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환상의 여인
윌리엄 아이리시 지음, 이승원 옮김 / 창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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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위기` 하나는 제대로. 정교한 짜임새에 감탄하기 보다 그 으시시한 느낌에, 시간이 흘렀음에도 몇 개의 장면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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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의 발견 1 올 소울스 삼부작
데버러 하크니스 지음, 김민수 옮김 / 엘릭시르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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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역사학자가 판타지 로맨스를 쓰면 이런 글이 나온다..!? 내용 중간에 느낀 것 중 하나. 남자 주인공이 보유하고 있는 책장은 사실 작가가 바라는 책장이 아닐까ㅎㅎ 3부작이라는데 어서 후속이 출간되길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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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의 법칙
편혜영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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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혜영의 새 장편이다. 새 책을 읽기 전, 기억을 조금 더듬고 나니 예전에 읽었던 재와 빨강이 떠올랐다. 이미지가 제목과 참 어울리는, 딱 그만큼 지저분하고 부스러졌으며 빨갛고 뜨거운소재와 내용으로 가득했던 소설이었다. 솔직히 첫 작품집인 아오이가든은 읽지 못했다. 잔인하고 끔찍하기로 악명이 높아 지레 겁먹은 탓이었다. 그럼에도 언젠가는 꼭 읽을 소설집 리스트에 올라 있다. 그로테스크함이 문제되진 않는다. 나락으로 떨어지는 인간의 삶을 그린다는 것에서 읽을 필요가 있는 것이다.



편혜영이 그려내는 인간의 이야기는 내 속에 자리 잡고 있는 안 좋은 감정들을 자꾸 찔러댄다. 불편할 뿐만 아니라 울고 싶을 정도다. 재미있는 건, 겨우 다 읽고 나면 괜히 시원하다는 것이다. 마치 근질거렸던 걸 잊고 있었는데, 누가 부러 그것을 꼬집은 것처럼?






조금 오그라드는 예찬으로 서두를 시작했다. 그만큼 편혜영 소설이 좋다. 물론 새 장편도 좋았다. 최근의 편혜영 소설을 읽은 누군가는, 더 이상 아오이가든과 같은 독특한 이야기를 쓰지 않는다는 것에 아쉬워했다. 훨씬 담백해진 소재와 내용, 그래서 밋밋해 보인다는 이야기일 수도 있겠다. 어쩌면 바닥으로 떨어진 인간의 삶에 대한 새로운 표현을 더 이상 찾아볼 수 없다는 것에서 아쉬움을 쏟아내는 것일지도 모른다.



새로운 표현을 버렸다고 했지만. ‘인간의 삶을 버리지 않았다는 것에 의미가 더 있지 않을까. 새 이야기들은 바닥에 떨어져 있는 현실을 똑바로 마주본다. 그리고 그 속에서 숨을 이어나간다. 마치 우리가 지금-현재를 아등바등 살아가듯 말이다.

 






편혜영이 그리는 인간은, 외로울 뿐만 아니라 적의에 가득 차 있고 불안에 빠져있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윤세오신기정역시 그렇다. 윤세오는 삶의 유일한 버팀목이었던 아빠를 잃는다. 사고도 아닌 자살이었다. 부채를 견디지 못해 가스선을 제 손으로 잘라버린 것이다. 모든 것을 알지 못했던 윤세오는 좌절한다. 그리고 그 좌절을 분노로 돌린다.




교사인 신기정은 자기 반 학생인 원도준과의 트러블로 학교를 나서게 된다. 심지어 배다른 동생은 멀리 떨어진 도시에서 사체로 발견된다. 동생을 없는 사람 취급했던 신기정은 그제야 동생의 삶에 관심을 두게 되고, 동생의 행적을 찾아 나선다.

 


 신기정은 말없이 누워 있는 동생에게 물었다무슨 일이 있었니동생은 꿈쩍하지 않았다그런데도 대답을 들은 기분이었다.

 “어쩌다보니 그렇게 됐네.”

 말을 할 수 있었다면 아마도 그렇게 대답했으리라

(30p.)



 




신기정의 동생, 신하정이 내뱉는 저 대사는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 그리고 글을 읽고 있는 우리들까지. 모두의 입에서 튀어나올 만한 대사다. 무슨 일이 있었든 예측하지 못하는 방향으로 가다가 바닥에 떨어졌다. ‘어쩌다보니.’ 신기정과 윤세오의 행보도 이렇게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인과라고 설명하기엔 둘의 움직임의 동기는 헐거운 부분이 있다. 아버지의 죽음이 빚 독촉과 관련 있을 거라 생각했던 윤세오는 종종 집을 방문했던 이수호를 따라다닌다.

