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주의의 뿌리
이사야 벌린 지음, 석기용 옮김 / 필로소픽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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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벌린의 명저 "낭만주의의 뿌리(The Roots of Romanticism)"의 1장과 2장을 읽으면서 석기용 선생의 번역과 (지금은 절판된) 강유원-나현영 선생의 번역(Link)을 몇몇 문장만 비교해 놓는다. 원문은 프린스턴 대학 출판부에서 Henry Hardy의 편집으로 나온 1999년 본에서 인용하였다. 다시 강조하건대 아래 네 가지 사례는 책의 일부인 1장과 2장에서 뽑은 것들이며, 이 책은 6장까지 있다. 



(1)


This is a proposition which is common both to Christians and to scholastics, to the Englightment and to the positivist tradition of the 20th century. It is, in fact, the backbone of the main Western tradition, and it is this that romanticism cracked. (원문)


이것은 기독교인들에게건 학자들에게건 두 부류 모두에게 공통된 명제이며, 계몽주의건 20세기의 실증주의 전통이건 마찬가지이다. 이 명제는 사실상 주류 서구 전통의 척추이며 낭만주의는 바로 여기에 균열을 일으킨 것이다. (석기용 역 69쪽)


이것이 기독교도와 스콜라 철학자들, 계몽주의와 20세기의 실증주의 전통에 모두 공통되는 명제다. 실로 그것은 주요 서구 전통의 뼈대이며, 낭만주의가 균열시킨 것도 바로 이것이다.(강유원, 나현영 역 42쪽)




-> '학자'가 맞는 번역일까 '스콜라 철학자'가 맞는 번역일까. 독자 입장에서 이를 '학자'로 번역하면 당연히 일반적인 의미에서 학문하는 사람들을 떠올릴 것이고, '스콜라 철학자'로 번역하면 보다 좁은 의미에서 중세의 스콜라 학파를 떠올리게 된다. 따라서 이 둘은 매우 다른 번역어다. 


이에 대해 강유원 선생은 자신의 강독 강의에서 스콜라 철학으로 번역한 것에 대한 설명을 어느정도 하고 있다. 


"기독교와 스콜라 철학은 서로 공통되는 점이 있다. 그런데 계몽주의 하면 우리 머릿 속에서 가장 먼저 떠오르는 핵심적인 내용이 반종교주의다. 그렇다면 어떻게 계몽주의와 스콜라 철학이 공통되는 명제를 가질 수 있단 말인가? 더군다나 20세기 실증주의 전통은 계몽주의에서도 더 많이 나아간 것이다. 여기서는 질문이나 대답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문제를 설정하는 방식과 그 문제에 대답하는 방식은 사조마다 다르게 설정될 수 있는데, 그러한 방식만 제대로 세워져 있다면, 그것이 합리적인 것이든 신앙적인 것이든, 질문과 대답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강유원 선생의 <낭만주의의 뿌리> 강독 강의 필사에서 발췌)


석기용 선생 또한 이를 학자로 번역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나는 짐작할 뿐이다.



(2)


For example, the dominant aestheric theory of the early eighteenth century was that man should hold up a mirror to nature. (원문)



18세기 초의 지배적인 미학 이론은 인간은 자연 앞에 거울을 집어 들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석기용 75쪽)


18세기 초의 지배적인 미학 이론은, 인간은 자연을 비추는 거울이어야 한다는 것 이었다.(강유원, 나현영 48쪽)




-> '인간은 자연 앞에 거울을 집어들어야 한다'....? 


무슨 말일까. 인간이 자연 앞에 거울을 들어 뭘 어떻게 한다는것인지 전혀 감이 오지 않는다. 




(3)


The truth about the Germans in the 17th and 18th century is that they constitute a somewhat backward province. (원문)



17세기와 18세기 독일인에 관해 진실을 말하자면, 그들이 다소 후미진 영토를 형성해 놓은 상태라는 것이다. (석기용 88쪽)


17세기와 18세기의 독일에 대해 사실대로 말하자면, 독일은 어쨌든 뒤떨어진 촌구석이었다. (강유원, 나현영 60쪽)


-> 후미진 영토 vs 뒤떨어진 촌구석.... 후미진 영토...??



(4)


He is an obscure figure, but obscure figures sometimes create great consequences. (Hitler too, after all, was an obscure man during a portion of his life) (원문)



그는 불투명한 인물이지만, 불투명한 인물들이 때로는 위대한 결과들을 창조하기도 한다. (히틀러 역시 결국은 인생의 일정 기간 동안은 불투명한 인간이었다.) (석기용 96쪽)


그는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었으나, 때로는 무명의 인물들이 엄청난 결과를 가져오는 법이다 (히틀러 역시 인생의 어느 시점에서는 무명이었다).”(강유원, 나현영 68쪽)



-> 불투명한 인물? 불투명한 인간...? 


저 문장을 읽다가 '투명인간'을 상상한 내가 이상한건가. 

(+ 이어지는 다음 문장. "요한 게오르그 하만은 매우 불투명한 부모의 아들이었다.")


이외에도 석기용 선생의 번역에서 자연스럽지 않은 문장들이 여럿 더 있었다. 그러나 그 문장들은 그나마 '읽기 좀 어색하고 불편한' 정도에 그치는 번역문이라 판단해, 여기에 옮겨 적지는 않았다. 



위 네 가지 사례들 (그리고 그 밖에 올리지 않은 여러 다른 사례들)을 들어, 나는 석기용 선생의 번역보다 강유원/나현영 선생들의 번역이 더 나은 번역이라고 판단한다. 석기용 역이 원문을 보다 '있는 그대로' 옮겼는지는 모르겠으나, 독자가 이해하기 몹시 곤란한 이러한 문장들이 좋은 번역이 되기는 어렵다. 아무리 원문을 충실히 옮겼더라도 그 의미를 독자가 이해할 수 없다면 그건 좋은 번역이 아니다.



나는 석기용 선생의 번역을 2장까지 읽다가, 더 이상 읽지 않고, 강유원-나현영 역을 헌책으로 구하기로 마음 먹었다.



학술서적 번역의 어려움을 충분히 이해하는 입장에서, 혹여 이러한 비평이 번역자의 수고를 깎아내리고 기를 꺾을까 싶어 이러한 글을 쓰기 상당히 조심스럽다. 또한 이사야 벌린의 <낭만주의의 뿌리>는 절판되었다가 새로운 번역본이 나왔다는 것 만으로도 충분히 의미가 있는 명저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독자로서 문제가 있다고 생각되는 번역에 대한 문제제기를 피해야 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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