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날치 - 정규 1집 수궁가 [special edition]
이날치 노래 / 뮤직앤뉴 / 2021년 2월
평점 :
절판


시대가 낳은 절묘한 아티스트, “수궁가” 음반 2장 구입하였습니다. 수궁가 필체 자체가 춤추듯 흥겹더군요. LP 향취가 물씬 느껴지는 포장 게다가 앞면 홀로그램 표지 따로 활용할 수 있도록 배려하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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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기인 > 포스트 모더니티의 조건: 현대문화 -모더니티에서 포스트모더니티로 가는 길

David Harvey, The Condition of Postmodernity -an enquiry into the origins of cultural change(1989)

역자 서문

이 책이 처음 발간된 1989년은 서양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의 문화적 지배력이 이미 쇠퇴하기 시작한 때였다. 사람들은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하여 사망선고를 내리고 보다 새로운 무언가를 찾아 나섰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하비는 포스트모더니티의 정치경제적 조건을 연구하여 문화변동의 뿌리가 무엇인지를 밝히고자 한다. 이를 위해 I부에서는 모더니티와 포스트모더니티를, II부에서는 포디즘에서 유연적 축적으로의 이행이라는 정치경제적 변화를, III부에서는 일상생활에서 나타나는 시공간 경험의 변화를, IV부에서는 포스트모더니티의 조건을 다루고 있다. (5)

서: 하비의 특장은 맑스주의적인 정치-경제학적 토대의 중요성을 전제하면서도, 상부구조의 변모양상을 기계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상부구조와 정치-경제학적 토대를 매개하는 것으로서 ‘공간 및 시간 경험’에 대한 분석을 설득력있게 제시한다는 데에 있다. 그러면서 동시에, 정치-경제학적 토대 분석과 상부구조의 변모양상을 주의깊게 서술하는 일도 잊지 않는다! 대단하다. 모범적인 ‘맑스주의적’ 연구자.

물론 이 ‘공간 및 시간 경험’이 과연 ‘매개’가 될 수 있느냐, 아니면 이는 정치-경제학적 토대의 상층부나, 상부구조의 가장 밑바닥에 지나지 않느냐는 판단은 하비를 읽어나가면서 판단해야할 몫이다. 이 ‘공간 및 시간 경험’은 건축과 통신, 교통 시설의 발달의 문제이다. 이는 일상 생활의 문제이며, 세계인식의 문제이다. 이것이 문학을 비롯한 예술에 반영된다는 것, 일반인의 세계경험에 중대한 변화를 가져온다는 것은 쉽게 납득할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이 법과 같은 다른 상부구조에도 ‘근본적’으로 반영되는 것일까. 이것은 의문시될 수 있다.

결국 문제는 정치-경제학적 토대와 상부구조 관계에 대한 원활하고 설득력있는 설명으로서의 ‘공간 및 시간 경험’이라는 매개항이다. 어쨌든 얼마나 폭넓은 시야와 자료를 토대로 한 연구인가!

1. 현대문화: 모더니티에서 포스트모더니티로 가는 길

1.1 도입

앞서 설명한 것처럼 하비의 특장이자 전공은 ‘도시-건축’이라는 매개로 정치-경제학적 토대와 문화, 예술 등의 상부구조 사이의 관계를 설명해내는 것이다. 이에 이 책의 목표는 ‘포스트모더니즘'이라고 주장되는 문화형태가 ’보다 유연한 자본축적양식의 출현, 그리고 자본주의의 조직에 있어 ‘시 공간 압축’이라는 새로운 국면 사이에 일정한 유형의 필연적 관계가 있다는 것과, 이것이 단지 자본주의의 표면형태의 변화라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다. (‘포스트모던’에 대한 하비의 이러한 주장이 더 설득력을 지니는 이유는, ‘포스트모던’자체의 기원을 보통 건축양식의 변화에서부터 찾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를 위해

‘정치 경제적 배경’에 대한 검토작업(다소 단순화된 방식으로)을 거친 뒤에, 자본주의 역사 지리 발전의 역동성과 문화생산 및 이데올로기적 전환의 복잡한 과정 사이에서 매우 중요한 중간고리(원문은 one singularly important mediating link 하나의 남다르게 중요한 매개하는 연결) 역할을 하는 ‘공간 및 시간 경험’을 보다 자세하게 살피고 있다. (12)