 

 


 윤세오는 그간 이수호의 일정과 행동반경출근시간과 귀가시간만나는 사람들을 곰꼼히 기록해왔다우편물을 이용해 집 전화번호나 생년월일 같은 것을 알아뒀고 가족관계를 유추했다식성과 사소한 습관도 알아냈다현재 담당하는 채무자가 누구인지그의 빚이 얼마나 되는지도 알 수 있었다그런 정보들이 이수호의 행동을 예측하게 하리라 생각했다.

 아니었다상황과 감정은 도무지 알아차릴 수 없었다이수호는 자주 윤세오가 짐작 못한 식당에 갔다

(129-130p.)


 

 

예측은 빗나간다. 은 자꾸 예상했던 방향과는 다른 쪽으로 뻗어나간다. 그런데 그것이 좋거나 나쁘거나 한 쪽으로 치우쳐진 것은 아니다.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부터 치우쳐져 있지 않으니까. 이수호를 감시하고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슈퍼마켓에서 일하게 된 윤세오는 마켓에서 일하는 신재형과 김우술을 바라보며 이런 생각을 한다.

 


두 사람은 윤세오와는 다른 세계에 속해 있었다. 선의를 가진 인간들의 세계. 그러나 인간이 선량한 존재라는 생각에 취해 있을 때 꼭 그런 것만도 아니라는 사실도 그들이 일러주었다. 시시한 비아냥거림을 아무렇지 않게 툭툭 내뱉고 실없는 웃음을 터뜨리고 기분 나빠 툴툴대다가도 의기투합하는 걸 보면 인간은 선과 악 같은 구분과 상관없는 존재였다

(134-135p.)




윤세오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은 것 같지만, 윤세오를 포함해서 신기정, 이수호, 신하정. 그리고 이들을 둘러싼 모든 사람들이 다 선의와 악의 사이에 있는 이들이다. 그것의 의도와 상관없이 말이다. ‘어쩌다가 보니그런 삶에 처한 이들은 목숨을 이어나가기 위해 더 나은 쪽으로, 옳다는 쪽으로, 혹은 그 반대의 방향으로 나아가려고 한다. 그 방향도 선악의 갈림길에서 휘청대면서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엇나간다. 그러나 엇나간 길은 이상하다거나 드라마틱하게 느껴지진 않는다. 시간이 조금 흐르고, 뒤를 돌아보았을 때에야 자기 자리를 알게 된다. 삶이란 것이 원래 이런 식으로 흘러간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말이다.

 



그애가 온 뒤로 엄마와 신기정, 동생의 삶은 제각기 뻗어나갔다. 그 당시도 이상하지 않았고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엄마는 동생을 통해, 동생은 온기 없는 가족을 통해, 신기정은 엄마를 통해, 삶은 자주 손쓸 수 없는 방식으로 전개된다는 걸 어렴풋이 깨닫게 되었을 뿐이다. (26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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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남겨진 것들
염승숙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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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이상한 일들이 많이 일어난다.

요즘 많이 드는 생각이기도 하고, 또 사람들이 많이 하는 말이기도 하다. '이상한'이라는 말이 친숙하게 들릴 정도다. 원래 세상은 무척이나 넓으니까. 이렇게 다양한 일들이 많이 일어나는 건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해야 할까? 혹은 내가, 그리고 이상하다고 느끼는 우리가 특별히 예민한 감수성을 타고난 사람들일까?

 

잘 모르겠다. 분명한 것은 우리가 당연하다고 느끼는 일들이 사실은 당연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말은 이렇게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현재 당연하게 느끼지 않는 일들이 당연하게 느끼게 되는 순간들도 올 수 있을 것이다. 즉, 세상은 아무도 예상하거나 단언하여 정의내릴 수 없다. <노래하는 밤 아무도>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세상은 '불가해'한 것이다. 이런 세상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이 소설집에서 나오는 것처럼, 어쩌면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완전한 불면>에서처럼 어느 누구도 편하게 잠을 자지 못하거나, <눈물이 서 있다>에 나오는 것처럼 갑자기 귀가 들리지 않을 수도, <호우>에서처럼 부유종 때문에 오후 4시면 비가 내리게 될지도 모른다.

