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우리 시대 평화주의자들에게 전하는 외침...그날, 나가사키에 무슨 일이 있었나겁쟁이라 욕먹더라도 할 말은 해야겠습니다  /  이용석 (stego)   
 

병역거부자들이 전쟁에 대해서 이야기하면 대뜸 "군대도 안 간 놈들이 무슨 자격으로 평화를 이야기 하냐!", "다른 사람들이 군대 가서 지켜주기 때문에 너네 같은 인간들이 한가하게 병역거부 이야기 할 수 있는 거다" 같은 반응을 보이는 사람이 많다. 

주로 군대에 다녀온 사람들, 혹은 전쟁을 몸소 겪은 어르신들이 많이 그런다. 그럴 때마다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들은 말할 수 없다"는 억지가 답답하면서도, 한 편으로는 전쟁의 참혹함을 겪은 사람들이나 군대에 다녀온 사람들이 나서서 "전쟁을 준비하는 것은 평화를 파괴하는 일"이라고 소리쳐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다.

나가이 다카시가 쓴 <그날, 나가사키에 무슨 일이 있었나>를 보는 순간 '아, 이 사람이 내 답답함을 풀어줄 사람이구나!' 탄성을 내질렀다. 누가 더 끔찍한 지옥을 겪었는지 경쟁하는 것은 의미 없는 일이지만, 적어도 원자폭탄 피폭자가 외치는 '평화'에 딴지 걸 사람은 아마도 없을 테니까. 고백하건데, 누가 나를 대신해서 저이들의 코를 납작하게 해주면 좋겠다는 좀스런 마음으로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애국자 의사선생님, 평화주의자가 되다

<그날, 나가사키에 무슨 일이 있었나>는 의사이자 방사선의학 연구자인 나가이 다카시가 1945년 8월 9일 두 번째 원자폭탄이 나가사키에 떨어진 뒤 사람들을 치료하면서 보고 듣고 조사하고 느낀 것을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쓴 책이다. 좀스런 마음으로 읽기 시작했기 때문에 첫 부분에선 당혹감을 감출 수 없었다. 다카시가 병역거부를 옹호했던 평화주의자, 아인슈타인 같은 사람이기를 바랬기 때문이다. 
 
나가이 다카시는 성실하고 책임의식 강한 과학자이자 의사였지만, 전쟁이나 제국주의를 비판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이는 피폭된 사람들을 치료하러 성치 않은 몸으로 폐허가 된 길을 헤치고 다니는 인도주의적인 의사였고, 실험기계와 연구자료들이 불타버린 뒤에도 끊임없이 탐구하고 심지어 피폭된 자기 자신조차도 관찰할 정도로 탐구열에 불타는 지식인이었지만, 전쟁이나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비판의식은 없었다.

오히려 일본이 전쟁에 졌다는 소식을 듣고 펑펑 울고 '나라가 망한 마당에 환자는 무슨 환자냐', '그따위 환자를 구해 보았자 이제 와서 조국이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싫다!'고 생각할 정도로 '평범한' 정치의식을 가진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이는 사람들을 치료하는 의사로서, 진리를 탐구하는 지식인으로서 책임을 다하면서 생각이 달라진다. 

"오늘날 이런 비참한 일을 맞게 된 것은 여태 일본이 개인의 생명을 너무도 함부로 생각하고 소홀히 여겼기 때문이 아닌가? 한 사람의 생명을 존중함으로써 지금 내가 여기 있는 것이다."


평화를 원한다면 전쟁을 준비하라?

군인으로 징집되었다가 전쟁이 끝나고 돌아온 제자들과 나눈 대화는 사뭇 감동적이다. 일본이 전쟁에서 항복한 것이 분하다고, 자기들은 아직 싸울 여력이 있다고 분통을 터뜨리는 제자들에게 나가이 다카시는 차분하게 말한다.

 "나는 전쟁 중 국가의 최고 명령에 따라 전심전력으로 싸웠습니다. (중략) 우리 젊은 학도들이 끝까지 비겁한 태도를 취하지 않고 진정으로 구호에 매진하였다는 점은, 아무리 일본이 패하고, 일본의 전쟁 목적이 정의가 아니라는 것이 증명되어도… 그것과 상관없이 아름다운 일이라도 믿습니다."

그러면서 전쟁이 과학에선 진보를 가져오지 않느냐는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이렇게 많은 인명과 물질, 그리고 시간을 투자하여 평화를 추구한다면… 틀림없이 더 큰 효과가 있을 것입니다. 아무리 변명을 해도 전쟁은 이로운 일이 아닙니다."

