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산성 - 개정판
김훈 지음, 문봉선 그림 / 학고재 / 2017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백성의 초가지붕을 벗기고 군병들의 깔개를 빼앗아 주린 말을 먹이고 배불리 먹은 말들이 다시 굶주려 죽고, 굶어 죽은 말을 군병들을 먹이고 깔개를 빼앗긴 군병들은 얼어죽는 순환의 고리가 김류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악순환의 고리다. 싸움을 위한 준비라지만 싸움을 위한 준비가 될 수 없다. 다만 백성과 군병은 살을 에는 추위에 떨 뿐이다. 그럼에도 영의정 김류는 가마니를 거둬들여 말죽을 쑤게 한다. 방한용으로 이 가마니를 나눠줬던 수어사 이시백을 불러들여 중곤 20대를 친다.

 

[싸움의 형식을 유지하면서 그 형식 속에서 버티는 힘을 소진시키고 소진의 과정 속에서 항전의 흔적을 지워가며 그날을 맞아야 할 것인데, 그것이 가능할 것인지를 김류는 씨름했다.]

 

김훈에게 삼전도의 일 자체는 중요하지 않다. 그것은 이미 일어난 일의 마지막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인조와 조정신하들에게도 그것은 예견된 결말이었다. 그럼에도 항복하지 못해 기어이 산속으로 기어들어간 것은 차마 그럴 수 없는 인간성 때문이다. 유교적 관념이라 해도 좋고, 재조지은再造之恩이라 해도 좋다. 유리한 편에 서겠다고만 할 수는 없었던 세계관이 있다. 동시에 그렇게 산성에서 굶주리고 추위에 떨다 죽는 길만을 선택할 수도 없다. 국가는 그렇게 포기할 만큼 값싼 실체는 아니다. 그래서다. 그래서 싸움의 형식 속에서 그 날을 맞아야 하는 것이다. 김훈에게 중요한 것은 결론을 향해 가는 과정, 그 과정에서 인간이 보이는 행태다.

 

비루하다. 싸울 생각이 없다. 결론이 항복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싸워야 한다. 싸우지 않고 항복으로 나아갈 수는 없다. 세계관이 있다.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인간의 삶을 인간답게 하는 그 세계관이 죽음으로 나 있다. 그 죽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삶으로 또 항복으로 나아가기 위한 과정이 필요하다. 가마니를 풀어 말죽을 먹이면서 싸움의 형식을 유지해야 한다. 중요한 건 기십만 명이라는 적병의 수나, 만 명이라는 우리 군졸의 수가 아니다. 응전의 태세로 항복을 향해 한 걸음씩 나아가야 한다. 적에게나 우리에게나, 겉으로나 뼈속 깊은 곳에서나 항복이 필연적인 사건이 될 수 밖에 없는 시점에 이를 때 까지.

 

악순환이 삶을 향해 나아가는 방편이다.

 

명분을 주장하는 한 무리의 인간이 있고, 명분을 주장하지 않아야 한다는 한 무리의 인간도 있다. 그 사이를 위태롭게 걷는 김류와 같은 인간도 있다. 김훈은 그 갇힌 성 안에서는 삶과 죽음, 절망과 희망이 한 덩어리로 엉켜있었고, 치욕과 자존은 다르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말을 한 세계를 그려보임으로써 완성했다.

 

그의 세계 속에서 사람들은 정신으로 살아 숨쉰다. 영화 속 김류는 줏대 없어 보인다. 김훈의 김류는 다른 인물일테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한국이 싫어서 오늘의 젊은 작가 7
장강명 지음 / 민음사 / 2015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한국 이야기, 한국의 이야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페스트 알베르 카뮈 전집 7
알베르 카뮈 지음, 김화영 옮김 / 책세상 / 1998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까뮈 소설 '페스트'의 배경은 지중해 남쪽, 알제리 오랑 시다. 어느날 갑자기 이유없이 창궐한 페스트는 도시의 현실이 된다. 오랑은 외부와 격리된다. 살아서 나갈 수 없는 폐쇄병동이 된다.