 

이렇게 염승숙의 소설이 펼쳐 보여주는 세상은 묘한 구석이 있다. 소설 안에서 나타나는 세상은 예측불가능하다. 하지만 이것이 그저 ‘상상력’이라고만 말할 수 있을까? 불면증은 근대 이후부터 사람들을 끈질기게 괴롭혀 온 병이 되고 있고, 각종 소음이나 이어폰의 사용 등으로 이명을 겪는 사람 또한 꾸준히 늘고 있다. 부유종? 질병들? 그리고 감염된 사람들의 격리와 주변의 시선?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것들이 한 발자국만 앞으로 간다면 소설의 상황과 굉장히 흡사해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변해버린’ 세상 속에서 또 겪고 있는 것이 있다. 소설에 나오는 인물들이 대부분 그렇듯이, 사람들은 우울과 상처의 틈바구니 아래에 놓여 있다. 소설의 이 인물들은 가끔 '세상은 왜?'라는 말을 중얼거리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그 물음들은 답 없이 질문자 곁에서 부유하고 있을 뿐이다.

 

표제작인 <그리고 남겨진 것들>에서와 같이 외롭게 홀로 죽은 사람들은 사후에 답답하게 꽁꽁 끼어 있는 벽돌로 남게 된다. 죽기 전에도 그러했지만, 벽돌이 되어서도 그들의 외침을 듣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게다가 '로테이션' 때문에 그 외로운 벽돌들도 자꾸 변화를 겪는다. <시절의 폭>에서 '나'와 사촌인 '명'이 어릴 적에 겪은 일은 상처가 되어 그들의 삶을 조금, 바꾸어 버렸다. '나'의 작은 아버지이자 '명'의 아버지가 한 말만이 오롯이 남아있을 뿐이다.

 

 

'인간도 결국에는, 누군가의 먹이가 되겠지.'(<시절의 폭> 중에서, 270)

 

 

인간을 잡아먹는 저 주체는 누구란 말인가. 다른 인간, 그리고 그 인간이 속한 공동체, 사회. 모든 테두리일지도 모른다. 모두가 테두리 안에서 태어나지만, 보호를 보장받기 이전에 자격을 검증받아야 한다. 기준치에 합당하지 않으면 그 테두리에게 먹힐 것이다.

 

 

표제작인 <그리고 남겨진 것들>의 이야기를 들춰보면, 외롭게 죽음을 맞이하고 나서도 조그만 벽돌이 되어 벽면에 ‘끼어있는’ 주인공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작가의 분신처럼 느껴지는 <청색시대>의 주인공 역시. 과거를 회상하면서, 예측할 수 없는 미래를 앞에 두고 ‘청색’의 바람이 부는 세상에서 여전히 아무것도 아닌 채로 살아간다. 이렇게 먹히고 난 다음이라면, 혹은 먹히고 있는 중이라면? 제목에서 말하고 있는 ‘남겨진 것’이 있기는 할까?

 

 

아마도 우리가 그 남겨진 것을 찾아서 기억해야 할 것이다.

 

 

‘잊어야 하는 것과 잊지 말아야 하는 것, 잊히는 것과 잊히지 않는 것의 간극에 무엇이 위치해 있는지, 그는 알 것도 모를 것도 같았다. 사라지는 것은, 잊히는 것은, 어떤 의미로든 슬픈 것이다. 그것은 연민도 무엇도 아니지만, 때로는 노력해서라도 기억해야 하는 수고가 필요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만이 덧없이 되풀이될 따름이었다.’ (<습> 중에서, 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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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책감 문학동네 시인선 61
임경섭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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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무거운 제목이다. ‘죄책감’, 세상에 죄책감 없는 사람도 있을까. 어떤 사람들은 그런 감정이란 없는 것이라며 발뺌할지도 모른다. 그만큼 남에게 드러내기 어려운 감정이다. 때로는 불편하기까지 하다. 말 그대로 무겁기 때문이다. ‘죄의 무게라는 말이 실감이 날 정도다. 죄책감에 사로잡힌 사람은, 그리고 그로 인해 절절하게 진지한 모습으로 자신의 죄를 시인하는 모습에까지 이르면 분위기는 숙연해진다. 죄의 무게가 분위기를 압도한다.


