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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해 - 개정판, 하버드 초청 한류 강연 & 건국 60주년 기념 60일 연속 강연 CD 수록
박진영 지음 / 김영사on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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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나는 박진영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가 데뷔하던 즈음의 나는 아직 초등학생이었는데 상당히 보수적인 가정과 사회에서 자라던 학생이 그 당시 상당히 도발적인 곡들과 의상, 춤으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던 그를 곱게 보기는 힘들었다. 물론 억눌린 심성을 폭발시켜주는 대리만족감 덕분에 오히려 좋아할 법도 했지만, 그렇게 억압되었다는 느낌도 별로 없었고 설령 있었다 할지라도 대놓고 그의 팬이 될수는 없었다. 일단 내가 지내고 있는 환경이 '오빠부대'의 팬이 되도록 놔두지 않는 집이었고, 둘째로는 그가 너무 못생겼기 때문이다. 그 어린 눈에 사실 그를 판단할 수 있었던 것은 외모뿐이었다. 그의 생각과 가치관을 이해하기엔 내 나이가 적었고 그의 음악성을 이해하기엔 대중음악에 관한 지식이 전무했으며 또 관심도 없었다. 단지 그가 TV에 나왔을 때 처음 느낀 인상은 '프랑켄슈타인이다' 였다. 좀 심했나. 외모로 사람을 판단해서는 안되지만 공인에게 하는 판단은 좀 냉정해도 된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들도 인간이기 때문에 그 냉정함이 과해서는 안되겠지만 말이다. 

그러다가 고3이 되어서 대입을 준비할 때가 되어서야 그에 대한 색안경을 내려놓기 시작했다. 내가 그에 대한 색안경을 쓰게 된 이유도 참 단순했지만, 그걸 벗어놓는 것은 더 단순하고 어이없기까지 했다.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데, '박진영은 수능 100일전날 100일주酒를 마시고 99일간 공부를 해서 연세대에 합격했다'는 소문이다. 출처도 모르고 누구한테 들었는지도 모르고, 그런 인터뷰 내용이라도 담고 있는 신문기사가 있는지도 잘 모르겠다. 단순히, 수능이 얼마 남지 않은 고3 수험생에게 유명인의 영웅담을 들먹여 '그러니까 우리도 할 수 있다'는 마음을 심게 만들려는 루머였을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그 소문은 내게 확실히 효과가 있었다. 그 소문 덕분에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대학을 가게 되었다는 효과면 참 좋을텐데 안타깝게도 그건 아니고, '박진영=프랑켄슈타인' 이라는 내 머릿속의 공식을 '박진영=머리좋은 인간'으로 전환시키는 효과였다. 역시 후광효과란 것은 무시할 수 없다. 박진영 자신도 그걸 잘 알고 있었던 것 같다. '머리도 좋은데 노래도 잘하고 춤도 잘 추는 사람이라는, 다른 누구로도 대체할 수 없는 자신'으로 살기 위해 가수데뷔를 했던 걸 보면 말이다. 일종의 변형된 블루오션 전략이다. 

그러나 그 후광효과로도 부족한 것이 있었으니, 나는 박진영이라는 가수를 좋아할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너무 싫어하거나 혐오해서 일부러 좋아하기를 기피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냥 좋지도 않고 싫지도 않은 무관심인데 지금와서 가만히 살펴보니 내가 박진영을 별로 좋아하지 못했던 이유를 알겠다. 나는 그와 음악적 코드가 별로 맞지 않았던 것이다. 박진영의 전 곡은 물론이고, GOD, 비, 박지윤, 원더걸스 등의 노래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을 보면 더욱 알 수 있다. 일부러 연예인 누군가를 좋아해보려고 한적은 없지만 앞으로도 그럴것이기 때문에 역시 음악인 박진영에게는 별로 메리트를 느끼지 못할 것 같다. 그래서 무슨 상관인가. 내가 그를 좋아하건 말건 사실 나도 아무 상관없고(나는 나와 코드가 맞는 다른 가수를 좋아하면 되고), 그도 나 말고 자신의 음악을 이해해주는 팬들이 그렇게나 많은데 말이다.

