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랑한 도둑
유춘희 지음 / 그림같은세상 / 200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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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고만 요란하게 하는 그런 시집들은 가끔,  별 감동을 가져다 주지 못하는 일들이 빈번하다 그래서 소위 베스트셀러라는 시집은 일단 제껴두고 본다^^;;;(그 시집이 나쁜 시라는 말은 아님)

 나의 시 읽기는 내가 좋아하는 형식의 시들만 읽는 편식에 가깝다고 볼 수 있겠지만 내가 학자도 아닌 이상 구미에 맞지 않는 시들을 읽은 필요는 없는 것 아닌가.나는 내가 좋아하는 글을 읽고 그 감동의 결과물로 작가에게 힘이 될 수 있는 위로의 글 몇 마디를 감상문이랍시고 쓴다. 전문적인 평론가가 아니고서야(아니 평론가이더라도)어찌 그 작품들 낱낱의 의미들을 볼 수 있을까만 몇 마디 글이 다음 작품을 쓰는 데에 있어 채찍이 되고 에너지가 된다면야 기꺼이 할 수 있는 일 아닌가.

 나의 시 읽기의 특징은 반복이다. 읽기를 반복하다보면 시의 참맛을 제대로 느낄 수 있다. 쫄깃한 언어의 맛, 그 맛의 음미....그러나 반복해서 읽으려면 언제나 상당한 인내가 필요하다. 어떤 시는 만화처럼 한 번 읽고 나면 실증이 나는 빤한 시가 있는가 하면 도무지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 난해한 시, 독자와의 소통을 전혀 원치 않는 듯한 시, 또 어떤 시는 호흡의 길이와 맞지 않아서 마음까지 거칠어지는 시가 있다. 이렇게 지루하거나 빤한 시, 고통스러운 시를 반복해서 읽는 것은 시를 읽는 즐거움보다는 괴로움으로 마음을 다칠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의 시는 읽기에도 수월하고 읽을수록 새로운 점들이 발견되는 재미가 있었다.

 그녀는 도심을 벗어나 외곽에 사는 시인이다. 이러한 전기적 사실은 책의 앞뒤에 놓인 저자 약력으로도 알 수 있는 사실이지만 몇 편의 시를 읽지 않고서도 시인의 마음의 주소, 물리적인 주소가 ‘외곽’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외곽이라는 정서적인 소외와 지리적인 소외는 그녀를 시인으로 만들고 시인으로 살아가게 하는 또 하나의 기름진 요소가 아니었을까. 그녀의 '내가 사랑한 도둑'이라는 시집만 놓고 본다면 핵심 단어가 바로 이 '외곽'이라는 단어라고 판단된다. 수선스럽고 요란한 풍경과 약간의 거리감이 있는 외곽, 수다스럽게 떠드는 번화가의 수많은 소문과 진실들에 조금은 자유스러운 외곽. 어쩌면, 무언가가 내 소유의 무엇을 가져간다 해도 스스로 돌려줄 것이라는 믿음으로 조급하지 않을 여유가 있다.

 ...주인이/비워놓은 시간에의 완전한 잠입, 일순/날이 어두워졌고 나도/어두워졌다....헝클어진/몸에 빨대를 꽂고 밑둥까지/들이켠 후 훔쳐낸 /젊음을 어깨에 둘러매고 그는 /걸어나갔다 -도둑-

몇 잎 남지 않은/희망도 더는 장담할 수 없다.../누군가 자꾸 나를 털어간다 -건망증에 대하여2-

 외곽의 삶 탓이었을까. 과거의 시간까지 도둑맞고도 서두름이 없다. 어찌 도난당하고 잃어버린 것들에 대한 미련과 아쉬움에 이토록 여유를 부릴 수 있는 걸까. 글쎄 더욱 깊이 있는 독서로 탐사해야겠다.