솔직히 시를 읽는 내내 불편했다. 시 구석구석에 죄책감에 물들어 있는 주체의 목소리가 묻어있었기 때문이다. (고백하건대 이런 부류의 글들은 불편하다 못해 잠을 못 자게 만든다. 몇몇 독일 문학과 일본 문학에서 자주 느끼던 불편함과 닮아 있다.) 물론 그 불편함의 정도는 각각 시편에 따라 정도가 다르다.

 

 

친구의 결혼을 앞에 두고

비어가는 잔고를 걱정했다

 

우리는 춤추고 노래 불러줄 수고를

몇 장의 지폐와 교환하고 있다

<가을>

 

누구나 한번쯤은 겪어보았을 의 고백이다. 우리를 죄책감에 시달리게 하는 것은 이렇게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에게 짓는 마음의 죄다. 국가의 법률에서 정의를 내리는 죄보다는 범위가 더 크고 개인적이며 내밀한 곳에 위치해 있고, 대부분 평생 비밀로 감추고 살아갈 수도 있다. 그렇지만 이것을 집요하게 겉으로 드러내는 것이 바로 시적인 주체가 할 일이다. 위의 경우보다 더 불편한 죄책감들을 드러내는 시들이 많다. 이를테면 가족과 관련한 시들이다.

 


 

출근길에 생각했다

나는 왜 저 사내가 되지 못할까

선로는 나가지도 들어가지도 못하는 문

그 위에 서서 나는 왜 저 사내가 되지 못할까 생각했다

 

그러니까 등이 아주 작게 말린

가난한 아비 하나가 선로 위에 누워 있던 거다

잠이 오지 않을 때마다

외할머니는 그의 등을 긁어주었던 거다

좁게 파인 등골은 손바닥으로 쓰다듬으며

등이 작으면 저 긴 잠 일렁이는 물결에도

별자리들이 출렁이지

출렁이기 마련이지,

혀를 찼던 거다

 

외할머니 연곡 뒷산에 묻고 오던 날

어린 그에게 감을 따주었다는 셋째 외삼촌과

그날 따먹은 건 감이 아니라 밤이었다는 첫째 외삼촌,

그는 그 중간쯤에 서 있는 담이었던 거다

혹은 이듬해 연곡천에서 끓여먹던 개장국 안에

흰둥이의 눈깔이 들어 있었다는 사촌누이와

처음부터 대가리는 넣지도 않았었다는 막내의 실랑이,

그는 그 사이에 끼여 들리지 않는 발음이었던 거다

 

있거나 말거나 있었거나 없었거나

 

그러니까 선로 밖으로 휩쓸려나가

처음 보는 동네 정류장에서

노선도 모르는 버스를 기다리며 생각했다

나는 왜 달려오는 전동차 밑으로 몸을 눕히지 못할까

그리하여 수십 수백의 출근길을 몇십 분이라도

훼방 놓지 못할까

생각했다

<우두커니>

 

출근길에 가난한 아비 하나를 발견한다. 선로 위에 드러누워 출근길을 훼방 놓고 있다. ‘가난한 아비가 선로에 드러누운 그 모습에서 시적 주체는 등을 긁어주곤 했던 외할머니를 생각한다. ‘가난한 아비외할머니라고 말은 하지만 실은 시의 화자의 외할머니를 떠올리게 만든다. 장례 이후 친척들이 장례와는 아무런 상관없는 대화를 나누는 그 가운데에서 자신은 중간쯤에 서 있는 담이었고 들리지 않는 발음의 상태로 있었다. 그와 반대로 저 가난한 아비는 선로 위에 드러누워 온 몸으로 출근길을 방해하고 있다. 말은 없지만 세상에 대해 무언가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친척들이 외할머니장례식 이후에 주고받는 그 말들 가운데에서 아무런 말없이, 혹은 저 가난한 아비같이 온 몸으로라도 적의 아닌 적의를 표현하지 못했던 자기 자신에 대해 우두커니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형은 기타를 연습하네

엄마는 습관처럼 아프고

형은 습관처럼 기타를 연습하네

 

음악 선생인 아버지는 형이 딴따라가 될까봐 장롱 위에 기타를 올려놓았지 엄마가 입원을 하는 동안 형의 키가 자란다는 걸 몰랐던 모양이야

 

부모가 집을 비울 때마다

숨겨둔 음악이 빈집을 채우네

 

누나는 피아노를 시키면서 왜 형은 기타를 못 치게 할까?