음악인으로서의 박진영에게는 그렇게나 무관심한데, 치열한 20대를 살아온 인생선배로서의 박진영에게는 상당한 호감이 가는것을 막지 못했다. 내가 별로 줏대가 없어서 그런걸까. 인생에 확고한 기준과 줏대가 있는 사람이 참 좋다. 좀 극단적이고 흔한 예이긴 한데, 살인을 하면서 아무런 죄책감을 느끼지 못했던 두 사형수 중 한 사형수는 죽기 직전에 잘못을 뉘우치고 눈물을 흘리며 죽었고 또 다른 사형수는 죽는 그 순간까지 자신의 행동이 뭐가 나쁜지 모르겠다며 죽었다고 치자. 나는 두번째 사형수를 좀 더 지지하는 입장인데, 끝까지 자신이 한 일에 대하여 소신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높이 산다. 물론 사형받을 만큼 나쁜일을 해서는 안되겠지만, 자신을 되돌아 보았을때 스스로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다면 법적으로 처벌을 받더라도 일단 하고 스스로에게도 후회하지 않을 수 있는 신념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내가 하고자 하는 일과 국가가 법으로 정한 규칙들이 서로 어긋나지 않는 것이 이상적이지만 말이다(생각해보니 이게 이상적인 것이 아니라 지극히 정상이 되어야 하는 일인데 왜 주객전도가 되었는지 모르겠다). 아무튼 박진영이라는 사람을 저 두 사형수중 한 사형수로 비유해 보라고 하면 그가 후자에 더 가까운, 자신의 말과 생각과 행동에 신념이 있기 때문에 좋아한다. 여기서, 그 소신 또는 신념의 옳고 그름을 따지려는 것은 아니니 자잘한 것은 별로 신경쓰고 싶지 않다. 그저 20대의 박진영이 생각하는 것과 문제의식, 그리고 한 문제를 제기하고 계속 생각해서 나름의 해결방안 또는 결론을 내리는 그 사유 과정이 마음에 들 뿐이다. 또 모르겠다. 10년 후에 생각관이 많이 바뀐 후에는 이런 사고방식들을 더 좋아하게 될지, 아니면 매우 유치하다고 생각하게 될지. 그러나 지금은 일단 마음에 들고, 또 저자 자신이, 10년 전에 쓴 글에 대해 분명 달라진 생각관, 혹은 유치함으로 화끈거릴 부분이 있을텐데도 불구하고 '그래도' 지금의 자신을 만든 씨앗이기 때문에 소중히 여기며 수정없이 그대로 증보판을 찍어준 (소신있는) 자세가 또 한 번 내 마음에 든다. 

책 내용을 적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다행스럽게도 내용을 별로 적을 것이 없는 책이다. 그러나 읽어보면 반드시 이 생각을 내 인생에도 적용시켜보고 싶다는 게 몇 구절 있다. 이 지구상에서 자신을 축으로 삼아 세상을 돌리고 있는 사람, 혹은 우주는 내가 존재하기 때문에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사람 중 한 사람이기 때문에 자신이라는 사람에게 가지고 있는 확고한 (교리 수준의) 믿음을 보다 보면 읽는 각자마다 받아들이는 것이 다르겠지만 보편적으로 멋지다는 생각은 하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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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에 대한 숙고 동문선 현대신서 159
장 미셸 베스니에 지음, 곽노경 옮김 / 동문선 / 200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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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세상에 태어나서 목적의식을 갖고 사는 자이건, 그저 현재에만 머무는 삶을 사는 자이건 간에 모두 지혜에 대한 욕심은 있다. 누구든 지혜로운 사람이 되고 싶어하며 설령 그런 사람이 되기 위한 노력을 눈꼽만치 하지 않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지혜로워지고 싶은 갈망은 있을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 지혜롭다는 평가를 듣는 것은 최상의 평판 중 하나이고, 그 사람의 긍지에 한 몫 단단히 할 것이다. 물론, 그런 평가를 받은 사람이 진실로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그런 외부 평판에 의해 긍지가 크게 좌우되지는 않겠지만 말이다. 

