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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 유어 네임
김지호.시리얼 지음 / 연필 / 2020년 2월
평점 :
도무지 우유부단함의 결정체인 여주가 이해가 가지 않았다가, 알면서도 속없이 그저 좋다고 자길 맘껏 도구화 하라는 남자도 한심해 보였다가,
그래도 제일 나쁜건 사람 감정 가지고 노는 남조가 아닐는지?!
실제로도 이런 부류의 인간이 존재하기에 분노 게이지가 급상승.
그럼에도 손에서 놓지 못하고 책장을 다 덮을 때까지 읽은건 여주인공을 중심으로 한 1인칭 주인공시점이어도 섬세하게 돋보이는 심리묘사와 여주인공의 내적인 성장이 보였기 때문이다.
자기가 필요할 때만 부르는 사이. 서로 어떤 감정이 섞인 게 아니면 좋은데 민준은 지수가 자신을 좋아하고 있음을 훨씬 오래 전부터 빤히 알고 있었으면서 그걸 모르는척 눈감고 저 편하대로 이용했다.
침대를 벗어나면 서로 다시는 안 볼 사이도 아니고 동아리 같은 동기였으면서, 같이 동아리를 이끌어갔던 중심축이었으면서 참 잔인한 남자다.
그런 남자 옆에서 서서히 메말라가고 황량하게 가물어가던 지수는 애초에 민준을 왜 좋아했는지도 기억조차 못하고 이게 잘못됐음은 인지하지만 끊어내지 못하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반복되는 만남에 괴로워한다.
그때 구원자의 손길을 내미는 이가 있었으니,
바로 오래 알고 지낸 후배 서윤.
그저 그에게는 좋은 선배이고만 싶었고 나쁜 모습은 보여주기 싫었던 지수였건만 어쩌다 보니 민준과의 관계를 서윤에게 들켜버리고.
더 좋아하는 사람이 지는 법이라 했던가.
감정적 약자이자 절대적 을인 지수는 그 관계에서 진정 벗어나고 싶다고 호소하기에 이른다.
서윤은 그 방법으로 이른바 이독제독(以毒制毒)작전을 제시하는데, 자신이 대나무숲이 되어주겠다며 자신을
이용하라고 권하고.
보답받지 못할 외사랑에 그간 힘들었던 지수는 덥썩 서윤의 그 손을 잡고 마는데.
"대신할 수 있는 게 생기면 ... ...그 다음은 쉬워요. 처음만 좀 어렵겠죠. 나중에는 선배 스스로도 깜짝 놀랄 만큼 아무렇지도 않아질거예요.
제가 그 새끼 잊게 해줄게요."
마치 예언처럼 나중에 민준을 마주하고서도 빛바랜 사진 처럼 감정이 아무렇지 않아짐을 느끼는 지수.
그것과는 별개로 그녀 특유의 우유부단함과 진중함, 사려깊음이 상당히 답답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두 남자 사이를 우왕좌왕 하는거처럼 보일수도 있겠다 싶기도 했고, 처음 서윤하고 관계를 맺을 때 다른 남자 이름을 부르는 여자라니. 그걸 또 받아주는 남자라니.
아니 너님은 미륵 보살의 현신이랍니까, 대체?
나는 여주가 자꾸 남녀 사이에 대한 어떤 명확한 규명을 원하고 그것에 연연해 하는걸 보니 이게 다 애초에 첫단추를 잘못 꿰맨 탓이구나. 한편으로는 안쓰러운 생각도 들었다.
그리고 남주의 경우 좀 비겁하다 여겨지는 부분도 일견 있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내 머리로는 오랜 시간 짝사랑한 여자가 다른 남자와 자고 와서 자신을 만난다는데 그들의 사이을 짐짓 모른척 한다는 게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 역시 남주가 처연하다 싶을 정도로 싹싹 빌면서 옆에 있고 싶어서 그랬다고. 어쩌고 저쩌고 쏼라쏼라블라블라 이러쿵저러쿵 구구절절 썰을 풀어놓는데 진짜 커다란 대형견 그 느낌?
그리고 여주 생각보다 둔하달까 눈치가 없고 남주는 눈치가 빠삭하고 영악하다. 그럼에도 서윤은 지수를 좋아하기에 또다른 감정적 을이다.
읽으면서 일기예보의 인형의 꿈 가사가 많이 떠올랐다.
이런 애닳는 마음. 내 마음 아실 이. 누가 있으랴.
처음에 다른 남자 이름을 불러서 이불킥 흑역사를 만들어서 그런지, 남주는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는 것에 유독 민감하게 반응한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는 어느 시구절처럼 , 새벽에 밝아오는 햇빛이란 이름을 가진 '서윤'이라는 이름을 나중에는 선후배 관계가 아니라 은밀한 사랑의 행위를 나누는 연인관계에서 부르게 되는 것이다.
그들은 아마 사랑해서 참아주는 관계보다는 같이 있는 게 좋은, 그런 관계로 오랫동안 남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