1장에 도입에서는 도시에 대한 포스트모던한 견해를 보이는 J. Raban의 견해를 제시하면서 시작한다. 그에 따르면 도시는 ‘물질적 재화의 대량생산과 대량소비라는 합리화된 자동화시스템 아래 도시가 희생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도시는 ‘기호와 이미지의 생산에 주로 관련’된다고 하며, 도시가 ‘직종과 계급에 따라 촘촘하게 성층화된다는 테제를 거부하고, 그 대신에 사회적 구별의 기호가 주로 「개인의」 소유물이나 겉모습에 의해 부여되는 개인주의와 기업가주의’로 도시적 문화를 묘사했다. 그에 따르면 ‘「도시라는」 백과사전은 형형색색의 조각들이 서로 아무런 관련 없이, 아무런 결정적 합리적 또는 경제적 체계 없이 가득 차 있는 편집광의 스크랙북’이다.

이러한 Raban의 주장에 대해 하비는 이것은 ‘포스트모던한 시점이 닥쳤다는 지적’으로 파악한다. 이를 ‘서론’으로 제시하며 결국 ‘포스트모던한 것에 대한 이해의 출발점에서 유일하게 합의되는 사항이라고는 모던한 것과의 암묵적 관계밖에 없으므로’ ‘우선 모던한 것들의 의미’를 살펴보겠다고 한다.

1.2 모더니티와 모더니즘

이 ‘모더니즘’이라는 것은 하나의 용어지만 두 가지 구조 즉, ‘찰나적 일시적 우연적 측면과 영원불변한 측면’ 사이에서 동요한 역사이다. 우선 ‘모더니티는 그 이전의 모든 역사적 상황과의 가차 없는 단절을 뜻할 뿐만 아니라, 그 내부에서 벌어지는 끝없는 단절행위와 분절화 과정을 그 특성으로 삼는다.’

이 모더니즘은 그 동요라는 측면에서 모순적이다. ‘모더니즘은 미래주의와 허무주의, 혁명적인 것과 보수적인 것, 자연주의와 상징주의, 낭만주의와 고전주의가 특이하게 결합된 것이다.’

그럼 이를 왜 ‘모더니즘’이라는 하나의 용어로 불러야 하는가? ‘모던’에 일어난 일이기 때문에? 이에 대해 오세영 선생님은 ‘모더니즘’은 영미식 모더니즘과 대륙식 아방가르드가 결합한 것이라 하며 각각 고전주의와 낭만주의의 후예라 규정한다. 이러한 분절적 이성은 명쾌해 보인다. 그래도 결국 '모던/근대/근대성'이라는 개념을 포기할 수 없는 이유!

어쨌든 1848년 이후 계몽주의가 도전을 받으며 ‘오직 하나의 재현양식만이 가능하다는 생각’이 무너지기 시작하고 20세기 초에 그 유명한 프루스트, 조이스, 로렌스, 만, 파운드의 미래파 선언 등이 등장한다. 미술에서 마티즈, 피카소, 칸딘스키 등, 음악에서 쇤베르크, 스트라빈스키, 언어학에서 소쉬르,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 테일러 주의와 포드주의 등이 발생한다. 모두 20세기 초 1910년부터 1915년 사이 쯤에!

이는 모든 재현방식과 지식들이 근본적인 전환을 일으킨 것이며, 이는 ‘필연적인 진보에 대한 믿음의 상실로부터 크게 영향’을 받았고 ‘계몽사상의 범주적 확실성에 대한 불안감이 늘어난 데 따른 결과’였다. 이 시기 모더니즘은 ‘민주화 정신과 진보적 보편주의의 편에 서 있었다’. 그리고 이는 ‘복잡하면서도 하나로 통일되어 있는 배후 실재의 참된 본질이 무엇인가를 밝히기 위해 다각적 원근법주의(multiple perspectivism)와 상대주의(relativism)을 인식론으로 삼았다.