나 역시 지혜로워지고 싶고, 현명해지고 싶은 사람이다. 지혜와 현명은 공부량이나 그 지식에 비례하지 않기 때문에 더 어렵다. 지혜로워지려면 공부도 해야하지만 자기 성찰도 많이 해야하고, 성품도 키워야한다. 장 미셀 베스니에가 쓴 '지혜에 대한 숙고'는 내게 지혜로운 사람이 되기 위한 길이라도 제시해주지 않을까 싶었다. 글쎄, 저자가 내게 그런 길을 제시해주었는지는 모르겠다. 그리고 그런 길이 존재하는지도 아직 모르겠다. 그러나, 내 나름의 지혜에 대한 성찰을 할 수 있는 미끼는 던져주었으니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은건 아니다. 그가 나름의 인생을 살면서 지혜에 대해 고찰해 온 것들을 바탕으로 자기의 사유과정을 정립한 것이 바로 이 책이다. 

'지혜는 젊은이들을 별로 사로잡지 못하는 것 같다'라는 첫문장으로 다짜고짜 시작하는 그의 사유는, 첫 부분에서는 도대체 저자가 하고 싶은 말이 뭔지 종잡을 수가 없다. 열정과 도전정신으로 팔팔 끓어 젊음을 발산해야하는 청년들은 지혜를 거부한다며, 지혜라는 것이 마치 세상 다 산 것 같은 노인이나 속세와 연을 끊은 수도자들만 소유할 수 있는 것으로 정의한다. 그런가하면 현자가 되려면 아무일도 하지 말아야 한다거나, 현자는 지혜로워지기를 포기함으로 인해 될 수 있는 존재라고도 하고, 다른 사람들의 일에는 개입하지 말하야 하고 그저 흘러가는대로 살아야하며 닥친 상황을 그냥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이라고도 한다. 대체 여기서 왜 도교의 무위자연적인 개념이 나오는지. 그렇다면 그저 아무것도 안하고 삶을 아무 불평없이 받아들이는 노장사상을 몸소 실천하는 사람들이 현자라는 건데 이렇게까지 편협하게 현자를 정의하고 지혜의 역할을 축소해도 되는건가 싶었지만, 저자의 사유과정이 재미있는 편이기에 어디 끝까지 한 번 따라가보았다. 역시 끝까지 따라가보길 잘했다. 저자의 사상은 결론에 몰려있다. 그가 보여준 지혜의 모델은 그냥 자신이 관심 있었던 모델들이므로 한 번 보여주고 싶었을 뿐이란다. 실제로 자신은 자기가 보여준 모델들보다는 외부로 드러나는 지혜를 선호한다고 한다. 그게 더 건설적이고 그로인해 인류가 더 발전했기 때문이다. 지혜에 대한 태도의 근원에는 두가지의 형이상학적인 접근방식이 있다고 말한다. 첫째는 세상은 완전무결하다는 입장이다. 스토아학파나 불교, 도교 같은 개념이랄까. 그래서 그저 받아들이고 해탈하고 세상에서 한발짝 물러나서 초월적인 입장을 견지하라는 것이 첫번째 접근방식이다. 두번째 접근방식은 세상은 미완성이고 혼돈으로 되어 있다는 건데, 아리스토텔레스적이다. 세상은 미완성이기 때문에 좀 더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 인류의 지혜가 필요하며 그리하여 더 실용적인 생각들을 만들고, 이로인해 세상이 더 발전하여 인류가 건설적인 방향으로 나아간다는 입장이다. 저자는 세네카와는 반대로 분노를 선택한다. 분노는 행동하려는 의지, 가능성의 끝까지 가보려는 용기, 마지막에 저항하며 죽어가는 용기를 일깨운다. 지혜에 대한 두번째 접근방식이 결국 지혜를 부정하는 입장이라면 기꺼이 지혜를 부정하고 지혜가 없는 세상을 선택하는 것이 진정 인간이 살아가는 방식이란다. 결국 저자의 지혜에 대한 숙고의 결과는 지혜에 대한 부정이다. 저자는 한 번도 지혜가 있는 곳에서 있어본 적이 없었고 앞으로도 살아 있는 한 지혜는 자기가 머무르고 있는 곳에는 없을 것이라고 단언한다.