 무엇인가 자꾸 잃어버린다는 생각을 하면 잃은 것에 대한 안타까움보다는 다음에는 잃지 않겠노라는 자기 방어적인 행동양식이 자연적으로 취득되기 마련인데 그녀는 다분히 의도적인 관조의 자세를 취하는 듯하다 아니 관조보다는 방관이라는 단어가 더 어울릴까? 과연 도둑이 제 몸 안의 밑둥 까지 훔쳐 내 갈 동안 그녀는 무엇을 했을까. 그러나 어쩌면 그것은 외곽에서의 여유와는 다른 것이다.

 혹, 여성으로서의 무기력이나 체념이 아닐까도 생각해 본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스스로 자신은 신 앞의 하얀 밥덩이라고 말하는 데서(신께서/하얀 밥덩이인 나를 그릇에 담아...-맛있는 독설 한 그릇-) 그리고 섣불리 진술할 수 없는 환경적인 요인과 전통적인 남존여비사상의 한국적인 문화의 습성에서 비롯되고 훈련된 습관이 아닐까.(그새 각주가 많이 붙었다/그러므로 나는 진술되지 못하고/다만 해석된다 -온유한 독서-)

 그러나 시집 어디를 보아도 그녀는 진술의 강한 의지를 보이지 않는다. 그렇게 외곽에서

  (너의 흉금을 제대로 뚫지 못하고) /나 이제 외곽에서 바람보다
빠르게 늙어가네/아뜩한 속력이 나를 태우고/목적 없는 길을 가네. 폭풍의/시간 속으로 질주하네/...더는 다른 생이 가능하지 않네

 서른 아홉의 나이에 꽁꽁 갇혀 살며 그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어느 쪽 단추를 눌러야할지 몰라 안으로는 발을 동동 구르면서도

 함정에 빠진 게 틀림없어/ 어느 쪽 단추를 눌렀던 거지?/...바람 몰아치는 따뜻한 /이 함정을 빠져나갈 길 없네/ 어느 쪽 단추를 눌러야하지? -주소.1-

  겉으로는 과감하게 규범을 깨트리지도 못 한 채로 스스로의 규범에 걸려 들고, 가야 할 길은 먼데 붉은 등이 켜진 도로에서 탈옥의 의지의 시동만 자꾸 꺼트리며 결국은 현실이라는 그 감옥(삶의 외곽, 지리적인 외곽, 세대로서의 외곽)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는 그녀는 다음과 같이 방향을 잃고 허둥거리는 자신의 인생을 반성적으로 토로하고 있다.

  처음 나 그 길에 들었을 때/기준 이하의 속력이었네. 두근대는/마음이 번번이 시동을 꺼뜨리고/주춤거리다 방향 잃었네. 편승한 규범이 수시로 참견해 오고 속도의 두려움이 제동기와 가속기 사이를 헛디뎠네. -외곽도로-

  또한 그녀는 이웃집에 살고 있는, 여름날의 오후 세시 같은 풍경으로 그녀의 삶을 보여주기도 한다. 여름 날의 오후 세 시는 어떤 이미지를 갖는가? 아마도 흙먼지 풀풀나는 시골집 마당과 나른하거나 낮잠을 막 깨어난 늙은 소의 권태로운 이미지가 우선 떠오를 것이다. 오후 세시의 풍경에서 그녀는 반려 없이 늙어가는 노처녀의 극에 달한 외로움으로 자신의 세계를 일부 보여주기도 한다.