 

사람들이 죽어간다. 죄없는 간난 아기도 페스트로 고통받으며 죽어간다. 부모는 고통속에 피눈물을 흘린다. 사람들은 문을 걸어잠그고 사람을 만나지 않음으로써 페스트로부터 자신을, 가족을 격리시키려하지만 소용이 없다. 한 명으로 시작된 죽음은 금방 수십이 되고 수백, 천 단위로 늘어난다. 병원은 사라지고 거리는 시체로 넘쳐난다. 무덤은 없고 시신을 버리는 구덩이만 존재한다. 아무런 논리도 이유도 없이 무수한 사람들이 고통속에 죽어간다. 지옥의 풍경.

 

페스트가 창궐한 이 오랑 시의 지옥도를 통해 까뮈가 보여주고자 한 것은 부조리에 대응하는 인간의 자세다. 근원을 알 수 없는 고통은 인간의 운명이다. 까뮈 문학의 근원이 되는 '부조리'다. 그래서 페스트는 인간의 조건인 이 부조리, 그 운명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고 정면으로 응시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이들을 움직이는 힘은 페스트가 퇴치될거란 믿음이 아니다. 밝은 미래에 대한 희망이 아니다. 끝나지 않을 부조리 앞에서 희망은 무용할 뿐 아니라 독이라는게 까뮈 생각이다. 대신 끊임없이 언덕 위로 돌을 밀어 올리는 시지프스의 몸짓을 강조한다. 그저 놓여진 고통을 정면으로 응시하고자하는 의지, 그리고 이 부조리한 고통을 당당하게 살아내겠다는 저항의지이다. 희망없이 부조리에 맞서라는 것. 그게 까뮈가 강조하는 인간의 자세다.

 

이야기에는 프랑스에서 온 신문기자 한 사람이 등장한다. 이름은 랑베르. 그는 처음엔 이 오랑시의 운명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 생각한다. 여행을 하다 상관없는 고통에 운 나쁘게 엮여버렸다고 생각한다. 끊임없이 도시 밖으로 나갈 방법을 찾아 분주히 움직인다. 하지만 그 방법을 찾아내서 탈출의 날이 다가오자 돌연 그 탈출을 포기하고 만다. "혼자만 행복하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는 이유에서다. 연대의식. 그 속에서 고통을 살아내는 일, 그것은 부조리에 대응하는 인간의 두번째 자세다.

 

메르스 감염사태의 초입에 있는 지금 이 이야기가 떠올랐다. 지나친 비약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 지역에서 휴교령이 연이어 내려지고, sns를 통해서 두려움이 전파되는 상황을 보다보니 고통과 두려움이 겹쳐지는 것을 어쩔 수 없다. 그저 같은 병실, 같은 복도, 같은 병원에 있었다는 이유로 많은 사람이 감염됐고 사망자까지 나왔다. 정부의 초기 대응을 질타하는 목소리도 이어진다. 공포가 휩쓸고 있다고 봐도 좋겠다. 나 역시 이유없이 이 고통의 한 가운데 들어서게 될까봐, 그리고 희생될까봐 두려워하는 사람 가운데 하나다.

 

이 사태가 확산되지 않기를, 효과적으로 차단되어서 피해가 최소화되기를 까뮈와는 달리 '희망'한다.

동시에 지금 우리에게 닥친 이 두려움, 고통 너머에 응시해야할 진실이 있는게 아닌지 생각해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선택의 심리학 - 선택하면 반드시 후회하는 이들의 심리탐구
배리 슈워츠 지음, 형선호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5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The Paradox of Choice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누려온 나의 부자유스러움




Ⅰ.