지혜라는 한 주제를 선택하여 열심히 고찰하고 설명한 결과가 지혜에 대한 부정이라니. 약간은 당혹스러워서 웃음이 나올 정도다. 그래도, 저자가 전제적으로 정의하고 들어간 지혜가 그런 초월성을 가지는 덕목이라면 나 역시 지혜에 대한 부정으로 인류를 더 건설적으로 만드는 데 한표 던지겠다. 그게 사실이든 아니든 장 미셀 베스니에의 사유는 나란 사람을 설득시키는 데에 성공했다. 그러나 '베스니에식 지혜'는 그 사유과정을 보여주고 싶었던 그가 일시적으로 내린 정의일 뿐이다. 내가 굳이 저자의 지혜에 대한 정의까지 동조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아직 지혜에 대한 나만의 정의를 내리지 못했고, 그래서 역시 지혜를 높게 평가하며, 아직까지도 막연히 지혜에 대해 동경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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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에 관하여 책세상문고 고전의세계 28
데이비드 흄 지음, 이태하 옮김 / 책세상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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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그렇게 살려고 노력하는 것도 아니지만, 내 나름대로의 중도란 것을 지키며 살기 위해 애를 쓰기는 한다. 타인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너무 가까워져서 업신여기는 마음이 들지는 않을까 걱정하면서도 너무 멀게 느껴져 애초에 친해지지도 못하면 안된다는 생각 사이에서 적절한 거리를 찾기 위해 애를 쓴다. 먹는것, 자는것, 운동하는 것 역시 모두 '적절'하지 못하면 일상생활의 균형을 잡을 수도 없다. 책도 너무 많이 혹은 적게 읽지 않으려고 애를 쓰고, 또 지나치게 한 쪽으로만 치우친 독서를 하는 것을 경계한다. 아직 철학 서적을 많이 읽지는 않았지만 동양 철학과 서양 철학을 적절히 읽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또, 서양 철학 중에서는 대륙철학이라 불리는 프랑스*독일 철학과 영미철학을 적절히 병행하며 읽어야겠다고 느꼈다. 약간 대륙철학에 호감이 가던 이 때, 영미철학을 접해보아야겠다고 결심하고 고른 책이 데이비드 흄의 '기적에 관하여'이다. '기적에 관하여'를 고르게 된 이유는 지극히 단순하다. 첫째, 저자가 영국인이므로 일단 대륙철학은 아닐 거라는 점. 둘째, 두께가 얇다는 점. 그랬기 때문에 책의 구조나 개괄적인 내용을 읽어보지 않고 무조건 손에 집어 들었다. 제목만 봐서는 기적을 옹호하는 입장인지 거부하는 입장인지 알 수 없었다. 왜 그렇게 생각했는지 모르겠지만 당연히 기적을 옹호하는 입장에서 쓰여진 책일거라고 생각했다.(이런 생각은 데이비드 흄이 옛날 사람이고, 종교가 한창 중시되던 중세시대의 사람이기 때문에 기적옹호자중 하나일 것이라고 믿은, 전적인 내 편견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책을 조금만 읽다보면 이 생각이 편견이었음을 곧장 알 수 있다. 데이비드 흄은 이 책에서 기적을 자연법칙에 위반되는 '위반 기적'으로 한정지어 철저하게 비판하고 있다. 