그리고 세계대전이 일어났다. (그리고가 맞는가? 이에 대해 하비의 서술은 모호하지만 세계 대전 이후와 20세기 초를 구분하고 있기는 하다.) ‘세계대전의 참상과 이에 대한 정치적 지적 대응들은 보들레르 정식의 이면에 자리잡은 ’모더니즘의 영원성 본질성은 무엇으로 구성되는가‘에 대한 고려를 불러 일으켰다. 인간의 완전무결함에 대한 계몽적 확신이 사라져 버렸으니 모더니티에 적합한 새로운 신화를 찾는 일이 급선무가 되었다.’(51) 그런데 신화화되는 대상은 도대체 누구이고 무엇이란 말인가? 이것이 이 시기 즉 ‘영웅적 모더니즘’ 시대를 특징짓는 핵심적인 문제였다.

전간기 모더니즘 또한 ‘영웅적’이었지만, 점점 이 중 일부는 파시즘으로 빠져들게 되었다. 이러한 파시즘은 계몽사상의 취약함으로부터 연유된 측면이 강하다. 이 heroic이라는 것은 '영웅적'으로 번역되기 쉬운데 뭔가 초월적인 가치를 찾는 정도의 의미라고 한다.

그리고 1945 이후는 ‘보편적’ 또는 ‘본격’ 모더니즘이라 명명된다. 이는 ‘사회내 지배적인 권력중심들’에 ‘편안한 관계’를 지니고 있으며 ‘진보나 인간해방을 위한 발전구상인 계몽 프로젝트가 기업자본가적으로 수정되어 압도적인 정치 경제적 지배력을 얻게 된 사회에서 본격 모더니즘의 예술, 건축, 문학 등은 기성예술이 되었다. 지식 및 생산의 조건이 표준화된 상황에서 ’단선적 진보, 절대적 진리, 그리고 이상적 사회질서에 대한 합리적 계획‘에 대한 신념은 유난히 강했다. 그 결과로 나타난 모더니즘은 ’실증주의적, 기술중심주의적, 합리주의적‘이었으며 동시에 고급 취향을 지닌 계획가, 예술가, 건축가, 비평가, 기타 후견인들의 엘리트 아방가르드 작품에 표현되었다.’ (57) 본격 모더니즘의 실질적 이면에서는 기업관료적 권력과 합리성에 대한 은밀한 예찬이 자리잡고 있었으며, 이는 인류의 모든 열망을 실현시키기에 충분한 신화로서 효율적 기계에 대한 표면적 숭배에 대응하는 것임을 가장하고 있었다. (58) 계몽예술과 고급문화가 지배엘리트층의 배타적 전유물이 되어버려서 그 틀 속에서의 실험적 움직임들(예컨대 원근법주의의 새로운 형태들)은 갈수록 어려워졌다. (..) 기성예술과 고급문화는 기껏해야 기업이나 국가권력 또는 ‘아메리칸 드림’을 자기지시적 신화라는 형태로 기리는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던 듯했다. (60)

이에 대항해서 포스트모더니즘이 도출된다.

기업이나 국가, 기타 제도화된 권력 등 거대한 단일체를 이룬 세력들(관료화된 정당이나 노동조합도 포함됨)이 만들어 놓은 기술적 관료적 합리성은 ‘과학적’이라는 미명 아래 서슴 없이 압제를 휘두르는 특성을 지니고 있었다. 이에 대항하여 대항문화들은 독특한 ‘신좌파’ 정치를 통해 반전체주의적 입장이나 반전통, 일상생활 비판을 포용함으로써 개별적인 자아실현 영역을 개척했다. (....) 1968년의 운동은 뒤이은 포스트모더니즘으로의 선회를 알린 문화적 정치적 전초병으로 여겨져야 한다. 그리하여 1968년에서 1972년 사이 언제쯤인가 포스트모더니즘은 1960년대 반모던운동의 껍질을 벗고서 여전히 일관되진 못하나마 전면적인 움직임으로 우리 앞에 등장한다. (60-61)

