 못하는 큰 오빠의 식성을 맞춰야하고 계장에게 성희롱을 당하면서도 공식적으로 항의하지 못하는 소녀의 처지에서 아주 사소하지만 사소하지 않은 진실이 드러난다. 개인적인 것이 충분히 정치적일 수도 있음을 이 소설은 보여주고 있다. 문학이란 또한 그런 것이 아니었던가. 이름 없는 자들의 목소리를 내게 하는 것. 따라서 픽션과 사실의 중간 어디쯤 존재하는 이 소설에서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부터가 허구인지를 구분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흔히 말하듯 소설은 진실을 담고 있는 것이니까 말이다. 그러나 이 소설에서 말하는 그 때 그 시절의 진실이 과연 등장인물 모두의 진실한 '진실'일 수 있을지는 미지수이다. 두 겹으로 진행되는 이 소설에서 소설적 필요에 의해 오빠, 사촌과 처음 본 영화를 '금지된 장난'으로 설정한 것은 사실의 왜곡 까지는 아니라고 할지라도 소녀를 제외한 기타 인물들이 가지는 저마다의 진실이 '진실'이 아닐 수도 있음을 알려주는 단서가 된다. 또한 작가 역시 후일담의 형식으로 이 부분을 삽입한 것은 이런 의도를 굳이 숨기지 않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리라. 이 소설에서 어디까지나 소녀의 목소리만이 고백될 뿐이다. 이는 이 소설이 담고 있는 온전한 진실은 오로지 소녀의 진실이라는 말이 된다. 그 외의 인물들은 언제나 소녀의 기억으로만 기록된다. 그렇다고 해서 이 소설이 가지는 보편적 진실이 훼손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 소설이 단순히 작가가 된 소녀만의 진실이 아니기를. 그 시절을 말함으로써 치유가 되는 사람이 단순히 소녀였던 작가만이 아니기를, 그 시절의 모든 이가 자신의 우물 속 쇠스랑을 꺼내기를 진심으로 바랄 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