흄이 경험을 중시하고 당시 종교적 신앙을 튼튼하게 지지해주던 기적을 비판하였다고 하여 회의론자라는 평가를 받았다면 이는 시대의 변화에 따라 당연히 재평가 받아야 할 것이다. 종교가 절대적으로 중요시되던 시대의 사람들에게는 자신들의 정신적 삶을 이루는 신앙을 '경험'이라는 무기로 공격해오는 흄이 그리 달갑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그랬기 때문에 흄에게 회의론자라는 오명을 씌웠는데 200년이 지난 요즘에 와서도 흄을 회의론자로 기억하고 있다면 분명 잘못된 것이다. 현대를 살고 있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흄의 기적에 대한 비판이 그다지 심각하다고 생각할 정도도 아니다. 분명 지나치게 경험을 중시하여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배타적이라는 느낌을 준다. 그러나 전적으로 배격하는 것도 아니고,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관습적인 것, 자연적인 것에 대해서는 그도 인정하고 받아들인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종교를 배척한다고는 볼 수 없다. 종교의 신앙을 이루는 기적에 대해서는 분명 비판적이지만, 종교가 오랜 세월에 걸쳐 관습적이고 자연적인, 사람 삶의 한 형태이기 때문에 종교 존재 자체에는 긍정적이다. 그가 비판하고자 한 것은 맹목적이고 자칫하면 광신적인 믿음으로 빠질 수 있는 가능성이다. 그는 사람들에게 깨어있는 생각을 주어, 좀 더 계몽적인 삶을 살고 건전한 종교적 신념을 가질 수 있게 되길 바랐다. 그렇기 때문에 현대에 와서는 그를 창조적 회의론자라고 부르는 모양인데, 여전히 그가 회의론자라는 딱지를 버리지 못한 부분에 대해서는 살짝 삐딱해지지만 그래도 창조적이라는 간판을 하나 얻은 것에 대해서 만큼은 만족한다. 흄이 2세기나 뒤늦게 얻은 이런 간판 때문에 좋고 싫음이 분명하다고 해서 흄을 옹호하는 입장은 결코 아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내내 지나치게 경험적인 것만 중시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터부시 하는 그의 입장에 약간 반감도 들었으며, 흄의 입장에 선 사람이라도 그다지 환영받지 못할 극단적 문체를 구사했기 때문에 마음에 들지 않은 부분도 많았다. (그가 이 책에서 사용한 예나 말투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는 것은 전적인 내 개인적 느낌일 뿐이다.) 기적에 관하여라는 논문 자체는 매우 짧으나, 이 책에는 흄의 입장을 비난하는 토마스 러더퍼드의 글과, 흄을 옹호하는 새뮤얼 빈스의 글이 함께 수록되어 있다. 특히 흄의 글을 논리적으로 조목조목 따져가며 철저하게 비난한 러더퍼드의 글을 유심히 살펴보았는데, 그의 글 역시 크게 만족스럽지 못했다. 그는 절대적 신앙자로서의 논리를 나름대로 펼치고 있는데, 그가 내세운 논리의 전제 자체가 그리 납득할만하다고 할 수 없었다. 러더퍼드의 결론은 결국, 신이라는 더 큰 존재 안에서 발생하는 일을 경험이라는 훨씬 작은 존재로 납득하려 하느냐였다. 비유하자면, 바다에서 일어나는 일을 우물에서 일어나는 일만 봐서 어떻게 알겠느냐는 식이다. 그는 자신의 반박을 통해 흄이 떨어뜨린 기적의 위치를 원래 자리에 돌려놓았을 뿐이라고 말한다. 

흄이 영국의 철학자라고 해서 영미철학의 근본을 이룬다고 말하기에는 조금 애매한 구석이 있다. 그 자신이 일단 프랑스로 철학 유학을 떠났던 사람이고, 그의 영향을 받아 독일 철학자인 칸트의 이론이 더 빛났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영미철학이라 하면 크게 근대에 들어와서는 구조주의, 실증주의로 대표되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하긴, 경험을 중시한 흄이나, 과학적인 접근을 중시하는 실증주의도 어찌보면 같은 맥락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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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들의 뇌
로베르 클라르크 지음, 이세진 옮김 / 해나무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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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20세기에 태어나서 21세기에 살고 있다는 사실에는 항상 감사하고 있는데, 그 이유에는 여러가지가 있다. 일단 민주주의라는 인권이 보장되는 사회에서, (팍스 아메리카나이긴 하지만) 쓸데없는 전쟁으로 피를 보지 않아도 되고, (초강대국 미국이란)세계정부 하에 어느정도 평화가 유지되고 있다는 것-물론 여기엔 반발하는 사람이 많을지 모른다. 반미주의자라던가. 그러나 역사적으로 봤을때, 이렇게 적은 피를 흘리고 평화가 유지되던 때도 별로 없는것이 사실이다- 그러니까 다시 말하자면, 피 안보고 비교적 평화롭게 여성의 인권까지 동등하게 보장해 주려는 나라에서 자유롭게 살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한다. 두 번 째는 역사상 위대했던 천재들이 구축해 놓은 사상과 인프라와 역사 덕에 본 받고 자극받을 만한 것들이 많다는 것에 감사한다. 만약 내가 19세기에 태어났다면 전화나, 전기, 전등의 혜택을 받지 못했을 거고, 17세기에 태어났다면 모짜르트나 쇼팽의 음악을 몰랐을 것이다. 물론 뉴턴의 만유인력의 법칙도 몰랐을 거고,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도 몰랐을 거다. 이런 천재들이 역사상 존재해 주었고 그들의 업적을 남겨주었기 때문에 나같은 평범한 사람들도 몇 세기나마 늦게 그 발자취를 한번 훓어볼 수 있고, 혜택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세 번 째로 감사하는 것은 내가 천재가 아니었다는 점인데, 안 그래도 겸손을 모르고 한 번 띄워주면 붕붕 떠서 내려오지 못하는 오만방자한 성격의 내게 천재적 기질이라도 더해졌으면 분명 세상 무시하고 염세주의에 빠져 일찍 생을 마감했을지 모른다. 