  다가와 나를 틀면 저렇게/서른 넘은 노처녀의 생처럼 퍽,퍽,퍽 소리를 먼저 엎지르고/.....// 내 오랜 침묵의 꼭지를 틀러오시라/퍽퍽한 적막을 먼저 흥건히 엎지르고... -오후 세 시-

  모두 다 잃고 아무 것도 남지 않는 자신을 틀면 노처녀의 생이라고 말하는 여자 그녀는 자신을 가끔 하얀 밥덩이로 취급하기도 하고 스스로를 진술하지 못하고 읽히는 각주가 많이 붙은 책으로 정의하기도 하며 자신의 존재를 의도적으로 가볍게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세상은 잎사귀 많은 커다란 나무이고/나는 그 중의 아주 작은 /한 잎일 뿐 겨드랑이 밑에서 열심히 팔랑거렸던 나를 /거들떠보기는 할까?
아주 커다란 나무인 세상아 애인아 -커다란 나무인 너-

  놀아주는 동무 없어 병을 불렀네/나처럼 웅크린 그를 불렀네/.../내 연약한 슬픔이 /가는 잎처럼 떨렸네
위독한 사랑은/ 내 망명 정부,/제 볼 꽃으로 제 몸을 지우는 /양초처럼/나는 아득히 남은 목숨을 지우고 싶었네 -병유기-

  그녀가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단지 소외감 때문일까. 외로움의 극한까지 간 그녀의 소외가 읽는 이의 가슴으로 파고 든다. 얼마나 극한 외로움 속에 있게 되면 질병을 불러 놀아보자는 생각에 이르게 되는 것일까? 그러나 그녀의 삶의 재료는 분명 이 외로움이다. 폐허이고 슬픔이다. 질료 없이 가동 되는 삶이 없듯 그녀는 이러한 안타까운 것들로 그녀의 삶을 살고 놀고 요리하고 섭취한다.

  우선 슬픔의 껍질 벗기기/흐르는 세월에 여러 번 씻어/추억과 함께 두기
소량의 연민을 두르고 준비된 /슬픔을 장시간 가열하기
집착에 빠지지 않도록 가열도중/계속 저어주기
.../단, 과식은 주의시키기 -슬픔을 요리하다-

 그녀는 자신의 외로움과 폐허의 슬픔을 요리한다. 슬픔을 요리하면서도 항상 넘치거나 모자람 없이 적당하게 요리하고 적당하게 섭취한다. 그녀는 외로움을 자주 주물럭거린다 (떡주무르듯주무르는그리움자꾸손끝에묻는다. -그리움의 사칙연산-)

 바로...이런, 몇 편의 시에서 부분에서 지나치게 감성에 치우쳐 있지 않고 관조를 위한 방관이 아닌, 그녀만의 외곽에서 새롭게 태어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것은 아마도 자신을 비우고(자의든 타의든) 난 그 자리에서 새롭게 들어서는 또 다른 자신을 보는' 작업을 시작하려는 시도가 아닐까도 생각해 본다.

 그렇게 그녀는, 아이에게 말하는 형식을 빌어 스스로에게, 지금의 내면의 낡은 것들은 무찔러가야 할 폐허라고 말하고 있다. (시인이라면 누구나 마음에 있는 욕심과 일상적인 슬픔과 외로움을 비워내야 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새 그릇에 새 물이 찬다는 이야기처럼 그렇게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기에 앞서 그녀는 자꾸 달아나는 것을 방치하고 방관했던 것이다. 새로운 슬픔과 외로움과 그리움을 담기 위해서 말이다

 팔짝팔짝 뛰어 노니는 햇살과 말갛게/뭉쳐진 이슬과 그들에게서 맡아지는 푸른 냄새가 갖고 싶었다/북적이는 저녁이면 지상 위 단 한 채의 집, 나도 장 밖으로 터질 듯 한 불빛을 내보내고 싶었다/.../ 내 옆구리를 가리키며 일제히 소리치기 시작했다......새 잎이었다.아가야. 새롭게 돋아난 꽃잎이 네가 무찔러 갈 삶은 이제 여기 페허 부터 시작이다 -새 잎 나다-

'무찔러 갈 삶은 이제 여기 폐허로부터 시작이'라고 자신에 찬 어조로 강하게 말하는 그녀 그러니까 그녀의 여지껏의 '외곽'은 시작되는 초원의 이전 모습이었던 것이다

