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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딴방
신경숙 지음 / 문학동네 / 1999년 12월
평점 :
소설 - 소녀의 자기 고백
신경숙의 외딴방은 자전적 소설이다. 작가가 서두에서 밝히고 있듯, 이 소설은 사실과 픽션의 중간 어디쯤 될 것이다. 완전한 허구도, 그렇다고 완전한 사실도 아닌 소설이다. 작가는 자신의 소녀 시절을 언어로 옮겨내는 작업을 통해 그 시절을 형상화하고 추억함으로써 문학이란, 혹은 소설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이 소설은 두 겹의 구성으로 진행된다. 소설의 쓰는 현재의 작가 '나'와 산업체 특별 학교를 다니던 소녀 시절의 '나'가 동시에 이야기를 풀어 나간다. 작가 '나'의 삶에서 열여섯부터 스무살까지의 5년간은 불연속적으로 절연된 시간들이다. 산업체 학교를 다니며 작가의 꿈을 키우던 소녀는 원하던대로 작가가 되었지만 산업체 학교를 다니던 시절은 작가에게 일종의 상처로 각인되어 있다. 그것은 공순이였던 자신의 과거가 창피하다거나, 숨기려해서가 아니다. 그 시절에 겪었던 사건들과 만났던 사람들, 특히 희재언니와의 추억이 작가의 내면에 있는 소녀의 입을 봉인해버렸기 때문이다. 내면의 소녀는 아직도 그 시절의 외딴방으로 걸어 들어 갈수도, 외딴방을 자신의 언어로 말할 수도 없다.
그 시절의 '나'는 공순이였고, 좁은 외딴방에서 오빠 둘, 외사촌과 함께 부대끼며 살아야했으며 언제나 고단했다. 그 시절을 함께 겪었던 '나' 주변의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지금으로서는 상상하지 못할 과중한 노동과 저임금, 인권 유린의 현장이 곳곳에 묘사된다. 마치 풍속화를 그려내듯 작가는 섬세하지만 감상적이지 않은 어조로 이들을 담담히 묘사한다. 노조에 적대적인 자본가 계급과 아버지 없는 도시에서 가부장의 역할을 묵묵히 수행하는 큰 오빠, 여자인 동시에 어리고, 배우지 못해서 사회의 가장 밑바닥에 놓일 수밖에 없는 여성들, 아울러 그 야만스러웠던 시대에 부당한 이유로 온몸으로 폭력을 감당해야 했던 가겟집 청년과 같은 수많은 사람들까지. 소녀 시절의 '나'는 이 수많은 부조리를 경험하면서 성장해간다. 학교에 진학하기 위해 노조를 탈퇴하고, 대학에 진학하기 위해 창과 이별하고, 희재 언니의 마지막 부탁을 들어주지만 결국 그녀의 비극적인 죽음을 불러오게 된다.
그 시절의 소녀가 하루를, 한 달을 버티는 것 외에 도대체 무얼 할 수 있었을까. 이 소설의 회상적이면서도 고백적인 문체는 그 시절 소녀의 무력함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면서 이 소설이 가진 한계를 드러내주기도 한다. 소녀 자신이 희재 언니의 죽음을 막지 못했고 심지어 그 자살을 방조했다는 죄책감 때문에 열여섯부터 스무살까지의 시간들을 말하지 못한다. 그 시절의 신산했던 삶 때문에 소녀가 쓸 작품에서는 그 '시절'만 있을 뿐, 그 '시대'를 다루지는 못한다. 시간이 흘러 작가가 된 '나'는 말한다. 그 시절을 돌아보면 쿠데타, 광주사태보다 연탄불이 꺼지지 않았는지가 더 중요했었노라고. 문학이 무언가를 변화시킬 수 있어서가 아니라 금지된 것을 꿈꿀 수 있어서 좋았노라고 말이다. 그러나 다만 금지된 것을 꿈꿀 수 있어서 문학이 존재하는 것이라면 문학은 그저 소녀의 취미로만 제 기능을 하지 않겠는가.
다행히 이 소설은 그저 소녀의 취미로만 기능하지는 않는다. 이 소설은 오히려 그 고백과 회상의 형식을 통해 제 자리가 없던 사람들의 자리를 찾아주고 그 사람들의 진실을 발언했다는데 그 의미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한 줄의 기록으로만, 혹은 통계로만 존재하는 사람들을 형상화해서 그들의 진실을 기록하는 것이 말이다. 소설에서 이들의 진실은 아주 구체적이고 핍진하게 드러난다. 국이 없으면 밥을 먹지 못하는 큰 오빠의 식성을 맞춰야하고 계장에게 성희롱을 당하면서도 공식적으로 항의하지 못하는 소녀의 처지에서 아주 사소하지만 사소하지 않은 진실이 드러난다. 개인적인 것이 충분히 정치적일 수도 있음을 이 소설은 보여주고 있다. 문학이란 또한 그런 것이 아니었던가. 이름 없는 자들의 목소리를 내게 하는 것. 따라서 픽션과 사실의 중간 어디쯤 존재하는 이 소설에서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부터가 허구인지를 구분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흔히 말하듯 소설은 진실을 담고 있는 것이니까 말이다. 그러나 이 소설에서 말하는 그 때 그 시절의 진실이 과연 등장인물 모두의 진실한 '진실'일 수 있을지는 미지수이다. 두 겹으로 진행되는 이 소설에서 소설적 필요에 의해 오빠, 사촌과 처음 본 영화를 '금지된 장난'으로 설정한 것은 사실의 왜곡 까지는 아니라고 할지라도 소녀를 제외한 기타 인물들이 가지는 저마다의 진실이 '진실'이 아닐 수도 있음을 알려주는 단서가 된다. 또한 작가 역시 후일담의 형식으로 이 부분을 삽입한 것은 이런 의도를 굳이 숨기지 않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리라. 이 소설에서 어디까지나 소녀의 목소리만이 고백될 뿐이다. 이는 이 소설이 담고 있는 온전한 진실은 오로지 소녀의 진실이라는 말이 된다. 그 외의 인물들은 언제나 소녀의 기억으로만 기록된다. 그렇다고 해서 이 소설이 가지는 보편적 진실이 훼손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 소설이 단순히 작가가 된 소녀만의 진실이 아니기를. 그 시절을 말함으로써 치유가 되는 사람이 단순히 소녀였던 작가만이 아니기를, 그 시절의 모든 이가 자신의 우물 속 쇠스랑을 꺼내기를 진심으로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