로베르 클라르크의 '천재들의 뇌'는 저자가 나름의 필터로 걸른 천재 5명-모짜르트, 뉴턴, 다윈, 피카소, 아인슈타인-의 업적 위주 전기적 이야기와 저자가 조사하고 분석한 결과들을 적당히 버무려낸 책이다. 저자가 말하는 천재의 기준은 무엇보다 '직관'과 '파고드는 인내력'-일종의 편집증-같다. 천재에는 두가지 종류가 있다. 양적으로 우수한 천재와 질적으로 우수한 천재가 그것인데, 양적으로 우수한 천재라 함은, 다른 사람이 몇년에 걸쳐서 이룩할 것을 단시간에 이룩하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고, 질적인 천재라 함은 다른 사람은 죽었다 깨어나도 이룩하지 못할 업적을 쉽게 이루어내는 사람이다. 양적으로 우수한 천재가 해내는 업적은 시간 절약과 효율성을 가져다 주지만 보통 사람들에게 시간이 주어진다면 언젠가는 이루어내는 종류의 것이다. 그러나 질적으로 다른 천재는 그 사람이 아니면 절대 할 수 없는 것이다. 예를 들어 에디슨의 전구는 그가 아니었더라도 다른 누군가가 언젠가 발명했을 물건이지만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은 그가 아니면 성립되지 않았을 이론이라는 거다. 저자가 고른 천재는 아마 후자인 모양이다. 그리고 후자가 되기 위한 결정적 조건이 바로 직관이다. 

천재들의 뇌를 통해 그 뇌 구조를 조금이라도 엿보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버리는게 낫다. 이 책은 제목과 내용이 매치가 되지 않는 책 중의 하나다. 천재들이 어떻게 뇌를 사용했는지에 대해서는 저자는 시종일관 '결국은 아무도 모른다, 알 수 없다'는 식이라서 다소 실망스럽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얻는 것은 일단 있다. 저자가 고른 다섯 천재들의 짤막한 전기와 일상생활을 어떻게 영위했는지 단면적인 모습을 볼 수 있고, 이디오 사방(정신장애가 있지만 특정부분에서는 놀라운 능력을 소유한 자폐아들)의 모습들과 그 예도 알 수 있다.

천재들은 지극히 자기중심적이며 편집증을 가지고 있다. 자폐아들의 공통된 결점중 하나가 타인과 감정교류를 할 수 없다는 부분인데 천재들도 이런 증상을 어느정도 가지고 있는 듯하다. 모짜르트는 하나뿐인 누이가 죽는 순간에도 옆방에서 연주를 하고 있었고, 엄마가 죽었어도 크게 슬퍼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음악이 전부였기 때문에 타인의 죽음이 감정적으로 슬퍼해야하는 일인지 구분하지 못한 모양이다. 뉴턴은 평생 친구나 애인도 한 명 없이 혼자 살다 죽었다. 아인슈타인도 이혼을 세 번이나 했다. 만약 이들이 천재들이라서, 그래서 자기만의 세계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나르시스트라서 그랬다면 할 말은 없겠지만, 분명 나는 이런 천재들의 모습을 보면서 '내가 천재가 아니라 다행이다'라는 생각을 굳힐 수밖에. 나는 살아있는 인간이고 많은 사람들과 함께 풍부한 감정 교류를 하면서 웃고, 울고, 즐기며 인생을 살아가고 싶은 사람이다. 그러나 그들이 남긴 업적은 분명 감사할 일이고, 주변에 천재 친구 하나쯤 있으면 좋겠다고 느낀다. 뭐 또 하나 알 수 있는 점은 천재들은 확실히 오만방자했고, 불타오르는 살다가 일찍 죽는 사람이 많았다는것 정도다. 