그렇다면. 20세기 초 포드주의 시기에 나타났던 ‘영웅적 모더니즘’은 무엇이란 말인가? 하비의 서술을 읽다보면, 굳이 왜 이를 모두 ‘moderism'이라 이름 붙여야 되는지 알 수 없다. (내가 오세영-주의자 여서 그러한가?) 똑같은 물적 조건 하에서 다른 식의 모더니즘이 돌출된다. 그렇게 ’모더니즘‘으로 모두 이름붙일 수 있다면 ’포스트-모더니즘‘ 또한 모더니즘이 아닌가? 물적 조건의 급격한 변모 때문에 이것을 ’포스트‘라고 붙여야 하는가? (하비의 주장은 결국 ’포스트-모더니즘‘ 또한 ’모던‘한 것이라는 것? )

1.3 포스트모더니즘

하비의 서술을 읽어가면서 재미가 있어진다. 이번 절은 포스트모더니즘도 명확하게 특성화할 수는 없지만 여러 이론가들에 대한 서술을 바탕으로 ‘포스트모더니즘’과 ‘모더니즘’을 구분하는 정서구조의 근본적인 변화‘란 도대체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는지 논의하고 있다.

포스트모던 소설은 ‘인식론’에서 ‘존재론’으로 변화했다. 모더니스트들은 복합적이면서도 단일한 실체의 의미에 집착했다면, 매우 다른 실체들이 서로 공존하고 충돌하며 상호 관입하는 일이 어떻게 가능한가에 대한 논의를 전면화시키는 쪽으로 변동이 일어났다. 포스트모던 소설의 등장인물들은 어떤 세계에 자신이 자리잡고 있는지, 그 세계에 어떻게 맞서야 할는지에 대해 혼동을 일으키고 한다. (64 참조)

포스트모더니즘은 1.2절에서 살핀 보들레르의 모더니티 개념 가운데 한 쪽 측면, 즉 순간성, 분절성, 불연속, 혼돈을 전면 수용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즘의 이 사실에 대한 대응은 보들레르와 달리, 이 사실에 맞대응해 넘어서고자 애쓰지 않으며, 심지어 그 배후에 깔린 ‘영원불변’한 요소들을 밝혀보고자 하지도 않는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마치 그것이 전부인 듯 ‘분절성과 변화의 무질서한 흐름’ 속에서 헤엄치며 심지어 이에 탐닉한다. (68참조) 결국 ‘현상-본질’이라는 근대적 인식은 폐기된다. 차연들로 가득차서 의미는 끊임없이 미끄러질 뿐이고 현상의 배후를 묻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다만 현상만이!

우리는 더 이상 개인들이 고전적 맑시즘의 주장처럼 소외되어 있다고 볼 수가 없다. 소외되었다는 말에는 소외의 대상이 될 자아에 대한 의식이 분절적이지 않고 일관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미리 상정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개인들이 일정 시간을 두고 프로젝트를 수행하거나 현재나 과거보다 뚜렷하게 나은 미래 건설에 매달리기 위해서는, 이처럼 개인적 정체성에 바탕하는 길뿐이다. 비록 미래 목표의 끊임없는 좌절이 편집증을 불러일으키곤 했을지라도 모더니즘은 보다 나은 미래의 추구에 아주 많은 부분을 바쳤다.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즘은 정신분열 상황에 치중함으로써 그 가능성을 대부분 내던지고 만다. 이때, 창의적 전략의 생산은 말할 것도 없고, 전혀 새로운 급진적 형태의 미래를 조리 있게 그려보지도 못하게 만드는 분절화나 불안정성(언어의 불안정성도 포함)에 의해 정신분열 상황이 만들어진다. (....) 포스트모던 미학에서 ‘주체의 소외가 주체의 분절화로 대체되었다’고 평가할 근거는 넉넉하다. (80-81)

과거를 배경으로, 미래를 생각하며, 현재와 마주하는 것으로서의 견고한 ‘자아’는 폐기되었다. 과거, 현재, 미래라는 의미도 전혀 변해버렸다. 그래서 어쩔 것인가? 순간의 욕망을 따르고, ‘쥬이상스’를 추구하면 되는가. 미시적 권력관계 분석을 통해, 이제 앞으로는 미시적 장들에서의 저항만이 가능한가. 이제 ‘순간’만이 존재하는가.