 

피아노는 장롱 위로 올라갈 수 없으니까,

엄마는 앰뷸런스를 타고 서울로 올라가네

 

똑같이 의대 나온 사람들인데 왜 여기 의사들은 엄마의 병을 못 고칠까?

서울엔 의사들이 흰건반처럼 많으니까

누나가 서울에서 레슨 받는 이유를 진짜 모르겠니?

 

좋은 건 많은 거라고 형에게 배웠지

엄마의 병이 깊어지자

기타 연습할 시간이 많아져 형은 좋았네

엄마의 부재가 깊어지자

집 곳곳에 공의 검은 그림자처럼 굴러다니는 머리카락들

 

이게 도대체 사람 사는 집구석이야? 이놈의 여편네는 왜 청소도 안 하고 누워 있는 거지?

 

엄마가 죽을 병에 걸린 걸 알면서도 형이 지껄이자

아버지의 목소리가 걸어나오네

 

아버지가 있지도 않은 집안에서

 

- <클래식>

 

가정사는 클래식이다. 어느 집의 이야기든지 비슷한 패턴을 가지고 있다. 이 시에 나타나는 화자의 집안 이야기도 클래식과 같다. 아픈 엄마, 횡포를 부리는 아버지’, 형과 누나 틈에서 어린 눈으로 집안을 읊는 시의 화자 자신, 꿈을 키워나가는데 저지당하는 형과, 그런 형이 아버지의 횡포를 답습하는 것까지. 그렇지만 클리셰는 아니다. 가족관계를 클리셰로 치부해버리기에는 조금 가혹하다. 오히려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계속해서 차용되는 고전의 스토리, ‘클래식이라고 말하는 것이 옳다. 그리고 그 속에 담겨져 있는 가족 구성원 사이에 숨겨진 죄책감까지. 누가 누구에게 가지고 있든지, 죄책감은 분명히 저 안에 꽁꽁 숨겨져 있다.

어떻게 보면 죄책감은 오해와 관련이 있을 수 있다. 잘못을 타인이 명명하여 그에 따른 응당한 대가를 받으려 한다면, 그리고 실제로 그 대가를 받는다면 죄는 해소가 될 수 있다. 그렇지만 사람 일이 다 그렇듯, 그리고 마음의 일이 다 그렇듯이 감정이라는 것은 물물교환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죄의 대가와 상관없이, 혹은 죄의 여부와는 상관없이 죄책감은 어느 때나 불쑥 나타날 수 있다. 어찌 보면 과잉이라는 말과 연관이 될 지도 모르겠다. ‘과잉혹은 오해’, 두 축의 움직임 위에서 죄책감은 자꾸만 시의 화자를, 그리고 읽는 우리를 바닥으로 가라앉게 만든다. 이 때, 시집의 마지막 시에서 이렇게 이야기를 한다.

 



 

우리는 계단을 내려갔다

짐을 부리자마자 계단을 내려갔다

눈이 쌓인 만큼 계단은 보이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 곳이 계단이라 믿으며 계단을 내려갔다

눈이 쌓인 곳으로 소리도 사라졌다

길이 길이었던 곳으로

계단이 계단이었던 곳으로

우리는 내려갔다

내려가도 내리막이었다

멀리서 벼랑을 때려대는 파도는 몇천 년이고 그래왔다는 듯이

파도였다

 

우리는 계속 계단을 내려갔다

내려가다가 우리는

우리가 길을 만들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별 시답잖은 생각을 다

해보기도 하였다

천부에서, <죄책감>

 


시의 화자는, 그리고 우리는 시의 결을 하나하나 따라가며 죄책감의 계단을 밟아 내려간다. ‘오해과잉의 아슬아슬한 수위에서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우리가 길을 만들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별 시답잖은 생각을말이다. 시의 화자는 불편하고 무거운 감정인 죄책감을 마주보려 애를 썼다. 죄의 해소란 평생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오해과잉은 언제나 화자의 감수성 아래에서 살아갈 것이다. 그렇지만 시적인 그 움직임에도 어느 순간은 멈추어야 할 지점이 필요한 것이다. 화자의 삶에서나, 혹은 물리적으로 이 시집의 마지막에 있어서나. 이렇게 우리는 마지막 시를 통해 잠시나마 죄책감의 무거운 공기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렇지만 언제든 뒤를 돌아 계단의 아래쪽을 응시하고 싶을지 모른다. 이것은 일종의 유혹이다. 시집 죄책감을 읽고 싶은 유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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