하나 높이 평가할 것은, 이 책을 쓰기 위해 천재들의 업적에 대해 참으로 많이 공부했을 저자의 노고다. 책 하나 쓰기 위해서야 그런 노고쯤은 대수롭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저자라는 입장에서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은 물론 뉴턴과 다윈같은 과학자들의 업적들에 대해 많이 조사하고 공부했으니 박수. 나름대로 모든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정리를 해주기 때문에 이 책만 봐도 그들의 대강적 이론 개요는 얻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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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불평등 기원론 책세상문고 고전의세계 27
장 자크 루소 지음, 주경복 옮김 / 책세상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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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에서 의무교육을 받은 사람이라면 루소라는 이름을 한 번은 들어봤을 거다. 그리고 조금 기억력이 좋은 사람이라면 장 자크 루소라는 풀 네임을 알 것이며 그의 가장 기본적인 가르침도 어렴풋하게 기억날지 모른다. '자연으로 돌아가라'

루소는 저서 '에밀'로 유명하지만 왠지 내게는 '인간 불평등 기원론'이 더 친근해서, 한 번 공략해보리라 마음 먹은지 몇 년만에 드디어 읽어내려갔다. 이 책은 프랑스의 디종 아카데미에서 주최한 공모전 주제 '인간 사이의 불평등 기원은 무엇이며, 불평등은 자연법에 의해 허용되는가?'에 대한 논문이다. 이미 '학예론'으로 명성을 얻은 바 있던 루소는 더 이상 명성에 대한 눈치를 보지 않고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거리낌없이 저술해 발표하는데, 이 작품은 당연히 기존 권위에 대한 반항적인 내용이었고, 수상은 커녕 박해를 받는다. 결국 '인간 불평등 기원론'은 프랑스에서 발간되지 못하고 루소의 조국 스위스에서 출판된다. 

홉스는 '만인에 의한 투쟁상태'니 어쩌니 하며 인간은 자연상태로 놔두면 투쟁만 하니 반드시 국가가 개입해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이런 이론의 바탕에는 인간은 선천적으로 악하다는 성악설이 깔려있다. 그러나 루소는 이를 부인했는데, 그렇다고 해서 굳이 성선설을 지지했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그저 루소는, 인간은 미개인의 상태에서 무엇이 좋은지 나쁜지를 판단할 수 없기 때문에 선하지도 않고 악하지도 않다고 할 뿐이다. 1부에서는 인간 불평등의 기원을 살피기 위해 인간 사회의 기원을 살펴 올라가는데, 그 내용이 너무 길어 읽는 내 입장에서는 '대체 이 미개인의 상태를 뭣 때문에 이리 길게 서술하는거야'라고 투덜거릴수 밖에 없었다. 분명 1부는 지루하다. 1부 뒤에 가서야 살짝 내비치는 인간 불평등은 바로 개별적으로 살던 인간이 사회라는 공동체를 이루면서 시작된다. 여기서 많은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뭔가 추리해낼 수 있다. '아, 사람들이 모여 살기 시작했으니 소유가 시작되어 불평등이 발생했다는 거군' 하고 말이다. 물론 그 말도 맞긴 한데 이보다 더 근원적인 단계가 하나 끼어있다. 그건 바로 '존경'의 감정이라는 거다. 사람들끼리 모여 살면서 상대적으로 비교가 될수밖에 없고, 강자과 약자가 비교되며 매력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이 비교된다. 그리고 물론 이런 개인적 장점들을 많이 가진 사람들은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게 되는데, 인간에게 일어날 수 있는 최초의 불평등을 일으키는 근본감정이 바로 이 '존경'이라는 거다. 그리고 이 존경을 바탕으로, 존경받는 자가 좀 더 많은 것을 소유하게 되는 사회구조가 형성되기 시작하는데 그리하여 인간 불평등이 발생한다는게 루소의 생각이다. 