패션, 팝아트, 텔레비전 및 기타 매체 이미지 형태들의 동원, 그리고 다양한 도시 생활양식들은 자본주의하에서 일상생활의 요체가 되었다. 그 개념을 어떤 식으로 다루든지, 포스트모더니즘을 어떤 자율적인 예술 흐름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포스트모더니즘이 일상생활 속으로 내린 뿌리는 자신의 가장 분명한 액면 그대로의 모습이다. (93)

때문에 이제 하비는 다음 절에서 ‘오늘날 포스트모더니즘이 도시 디자인에서 어떻게 가시화되고 있는지를 살펴 그 상세한 그림을 덧붙’임으로 포스트모더니즘을 더 가시화하여 보여준다. 결국 하비의 특장이란, 앞에서도 서술했지만 ‘건축, 도시’와 같이 일상생활이 이루어지는 공간에 대한 분석을 매개로, 상부구조와 토대 사이의 관련성을 (이번 경우에는 ‘포스트모던적’) 설명해 내는 데에 있다.

1.4 도시의 포스트모더니즘: 건축과 도시 디자인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그 공간관에 있어 모더니스트들과 크게 다르다. 모더니스트들은 공간을 사회목표에 따라 형성되는 어떤 것으로 여겼기에, 이것이 사회적 프로젝트의 실현에 뒤따를 뿐이라고만 생각한다.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공간을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어떤 것으로 보고서, 그 어떠한 전반적 사회목표와도 필연적 연관이 없는 심미적 목적이나 원리들에 따라 공간이 형성된다고 여긴다. 단, 시간을 초월하는 ‘무심의’ 아름다움을 이루는 일은 하나의 즉자적 목표로서 예외일 것이다. (94)

순간성이나 혼돈 같은 느낌들과 한결같이 뒤섞여 있는 허구와 분절화, 꼴라쥬, 절충주의는 아마도 오늘날의 건축 및 도시 디자인 관행을 주도하는 주제들일 터이다. 예술이나 문학, 사회이론, 심리학, 철학과 같은 다른 영역의 실천과 사고들도 이와 상당부분 엇비슷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처럼 지배적인 분위기들이 어떻게 그와 같은 모습을 갖추게 되었을까? 어떻게든 이 질문에 답하려면 우선 자본주의적 모더니티와 포스트모더니티의 평범한 실재들을 낱낱이 살펴야만 한다. 그리고 그런 작업을 통해, 사회생활의 재생산에 있어 이런 허구와 분절화의 기능을 설명해줄 단서로는 어떤 것이 있는지 밝혀내야만 한다. (131)

1.5 근대화

모더니즘은 근대화라는 특수한 과정에 의해 만들어진 모더니티의 조건들에 대한 미학적 대응으로서, 불안정하게 오르락내리락거리는 개념이다. 따라서 포스트모더니즘의 발흥을 적절히 해석하기 위해서는 근대화의 본질을 파악해내야 한다. 그렇게 해야 포스트모더니즘이 변함없는 근대화 과정에 대한 하나의 또다른 대응인지, 아니면 이른바 ‘탈산업’ 사회 또는 심지어 ‘탈자본주의’ 사회의 일종을 지향하여 근대화의 본질 그 자체가 급격히 변동한 것을 반영하거나 혹은 그 징조를 보여주는지를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132)

명확하고 올바른 접근.

맑스는 아마도 ‘타인을 꿰뚫어 볼 수 없음’을 신조로 삼는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을 물신성의 표출형태에만 표면적으로 집착할 뿐, 그 배후의 사회적 의미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다고 비난했을 것임에 틀림없다. (134)

물신성이라는 것. 맑스가 상품을 분석하면서, 상품의 사회적 관계망을 은폐시키고 상품 자체의 성질로 가치를 파악하는 그 ‘전도’를 의미함.

기의보다는 기표가, 그리고 메시지(사회적 노동)보다는 미디어(화폐)에 대한 포스트모던한 관심이 기능보다는 허구를, 사물보다는 기호를, 그리고 윤리보다는 미학을 더 강조하고 있음을 보면, 맑스가 묘사한 화폐의 역할이 변모되었다기보다 더욱 강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135)

결국 포스트모던 사회는 모던 사회의 연속성을 더욱 강화한 것이고, 포스트모던적 현상은 이러한 것에 대한 미학적, 사상적, 이데올로기적, 문화적 (각 용어의 층위가 다르지만) 대응 또는 상응이 아닌가? 그러니까 왜 ‘포스트모던’이라고 해야 하는가. 왜 ‘post'인가. 이 또한 자본주의가 ’새로운‘ 욕구를 창출해야 하기에, 새로운 ’공간‘을 창출해야 하기에, ’학문‘이라는 장에 새로 도출된 흥미로운 새 장난감(개념)에 지나지 않는 것 아닌가?

