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의 마음 - 아름다움에 대한 스물여섯 편의 에세이
이남호 지음 / 생각의나무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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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이 책에서 가장 인상적으로 읽은 글은 모라비아의 [권태]에 대한 서평이다. 그 글에는 어떤 여자에 대한 기막히게 매력적인 묘사가 나오는데..... 옮겨보면 이렇다.

"레먼 호수처럼 언제나 그 자리에 가만히 있는 여자, 나의 얼굴만 비춰주는 줄 알았더니 다른 사람의 얼굴도 똑같이 비춰주는 여자, 내가 쳐다볼 때만 내가 그 속에 있는 여자, 내가 달아나도 저물녘 아름다운 석양으로 치장할 줄 아는 여자, 아침의 이성으로 찾아가면 물안개 속으로 모호하게 숨어버리는 여자, 헤어지자고 말해도 맑은 얼굴로 가만히 쳐다보고만 있는 여자, 분노의 돌을 던져도 멸시의 동전을 던져도 잔 미소 같은 물결만 잠시 보일 뿐 가만히 있는 여자, 한결같이 다리를 벌리고 있는 여자, 그래도 순결하기만 한 여자, 어딜 가도 생각나는 여자, 호수 전체를 다 사버려도 내 소유가 될 수 없는 여자, 내가 찾으면 언제나 거기 있지만 내가 떠나도 역시 거기에 그대로 있는 여자,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여자, 언제나 평정을 잃지 않는 여자, 아무것도 모르는 여자, 아무것도 원치 않지만 결국 나의 모든 것을 가져가버리는 여자, 내가 빠져죽어도 흔적이 남지 않을 여자, 내가 앉아 울었던 자리에 다른 남자가 와서 노래를 불러도 가만히 있는 여자, 언제나 내 발 끝에 엎드려 있지만 언제나 제멋대로인 여자....."

이 책은 수록된 한 편 한 편의 글들이 거의 다 독창적이고 깊은 사색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빼어나다고 할 수 있다. (설악산 기행 같은 글은 좀 지루했지만..) 하지만 나는 사실 이런 가벼운 글들보다는, 저자의 다른 책 [느림보다 더 느린 빠름]에 수록되어 있는 것과 같은 심오하고 날카로운 현실 비판의 글들을 더 좋아한다. 그러나 위에 인용한 부분으로 인해서, 이 책은 나의 마음을 가장 강하게 사로잡은 한 권의 책 후보가 되어버렸다. 실재하는 어떤 여자도, 저기에 묘사된 여자만큼 남자의 속을 미치게 만들지는 못하리라. 한숨을 깊이 내쉬면서 읽고 또 읽다가 허공을 쳐다보게 되는 ... , 책을 읽으면서 오랜만에 그와 같은 경험을 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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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07-09-12 2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용한 글은 마치, 오규원의 시 '한 잎의 여자'를 보는 것 같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