사실, 이 책 '인간 불평등 기원론'에서는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루소의 대표적 사상이 별로 녹아있지 않다. 그러나 이 정도만 읽어도 루소의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사상이 어떻게 발상되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겠다. 그의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말은 공동체를 이루며 살기 이전의 상태, 즉 미개의 상태, 인간이 소유로 평가되지 않고 그 존재 자체로 평가되며 하루 하루 존재 자체로 행복할 수 있는 상태로 돌아가라는 것이 아마 루소의 생각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 모두도 알고 있고, 루소도 알고 있었겠지만 인간은 퇴보할 수 없는 존재이며 앞으로도 영영 자연으로 돌아갈수는 없을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루소나 홉스나 인간에 대해 씁쓸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는 면에서는 공통적이었을 수 있겠다. 

사회적으로 불평등이 형성된 1단계가 부자와 빈자, 2단계가 강자와 약자, 3단계가 주인과 노예라고 정의해서 말하는데, 물론 여기에 전적으로 동감한다. 왜냐면 현재 21세기에서 이 생각이 딱히 새롭다 할 것도 없고 이미 많은 사람들이 상식처럼 알게 모르게 무의식중에라도 다 아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생각해보자. 루소는 18세기 사람이다. 스위스에서 태어났지만 프랑스로 옮겨가 살았고 이 논문을 썼던 때는 한창 루이 시리즈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 절대왕정시대를 평정하던 시기이다. 천부인권이고 권리장전이고 인권선언이고 뭐고 아무것도 없이 귀족이나 왕족이 아닌 97%의 평민들은 가축과 하등 다를바 없는 삶을 살았고 또 그런 취급을 받았다. 아니, 어쩌면 더 못했을지도 모른다. 가축들은 노예적인 삶을 살기만 할 뿐이지만, 평민은 거기에다가 세금까지 더 내야했으니 말이다. 그러던 상태에서 루소라는 사람이 인간 불평등은 이러하게 기원했는데 기실 모든 사람은 평등하고, 평등한 상태를 재구축하려면 뒤짚어 엎고라도 자연의 상태로 돌아가야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국가라는 것이 사실은 부자들이 자신들의 재산과 특권을 제도적으로 합법화하기 위해 만들었을 뿐이라고 말하고 있으며 그것에 동조한 국민들은 어느정도 따라야하지만 그 불평등이 지나칠 경우에는 따를 필요가 없다고 한다. 그리고 결론에서는 국민의 빈곤한 삶과 대비되는 왕족의 사치스런 삶을 드러내며 이런 불평등은 결국 자연법에 위배된다고 강조하고 있다. 그러니, 이 논문이 어찌 그 시대 기득권자들에게 환영받을 수 있었겠는가? 가히 프랑스 혁명을 일으킨 사상적 토대라고 할만한 책이다. 루소가 만약 좀 더 오래 살았거나, 프랑스에서 태어났더라면 기득권자들에게 '사회이 혼란을 야기하는 반역자'라고 하여 처형당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250여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읽혀도 시대적 차이를 전혀 느끼지 못하는 이 사상에, 아직 인류는 그 오랜시간을 더 살았어도 딱히 발전된 사회구조를 구축하지 못했음에 씁쓸하기도 하다. 그건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을 보면서도 느꼈던 감정이다. 불평등을 합법화함을 초월해 미화시키는 자본주의와 국경을 뛰어넘는 무한 경쟁시대를 사는 우리는 여전히 불평등속에서 국가에 쇠사슬을 채이고 자유를 안정에 팔아버린 삶을 영위하고 있다. 사실 평범한 국민에게 갑자기 절대적 평등과 무한한 자유가 주어진다면 자유와 방종을 구분하지 못한채 혼란한 삶을 영위하겠지만 인류가 진정한 평등과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라면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이라고 생각하면 그 방종의 상태를 못 받아들일 이유도 없다. 마치, 억압되었던 고3이 방탕한 대학생활을 조금 만끽한 후에야 정신차리고 공부를 하는 이치와 약간은 비슷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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