나는 대부분의 경우 최선의 행동을 하기 위해 이성적으로 노력한다. 손익을 구체적으로 따져서 즉흥적이거나 충동적 결정을 하지 않으려 노력한다. 객관적으로 생각하려고도 노력한다. 주관적인 판단으로 그릇된 행동을 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의 심리 현상은 합리적이거나 객관적이지 못한 때가 많다. 사람은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을 일반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가용성 추단율; availability heuristic) 특정한 사물, 사건, 관념에 대한 평가는 언제나 처한 상황, 상대적 지표(지표; anchor, standard)의 영향을 받는다. 의도적으로 만든 틀(틀만들기; framing)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롭지도 못하다. 작은 손해라 하더라도 주관적으로는 큰 문제로 받아들이는 반면, 이익이나 행운은 그 객관적 크기에 비해 작은 만족밖에 주지 못한다. (전망이론; prospect theory) 부정적인 감정은 이성적 판단을 저해한다. 즐거운 때는 판단력도 증진된다. 간발의 차이로 놓친 것은 더 아깝다.(간발효과; nearness effect) 합격이나 승진, 연봉인상의 효과는 영원하지 못하다.(쾌락적응; hedonic adaptation)

심리학적 견해들은 부인할 수 없는 패턴들을 보여준다. 내 이성적 노력도 그리 효과적인 해결책은 못되는 것 같다.


Ⅱ.

나는 제품 비교를 많이 하며, 구매를 결정하는 데 오래 걸린다. 다른 사람들의 결정 과정과의 비교도 많이 한다. 더 싸게 살 수 없었는지, 다른 대안의 가능성을 걱정한다. 조금만 노력하면 더 싸게 살 수 있는데 비싼 것을 사는 건 비합리적인 태도라 생각한다. 극대화자(maximizer)다. 책에서 극대화자는 삶에 덜 만족하고, 덜 행복하며, 덜 낙천적이고 우울증 경향이 있다고 말한다. 

무엇이 중요한지에 대해 스스로 명확한 답을 찾는 것이 중요하단다. 높은 기준을 설정해놓고 그걸 만족시키길 기다리면 기다리는 동안은 주관적 만족을 느낄 수 없다. 왠만한 사안에 대해서는 만족자(satisficer)가 되는 것이 더 현명한 이유다. 중요한 것은 만족스러운 삶을 사는 것이지 객관적으로 최선의 상태를 추구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손실을 받아들이는 태도가 필요하다.


Ⅲ.

현대인들은 선택의 기회가 많기 때문에 자유롭다고 말한다. 그리고 자유로운 정도는 행복의 정도와 상관관계를 가진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바지를 사려고 할 때 너무 많은 선택의 가능성이 존재하는 것은 사람을 피곤하게 한다. 정도가 지나치면 무력감마저 느낄 수 있다. 무엇이 좋은 것인지 밝혀내기 어렵다.

‘오늘은 밥을 먹기 위해 어느 가게에 가야하나, 여행을 가서는 어디에서 잠을 자야 하나, 어떤 동호회에 들어야 하나, 어떤 자동차보험 회사에 어느 만큼 보험을 들어야 하나, 주식을 사야하나, 인터넷 서핑을 해야하나’ 수많은 선택들은 머리를 아프게 한다. 예전에는 선택할 필요없이 자동적으로 주어지는 것들도 있다. 이들을 선택하느라 친구들을 만날때는 항상 시간이 모자라다.

선택은 시간을 뺏는다. 선택은 역설적으로 과거에는 자연스럽게 주어지던 편안한 환경이 거세되었음을 뜻할 수도 있다. 자유가 오히려 구속이 될 수 있는 이유다. 선택이 항상 행복으로 연결되지는 않을 수도 있는 이유다.

이런 스트레스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 규칙(rule), 예정(presumption), 기준(standard)을 정하는 것이다. 대안이 더 적고 제약이 더 많다면 많은 맞바꿈은 제거될 수 있고 자기의심과 결정의 정당화 시도는 줄어들 수 있는 반면 만족은 커질 수 있고 일단 내린 결정의 재고는 줄어들 수 있다.


Ⅳ.

심리학적으로 인간은 현재 수준에 꾸준히 만족할 수 없다.(쾌락적응; hedonic adaptation) 특히 매일같이 부자와 호화로운 상품들을 보며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더욱 그러하다. 이 때 모든 재화를 모든 사람들이 다 얻을 수는 없다는 사실을 알아차린다면(이러한 재화를 입지재; positioning good이라고 한다) 현대사회에서는 스트레스가 불가피함도 알 수 있다. 입지재를 차지하기 위한 경쟁은 스트레스를 유발하고 낭비적이며 삶을 왜곡한다. 일단 입지재를 긍정적인 것으로 판단내린다면 경쟁은 피할 수 없다. 경쟁을 하지 않는 것은 경쟁에서 진다-입지재를 가질 수 없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선택의 범위는 넓어졌지만, 내가 최선의 선택을 할 수 있을 가능성은 결코 더 높지 않다.