전원을 넣으면 슬픔이 환해지네/베 빛깔과 제 소리를 내지 못하는 구형 텔레비전, 돋보기 쓴 슬픔이네/..구석의 엄마 다리 힘 잃은 수동재봉틀처럼 조용히 덮여 잠 오지 않는 밤마다 종영된 꿈들 천천히 돌려보네/...//전원을 뽑으면, 슬픔 환한 엄마가 한 점으로 왈칵 꺼지네 -슬픔이 한 점으로 왈칵 꺼지네-

사진 속에서 웃고 있던 숱 많던 눈썹을 어디다 다 떨구고 문신자국 선명한 눈으로/ 그녀가 너무 멀리 다녀왔음을 그리고 너무 멀리 다녀온 사람들은 저렇게 재미없고도 긴 이야기책을 오래 오래 넘기며 일러줘야만 한다는 것을 알아채었다 -당고모-

슬픈 언니 나를 업어다 /어느 가을 낯선 시간의 끄트머리에 내려놓고/가버렸네. 서릿발 몰아올 듯/차가운 바람 맨 얼굴에 맞으며나는 여태 두리번거리네//어디만큼 갔나/어디 만큼 갔나
-어디만큼 왔니-

그녀에게는 자신을 가끔 오자의 존재로 여기는 연민의 유전인자인 아버지가 있다(그의 문법을/받아 적지 않았네/자주 아버지를 나와/문장 바깥을 걸었네/.../오자인 나를/지우지 않으려고 당신을/통째로 수정했네/.../ 아름다운 오자 하나 /아련히 거기 있네- -오자-)

구형 텔레비전 같은 어머니에게 슬픔이 유전되어 젊은 나이로 너무 많은 먼 생을 돌아오신 당고모를 열 여섯 나이에 슬픔으로 간직하고 있으며 어느 가을 낯선 시간의 끄트머리에 자신을 내려놓고 떠난 언니의 그리움이 있다. 아리게 자리잡은 가슴을 가지고 있다. 이제 그들에 대한 연민과 슬픔도 그것들을 물려받기 이전부터 자신의 슬픔이었음을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지금은, 풀이 돋아나고 있는 과거라는 폐허,그 그녀가 이면에 숨긴 진정한 폐허야 말고 누군들 쉽게 짐작할 수 있을까만 분명한 그것을 아직 드러내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녀의, 말하고 싶었지만 말함으로 더 가벼워지는 폐허란

어서 시력이 떨어져서/ 보지 않아도 될 것과/보아야 할 것도 더러 안보고 살 수 있는/침침한 세월 왔으면 좋겠네/.../ 그대 체온 느끼지 못하는 고목 껍질 같은 손등으로 살고싶네

위와 같이 그녀의 몸 어느 구석에도 퍼져있는 예민한 영혼의 촉수와 외곽의 외로움과, 슬픔과, 감옥 안의 감금과 길 위에서의 지체를 가리키는 다른 말이다. 그것은 그녀로서는 벗어나고자 하는 삶의 지체이며 영혼의 탈피에 대한 갈망 같은 생각이든다. 그러나 역시 그녀는 그 마저 부정하는 듯한 모습을 보인다. 부정의 부정은 강한 긍정이라는 사실을 이미 약속되어 있음을 우리는 안다. 이미 숨긴 것이 그 이상의 것임을 짐작하고는 있는 것이다. 모든 것은 말 할 때 더 가벼워지고 더 존재가치가 떨어지는 법이다

창문을 열어젖힌 버스/느릿느릿 지나다/오랜 가뭄/나뭇잎 한 장 펄럭이지 않다/하늘은 구름/접었다 폈다 반복하다/누수 한 방울 없다/햇볕이 몸 큰 짐승처럼 어슬렁거리다/적요가 도시에 가득 붐비다//풍경의 바깥 /낯선 기호 선회하다/푸른 그림자/성큼 들어서다//풍경의 안쪽/와짝. 깨지다

그녀는 이제 느리고 권태로운 풍경이 와짝, 깨지길 원한다. 그리고 그녀의 생도 도심으로 들어서길 바란다. 외곽의 권태, 외곽의 위태함들을 벗어나 도심으로 무사히 질주하고 안착하는 것을 강렬히 욕망하고 있는 것이다. 다만 그런 욕망의 반어적 제시가 있을 뿐. 그러나 그런 역설과 부조화로 이르는 시적 진실이야말로 읽는 이로 하여금 감동에 이르는 열쇠가 아닌가.