자기 자신의 세계사 속에서 끊임없이 혁명적인 뒤집기의 동력이 확보되어야만 자기유지가 가능한 사회체계가 바로 자본주의인 것이다. 따라서 만약 ‘모더니티에 있어 유일하게 안정된 것이라곤 불안정성뿐’이라면, 그 불안정성이 어디에서 유래하는지를 밝히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

그런데 맑스는 이러한 모든 혁명적 봉기와 분절화, 그리고 끊임없는 불안정성의 토대를 굳히고 그 틀을 잡는 원리는 오직 하나뿐이라고 주장한다. 그 원리는 그가 말한 최고의 추상 수준인 ‘운동하는 가치’에 있거나, 또는 더 간단히 말해 새로운 이윤추구 방법을 끊임없이 모색하는 자본의 순환에 있다. (141)

결국 이 ‘토대-상부구조’의 은유를 하비는 받아들이고, 이를 설명해내기 위한 매개로서 ‘시간과 공간 체험’을 설정한다. 독자로서, 우리는, 이제 이것이 설득력이 있는지를 주의깊게 살피며 그를 따라가야 한다.

맑스가 그리고 있는 것은 사회 변동의 위기개재적 역학뿐만 아니라, 개인주의, 소외, 분절화, 순간성, 혁신, 창조적 파괴, 투기적 발전, 생산과 소비(필요 및 소요) 방식의 종잡을 수 없는 변천, 시 공간 경험의 변동을 일으키는 자본주의하에서 작용하는 사회과정이다. 만약 이러한 자본주의 근대화 조건으로부터 모더니즘 및 포스트모더니즘 사상가나 문화생산자들이 자신의 미학적 감각이나 원리, 실천 등을 만들어내는 구체적 맥락이 생겨난다면 포스트모더니즘으로의 선회는 사회적 조건의 근본적 변동을 전혀 반영하지 못한 것이라고 결론내릴 수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발흥은 “그러한 사회적 상황에 대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또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사고 방식을 벗어 던졌음(그런 것이 만약 있다면)을 뜻하거나, 아니면 최근 자본주의의 작동방식 변화를 반영하는 것이다. 어느 경우에든 맑스의 자본주의 설명은 (만약 옳다면) 그러한 조건들로부터 동력을 공급받은 근대화와 모더니티, 그리고 미학적 운동들 사이의 일반적 관계를 고찰하는 데 매우 탄탄한 기초를 제공해준다. (147)

하비를 읽으면서 감탄하는 부분은, 결국 이러한 문제의식의 ‘거대함’(또는 ‘정통성’)과 이를 해결하기 위해 분투하면서 끌어들여오는 자료들의 전방위성일 터이다. 이러한 하비의 기본 인식틀 자체가 ‘포스트모던’스럽지 않다.

1.6 포스트모더니즘인가 포스트모더니즘인가?

포스트모더니즘이 특히 성공적이었던 것은 그것이 ‘주관성, 성, 인종과 계급, 시간적(감수성의 판도) 공간적인 지리적 입지와 탈입지의 차이로부터 출현한 다양한 형태의 타자성을 인정하였기 때문이다. (148)

결국 폭력적 동일화로서의 계몽에 대한 거부. 이는 2차 세계대전 이후 모더니즘의 발전(?)된 또는 전개된 형식이 아닌가.