Ⅴ.

선택하는 법을 배우는 것은 어렵다. 잘 선택하는 법을 배우는 것은 더 어렵다. 그리고 무한한 가능성의 세상에서 잘 선택하는 법을 배우는 것은 너무나도 어렵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부의 탄생 (양장)
윌리엄 번스타인 지음, 김현구 옮김 / 시아출판사 / 2005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본문내용>

 

'무엇이 부국과 빈국의 차이를 낳는가'하는 책 서두의 질문을 책을 읽는 내내 유념하면 필자의 생각을 따라가는 데 도움이 된다.

 

번영에는 공장 이상의 것이 필요하다. 소련이 급속한 공업화에도 불구하고 궁극적 부의 달성을 이룰수 없었던 점이나, 오스트레일리아가 공업화 없이 일인당 GDP 기준으로 선진국들과 대등한 수준을 달성할 수 있었던 점은 그것을 증명한다. 또한 20세기 말 최선진국들의 놀라운 탈공업적 부는 번영의 근본적인 원천으로 공업화에 중요성을 부여하는 시각이 틀렷다는 것을 입증해준다.

 

번영을 위해서는 제도의 확립이 필요하다. 우선 기술의 창조자들에게 적절한 인센티브를 제공해야한다. 그 인센티브는 창조물에 대한 소유권의 확립, 재산권의 보호이다. 그리고 혁신가들은 지적은 도구를 가져야한다.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방식, 그리고 사회 종교적인 관용이 이에 해당한다. 그리고 이러한 방식으로 유발된 발명이 더 많은 공중에게 제공되기 위해서는  다량의 금융자본도 필요하게 된다. 충분한 돈이 축적되어있어야한다. 마지막으로 신속한 통신과 수송의 수단이 확보되어 있어야 한다. 이상의 네 조건이 번영을 위해 필요한 필수요소들이다.

 

이제부터는 논의의 확장이다. 번영의 결과와 부의 흐름

 

번영으로부터는 민주주의가 발전한다. 제도의 확립으로 인한 생산성의 향상은 부를 의미한다. 이러한 부는 시민 개개인이 스스로의 권한을 인식하게 한다. 자유로운 자기표현이 일어난다. 이것이 곧 민주주의이다. 경험적인 계량연구에 의하면 번영은 민주주의를 가져오지만 그 역은 성립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스페인의 독재자  프랑코의 경제장관 라우레아노 로페즈 로도는 '연평균 소득이 2,000달러를 상회할 때 민주주의가 도래할 것'이라고 말했다. 프랑코 독재가 무너졌을 때 스페인 평균소득은 2,446달러였다. 때로는 미군 점령기 일본을 예로들며 '현대 사회를 창출하는 데 독재가 훨씬 더 유용하지 않을까'라는 냉소적인 의문이 제기되기도 한다.

 

번영, 부를 통해 인간은 더 행복해졌는가? 이에 대해서는 몇가지 방법으로 말할 수 있다. 단일한 나라 안에서 부는 중요하지만, 행복의 유일한 결정요인은 아니다. 여러 나라를 가로지를 경우 부는 오직 느슨하게만 나라의 행복과 상관관계를 가진다. 지구적 수준에서는 문화적, 역사적 요인이 훨씬 더 중요해진다. 경제성장에 의한 나라 부의 총량적 증대는 그 나라를 더 행복하게 만들지 못한다. 행복의 지각은 부에 관한 이웃과의 상대적 비교를 통해서만 인지된다는 부의 상대적 본성때문이다. 물론 부유해질 때 그 나라가 더 불행해지는 것은 아니다. 빡빡한 시간관리, 스트레스, 직업적 안정성의 하락 등의 현대사회의 문제들은 부의 증대에 의해 상쇄되는 것으로 보인다. 다른 방식으로 요약하자면 부의 증대에 의해 수명증가, 문맹률 감소, 유아사망률 감소 등의 효과가 있는 것으로 보아 절대적인 수치로는 빈곤과의 대결에서 승리하고있다. 그러나 상대적인 의미-행복의 증대의 측면에서는 전투는 그리 우세하지 않다. 최빈국과 부국과의 격차는 벌어지고, 각국 안에서도 빈부격차가 증대되고 있다.