불운은 나의 꿈!/불가해한 세상 너에게 탑승하여//불온한 기호로 시동을 켜고//불미함까지 속도를 내다가. 속도를 버리다가// 불민한 나라에//불시착하기.//불법체류하기. -희망사항-

그러므로 그녀가 희망사항으로 역설하고 있는 ‘불온한 기호로 시동을 켜고 불미함까지 속도’를 내서 불가능 할 것 같은 세계로 진입하고 싶다는 것은 온전하고 행복한 세계로의 진입을 간절히 소망하는 다른 표현인 것이다

이 시집 안에는 많은 폐허의 웅덩이를 숨겨 놓았다. 폐허를 느껴보지 못한 사람에게는 잘 읽혀지지 않는 삭막함을 그녀만의 방법대로 풍성한 시의 잎사귀로 가려 놓은 것이다. 그녀 기억의 방 곳곳에 숨겨둔 비밀스런 것들과 스며있는 향기와 그녀가 써 내려간 시들에게서 어딘지 모를 궁금증과 예민함과 삭막함이라는 모순된 이미지를 느낀다면 그것은 아마도 그녀가 창작해 낸 인생에 대한 거대한 모순어법을 시집에 적용한 결과일 것이고, 그녀만의 독특한 시 세계가 아닐까

그 누추한 몸들을 줄맞춰 앉힌 후 당신도/ 그 안의 항 몸이 된다. 노끈 하나 쥐지 않은 빈집만 허물처럼 벗어놓고 정작 돌아보지 말라고 등을 미는 어머니의 눈에는 금세 별빛 몇 개 내려앉는다. 어머니!/ 세월은요?/어머니 세월 챙겼어요? -이사-

내 질주의 처음은 아버지의 무르팍에 상처로 뒤돌아 가는 것. 그 나중은 피 흘리는 아버지의 생을 완주하는 것이었다 -어떤 릴레이 -

93년 현대시학으로 등단한 그녀의 문제작 ‘이사’와 ‘이사 그 후’‘어떤 릴레이’ ‘어느 봄날’, ‘슬픔이 한 점으로 왈칵 꺼지네’ 와 같은 시들이 있다. 그 외에도 주목해야 할 시는 관념적인 언어와 현실이 완벽한 조화를 이뤄내어 말이 현실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인 ‘배웅’ 이라는 시와 구두와 발의 이별을 사람 사이의 별리로 풀어 쓴 ‘이별을 위하여’ 60년대의 통속 잡지를 대상으로 시대와 시의 경박함을 드러내고자 한 ‘선데이 서울’등 다수의 시들이 눈길을 끈다

여자는 너무 쉬운 문장 아무나 눈을 돌려/흘끗 훔쳐 읽기 좋은 여자/ 가판대 앞 선 채로도 후루룩 읽혀지는.../
-선데이 서울-

글을 마치며 그녀가 진술하고자 했던 것은 시집 밖에 독자들의 상상에 있음을 그리고 진술보다는 아직도 읽혀지고 있는 그녀가 자신의 세상의 여자와 다른 생을 그녀의 어머니와 다른 생을 시를 통해서 아름답게 진술 할 수 있는 그 날 그의 시집은 선데이 서울처럼 흥미 있게 읽혀지면서도 숨겨 둔 그녀 딸로써 어머니로서 남성의 보조적인 기능의 가진 여성으로서의 '해석'이 아닌 본래의 '나'를 '진술'해 낼 수 있는 날이 오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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