전쟁을 준비하는 데 들어가는 돈과 시간을 노력을 평화를 위해 들인다면? "평화를 원한다면 전쟁을 준비하라"는 신조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나와 병역거부자 친구들이 던진 질문이었다. 국가의 명령에 따라 전쟁을 수행하던 사람이 전쟁의 가장 참혹한 현장에서 죽음을 일상으로 겪으면서 얻은 평범한 진리다.

하지만 이 평범한 진리는 전쟁으로 막대한 이익을 거둬들이는 사람들에 의해서 아주 간단히 '철없는 이상주의자들의 몽상'으로 여겨진다. 그런 사람들에게 나가이 다카시는 아주 단호하게 이야기했다. 

"그날, 그때! 이 땅 위에 벌어진 지옥의 형상을 여러분이 단 한 번이라도 보았다면, 전쟁을 또 한다는 말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비겁자, 배신자가 되더라도 "전쟁 절대반대!"

방사선의학을 연구하다가 백혈병에 걸린 나가이 다카시는 원자폭탄이 터지며 피폭된 뒤 몸을 돌보지 않는 열성적인 구호 활동으로 병세가 악화되었고, 결국 1946년 나가사키 역에서 쓰러진다. 죽음을 앞두고 그이는, 원자폭탄으로 엄마를 잃고 아빠마저 잃게 될 자신의 두 아이에게 유언을 남긴다. 

"(전략) 그리운 어머니를 너희에게서 빼앗아간 것은 무엇일까? 원자폭탄일까? 아니다! 그것은 원자의 덩어리에 불과할 뿐이다. 기계에는 사람을 죽이겠다는 의지가 없다. 너희 어머니를 죽이기 위해 원자폭탄이 우라카미에 떨어진 것은 아니었다. 원자폭탄은 전쟁을 하는 인간에 의해 그곳에 투하된 것이다. 너희 어머니를, 그렇게 다정했던 어머니를 죽인 것은 바로 전쟁이다. (중략) 우리들 중에서 평화헌법을 개정하여 전쟁포기 조항을 삭제하라고 외치는 무리가 나타날지도 모른다. 그 주장은 자못 그럴 듯한 명분을 열거하면서 여론을 일본의 재무장 쪽으로 몰고 갈지도 모른다. 만일 그런 순간이 온다면, 그때야말로… 마코토야, 가야노야. 설령 너희들이 최후의 두 사람으로 남게 된다 하더라도, 어떤 비난이나 폭력을 당하더라도, 단호하게 "전쟁 절대반대!"를 계속 외쳐주기를 바란다! 설혹 비겁자라고 멸시를 당하고 배신자라고 두들겨맞더라도 "전쟁 절대반대!"의 외침을 끝까지 고수해주기 바란다."

나가이 다카시의 유언을 읽고 한동안 멍해졌다. 마치 우리에게 하는 말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비겁자", "겁쟁이" 이런 말들은 병역거부자들이 많이 듣는 말이다. 우리는 겁쟁이는 아니다. 비겁자는 더더욱 아니다. 우리는 다만 '전쟁을 준비하기 위해 들어가는 노력을 평화를 실현하는 데 쓰는 것이 훨씬 더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나가이 다카시의 유언에 답하다

군대에 가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병역거부자들의 이야기를 듣지 않으려 하는 사람들에게 일침을 가해주기를 바라는 좀스러운 마음으로 책을 집어들었는데, 나가이 다카시는 오히려 평화를 위해 노력하려는 사람들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그이가 아이들에게 남겨준 유언은 국가와 시대를 뛰어넘어 지금 우리 시대를 살아가는 평화주의자들 모두에게 하는 말이었다.

"핵무기는 멋대로 하늘에서 떨어지는 게 아니다. 만드는 자와 사용하는 자와 그것을 명령하는 자가 반드시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것을 막는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핵무기는 어쩔 수 없는 것이 아니다."

나가이 다카시가 남긴 유언에 무언가 답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 답은 거창하고 아름다운 말로 평화를 정의 내리는 게 아니다. 우리가 핵무기를 막는 사람이 되는 게 다카시에게 할 수 있는 대답이다.

백선엽을 미화하는 역사의식과 싸우고, 집속탄을 생산하는 기업인 한화와 풍산에 압력을 행사해 '목숨장사' 해서 돈 버는 일을 중단시키고, 제주도 강정마을에 해군기지가 들어서는 것을 막아내는 일이야말로 나가이 다카시가 말한 "전쟁 절대반대!"를 온몸으로 외치는 일이자, 바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덧붙이는 글 | * 이용석 기자는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입니다.
* <그날 나가사키에 무슨 일이 있었나>(나가이 다카시 씀, 김재일 옮김, 섬 펴냄, 2011년, 11000원)
출처 : 겁쟁이라 욕먹더라도 할 말은 해야겠습니다 - 오마이뉴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1명] 1.2강 모두 신청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1명 : 1.2.3강 모두 수강하고 싶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