포스트모더니즘 또한 사회 속에서 벌어지는 사회 경제 정치적 행위들의 반영 혹은 모방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즘은 그러한 행위들의 다양한 측면들을 반영 모방한 것이기에 아주 다양한 모습들로 나타난다. 많은 포스트모던 소설들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세계들(이 세계들 사이에서는 그 공존의 틈 속에 비의사소통적 ‘타자성’들이 가득차 있다)의 중첩은 영국과 미국의 도심 불량주거지에서 늘어나는 게토화, 무력화, 빈곤층과 소수민족들의 고립과 섬뜩한 관계를 맺고 있다. 포스트모던 소설을 런던, 시카고, 뉴욕 또는 로스앤젤레스에서, 분절화된 사회적 경관과 하위문화들과 의사소통의 지역적 양식에 대한 은유적 단면으로 읽어내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사회지표들을 보면 대부분 1970년 이후 실질적 게토화가 크게 늘어나고 있으므로, 포스트모던 소설들은 그러한 현상에 대한 반영 모방이라고 생각함이 옳을 것이다. (148-149)

이 부분은 쫌 나이브하게 말하고 있다. 문학이라는 텍스트 구조의 상대적 자율성. 이를 부정하기 얼마나 어려운가?

그리고 조금 후에 가서 하비는 이러한 자신의 언술을 뒤집는다.

포스트모더니즘이 정치 경제 사회생활에 대한 심미적 개입이라기보다는 단지 모방일 뿐이라고 전제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 모방과 미학적 개입을 결합시킨 폭넓은 측면을 살펴보아야 포스트모더니즘의 폭넓은 영역을 이해할 수 있다. (150)

포스트모더니즘은 스스로를 훨씬 더 단순하게 생각한다. 대부분의 경우, 예상되는 모더니즘의 병폐들을 극복하기 위한 집요하고도 혼돈스러운 운동이라고 스스로 진단한다. 그러나 이러한 평가를 보며 나는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모더니즘에 대해서도 대충 묘사한 채 EJ들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150)

모더니즘의 역사 전반과 포스트모더니즘이라 불리는 운동 사이에는 차이점보다 연속성이 훨씬 더 많다는 것이 나의 결론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 속에 일어난 특정 종류의 위기 가운데 하나라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즉 보들레르 정식 가운데 분절적이고 순간적이고 혼돈된 측면(맑스는 이것이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라는 총체의 일부임을 훌륭하게 분석하고 있다)을 강조하고 영원불변한 것을 사유하고 재현하거나 표현하는 방법에 관한 모든 특정한 처방에 대해 깊은 회의를 보이는 것이 곧 포스트모더니즘이다. (152)

그리고 포스트모더니즘을 비판하는 대목! 152 후반부터

가장 나쁜 것은 포스트모던 사상이 타자들의 목소리의 신빙성을 인정함으로써 진보적 전망을 열어 보이면서도, 곧바로 그 타자들의 목소리가 더욱 보편적인 권력의 원천으로 옮겨가는 것을 봉쇄한다는 사실이다. 타자들의 목소리들을 난해한 타자성 속에, 즉 이러저러한 언어게임들의 특수성 속에 가두어버린다. 그리하여 포스트모던 사상은 불균형적 권력관계의 세계에서 타자의 목소리들의 권한을 박탈한다. (...) 포스트모더니즘의 수사는 정치 경제의 실재와 범지구적 권력의 상황에 맞서기를 회피하고 있기에 위험스럽다. (...) 가장 단호한 포스트모더니스트들조차 결국에는 보편적 입장을 갖게 되고 말거나, 또는 데리다처럼 완전히 정치적 침묵으로 빠져들게 됨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메타이론이 없을 수는 없다.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손쉽게 매장해 버린 메타이론이 이제 지하에서 하나의 ‘무의식적 영향력’(제임슨)으로서 계속 기능하고 있다. (153)

만약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둘 다 분절화나 순간성, 혼돈스러운 흐름의 구체적 현상들과 맞서 투쟁을 벌임으로써 자신들의 미학을 얻어낸 것이라면, 다음과 같은 문제들이 매우 중요해진다. 왜 그러한 구체적 현상들이 경험 속에서 그처럼 오랜 기간동안 그렇게 널리 팽배해 있어야 했는가? 왜 그러한 경험의 강도가 1970년 이후 그처럼 크게 솟구쳐 올랐는가? 모더니티에 대한 확실히 말할 수 있는 단 하나가 불확실성이라면, 그러한 조건을 만들어낸 사회적 동력에 대해 많은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이제부터 살펴보게 될 것이 바로 이 사회적 동력이다. (II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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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Homocurious > Sliding doors DVD 구해요.

가지고 계신 님...연락 바랍니다. 댓글도 좋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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