 

부의 불평등은 국가의 유지에 해롭다. 심지어 가장 안정되고 자유주의적이며 자유시장을 옹호한다 할 지라도 불평등 심화의 재앙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산업혁명 후기의 영국의 극빈자 증가나 경제발전기 미국의 노동자 파업등은 대표적인 예다. 이러한 상황이 심각할 경우 자유민주주의의 군대가 평화적 군중을 날선 칼로 공격하는 일이 초래된다. 아르헨티나에서 그랬Š蔓?번영하는 경제를 포퓰리즘의 탈선으로 이끌기도 한다. 이를 해결할 필요성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경제적 부가 만들어낸 민주주의가 그 훌륭한 해결책으로 기능하기도 한다.

 

서방이 저개발국에게 줄 수 있는 것은 이러한 부를 창출할 수 있는 제도적 유산이다.

 

──────────────────────────────────────────

 

저자는 부의 탄생에 관해 쉽고 방대한 저술을 완성했다. 사회, 심리, 역사, 경제, 정치, 문화의 영역을 넘나드는 이 저술은 충분히 논리적으로 서술되었다. 역사적 맥락을 따라 가려고 노력하고 있다. 상식을 넓히는 차원에서나 시야를 확장하려는 목적에서라면 전반적으로 읽어볼만한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에게 부의 증진을 향한 서구 중심의 역사 흐름에 대한 확신은 확고하다. 경제결정론에 가까운 자기 확신은 공산주의의 실패나 공산주의 혹은 사회주의 사상에 대한 가혹한 시선으로 연결되기도 한다. 칠레의 아옌데 정권을 경제를 불구로 만들고 그 결과 피노첸트 독재를 출현시킨 측면에서만 묘사함으로써 다른 구체적 긍정성들을 떠오르지 않게 만들어 버렸다. 물론 그가 전지구적인 신자유주의 흐름이 지금 이대로 지속가능하리라 전망하는 것은 아니지만, 경제 위주의 시각을 가짐으로써 윤리, 정치적인 문제들은 모두 그 상부구조에 해당하는 것으로 만든게 아닌지 하는 의문을 가진다. 하기 좋은 비판인지도 모르겠다.

 

경제 결정론적 시각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행복으로 직결되지 않는다는 결론도 이끌어낸다.그의 세계관에서 이런 결론을 정직하게 응시하기란 쉽지 않을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행복의 상대적 속성과 전 세계차원의 비교를 행한 것은 평가받을 만하다. 물론 이 때는 경제적 성과 자체의 의미, 그리고 발전을 추구하는 이유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이 필요하다. 도대체 더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고 빈부차는 확대시키는게 경제발전이라면 왜 이런 일을 하기 위해 의식적으로 더 노력해야 하는가? (절대적빈곤의 퇴치는 약할지언정 그 이유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그 이후는?...)

 

 

 

처음에는 약간의 거부감을 가졌던게 사실이다. 자본주의를 그 자체로 옹호한다는 인상을 받았다. 자기 확신을 지나치게 확장한다는 느낌도 떨칠 수 없었다. (그의 생각을 따라가면 박정희의 독재도 충분히 정당화된다. 결과적으로 부를 가져왔으므로.) 그러나 읽어갈 수록 정직한 정리의 산물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는 점을 확인했다. 내 독서는 제기할 만한 가치있는 의문을 포함하긴 했지만 일부 오독이었다. 행복이나 불평등의 해소에 관한 장들에서 기존 연구성과를 정리한 실력은 훌륭하다. 여기서부터 새롭게 다른 생각의 나래를 펼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TIP : 경제학적 지식이 있으면 읽기 편하다. 경제발전론에 대한 지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앞 3-4백페이지는 빠르게 읽어내릴 수 있으므로 양이 그리 많다고 볼 수도 없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