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판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전미연 옮김 / 열린책들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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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나르 베르베르의 두 번째 희곡 <심판>이다. 이 책은 2015년에 출간되어 이미 프랑스 무대에도 올려졌는데, 뒤늦게 번역되어 드디어 우리도 책으로 만나 볼 수 있게 되었다. 등장인물은 피고인 아나톨 피숑, 변호사 카롤린, 검사 베르트랑, 재판장 가브리엘로 4명밖에 등장하지 않는다. 이들은 커튼을 이용해 세 구역으로 나눠진 무대에서 폐암으로 사망하게 된 전직 판사 아나톨을 심판하는 역설적인 상황에 놓인다. 마치 나는 천사들 중 하나인 방청객이 되어 재판을 지켜보는 느낌이 든다.

아나톨은 자신은 좋은 사람이었다며 무죄를 주장하고, 전생에 부부였지만 이혼했던 카롤린과 베르트랑이 무대 위 스크린을 통해 아나톨의 이전 인생을 보며 각자의 입장을 대변한다. 재판 결과로는 삶의 형에 처하거나 아니면 사후세계에 남게 되는데, 다시 환생해서 사는 것을 축복이라 생각하지 않고 '삶의 형'이라고 표현한 점이 흥미로웠다. 아나톨이 자신의 죽음을 믿지 못하고 계속 부정하는 모습, 자신이 죽은 후 주변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갈지를 걱정하며 그들을 불쌍하게 여기는 모습, 판결 결과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절규하는 모습 등 가벼운 실소를 유발하게 하는 장면들이 많다. 처음엔 자신이 끼고 있는 반지와 유산 문제로 그의 모습 그대로 삶으로 돌아가고 싶어하지만 결국 자신의 죽음을 인지하고, 다른 모습으로 다시 태어난다는 새로운 것에는 거부감을 보이게 된다.

편견에 찌든 말을 하는 베르트랑과, 그와 옥신각신하며 아나톨의 재판 결과에 대해 여러 설정을 정해 가는 카롤린의 대화가 유쾌하게 그려져있어, 아나톨의 앞으로의 방향에 대해 즐겁게 따라가며 읽었다. 유전 25%, 카르마 25%, 자유의지 50%로 이루어진 삶에서 실패의 두려움 때문에 시도조차 하지 않는 것, 재능을 뒤로하고 편안한 직업에 안주하는 선택을 하는 것에 대해 한 번 더 생각해보게 되었다. 사후세계라는 주제가 <신과 함께>라는 영화를 떠올리게 하는데, 이 책에서는 의료계 인력 부족, 교육 개혁, 법조계 부패 같은 프랑스 사회의 문제와 결혼 제도의 모순과 부조리를 건드린다. 죽음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유쾌하게 풀어내어 금방 읽을 수 있는 책이다. 현재의 생에서 나는 모범적으로 살고 있는지 생각해보고, 나의 행복을 일구기보다 불행을 줄이려고 애쓴 건 아닌지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그의 첫 번째 희곡 <인간>도 읽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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