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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수의 탄생
이재익 지음 / 네오픽션 / 2013년 7월
평점 :
절판


끈적하고 야하며 숨가쁘게 시작된 첫 장면.
천하의 나쁜 놈 주제에 '이봐, 친구. 넌 지금까지 잘해왔으니 앞으로도 그럴 거야.'라며 자기암시를 거는 주인공 석호.
학벌, 외모, 사회적 지위나 명성 혹은 명예, 행복한 가정, 이 모든 것을 갖춘 남자가 뒤에서는 불륜이나 잔뜩 저지르고 다니면서 가정에 돌아와서는 아내와 자식을 가장 사랑하는 최고의 남편, 최고의 아버지 흉내를 낸다? 여자라면 치를 떨고 손가락질하며 욕하기 딱좋은 상황이다. 그래서 이 책은 한번 펼치면 좀처럼 책을 덮을 수가 없다. 초반에는 주인공 한석호의 이중성이 언제 밝혀질까, 어떤 벌을 받고 어떤 손가락질을 받을까 하는 생각에. 중반에는 인물간의 숨막히는 접전과 긴장감 넘치는 전개에, 후반에는 욕하면서도 빠져들 수밖에 없는 주인공의 애처로운 발버둥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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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이트트레이닝의 또 다른 원리는 상처와 회복입니다.
자기 힘보다 더 무거운 바벨을 들 때 근육의 근섬유가 찢어지죠.
다친 근섬유는 회복되면서 원래보다 더 커집니다. 그러면서 근육이 더 커지고 강해지는 거죠.
고난을 극복하면서 더 강해지는 우리 인간의 모습과도 닮지 않았나요?' (82쪽)
자신만만, 모든 일에 자신감이 넘치던 한석호 아나운서.
그런데 이거 어쩌나, 인생이 어디 이론처럼, 생각한 것처럼 흘러가나?
고난을 극복하면서 자신이 강해질 거라고만 생각했지 지옥을 다녀올 줄 알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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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면적으로 복수를 진행해 나가는 것으로 드러나는 조태웅은 복수의 주체가 아닌, 하나의 '도구'에 불과한 인물이었다. 조태웅의 이유없는 잔인함과 잔혹함 덕분에(?) 석호에게 연민을 느껴가는 것을 보면서, 어쩜 이렇게 선과 악이 부침개 뒤짚 듯 뒤짚히는 걸까, 하고 생각했다. 그 상대성을 아무렇지 않게 이해해버린 날 보면서도. 아무튼 조태웅이라는 인물이 너무 베일에 쌓인 인물이었고, 마지막까지 크게 알려진 것 없이 끝나서 아쉬움이 남기는 했지만 이재익 작가왈 영화화 될 때를 대비해서 태웅의 존재를 아껴두었다고 하니 기대감을 가지고 영화를 기다릴 수밖에.
태웅이라는 인물이 있기는 했지만 이야기의 후반부가 될 때까지 복수를 진행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정확하게 알 수가 없다. 이 책의 제목이 『복수의 탄생』이지만 복수가 탄생되는 시점의 이야기는 보여주지 않고 복수를 끝마치는 순간, 실제 복수를 시작하고 진행시킨 인물을 짠! 하고 등장시킨다는 점이 재미있다. 몸 속에서 아주 오래 묵은 숨을 토해내 듯 튀어나와버린 복수의 탄생과 그 정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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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왜 인간인 줄 알아?
사람 인, 사이 간. 사람들 사이에서 살기 때문에 인간이야.
그런데 모든 사람들이 다 나를 저버린다면 삶이 무슨 소용이 있겠어?
난 지금 그렇게 되기 일보직전이라고.' (156쪽)
주위 사람들을 잔뜩 기만하고 다닐 땐 언제고, 이제와서 주위 사람 타령이다.
말 그대로 사람들 사이에서 살기 때문에 인간이다. 그러나 내가 그들 모두를 기만했다면, 모두가 나를 저버린다고 해서 딱히 할 말이 있을까.
그래서 복수를 시작한 정체에 수긍할 수밖에 없었고, 주위 모든 사람을 잃을 위기에 처한 주인공이
정말 삶 전체를 잃은 듯한 지옥을 맛보았으리라 공감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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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수의 탄생』에서 '욕망'을 주체하지 못한 인물은 한 명이 아니다. 자신의 채워지지 않는 욕구를 채우기 위해서 끊임없이 다른 여성들과의 섹스를 갈망하고 행하고자 했던, '성적 욕망'을 주체하지 못한 주인공 한석호, 석호의 부인 미선, 잔혹함 속에서 재미를 통해 쾌락을 추구하는 조태웅, 긴 세월 속에서 엇갈린 사랑만을 오롯이 갈망하는 연이 그리고 재우. 누군가에게 욕망이라는 것은 단순히 원하는 것, 끌리는 것, 하고 싶은 것이 아니었다. 목숨과 뒤바꾸어서도 갖고 싶은, 갖지 못하면 삶이 더이상 빛나지 않고 아무 의미를 지니지 못하게 되는 것. 그것이 바로 욕망이었다. 저마다에게 모두 다른 것. 하지만 쉽사리 손에 쥐지 못하는 것.
엄청난 욕망을 손에 쥐고자 할 때에는 감당해야 할 몫이 있는 모양이다. 욕망은 때로 사람의 눈을 멀게 한다. 오로지 단 하나만을 보게 하기 때문에. 주위를 살필 틈을 주지 않는다. 욕망을 어느정도 이루고 눈을 떴을 때, 그제서야 내가 배신하고 상처준 사람들이 보이기 마련이다.
어쩌면 '배신'이라는 말은 '믿음'의 부속물일지 모른다. 믿음이 없으면 배신도 있을 수 없으니까. 결국 욕망은 복수의 원인이 되었고, 믿음에 대한 배신은 복수를 부추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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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거 아실란가 모르것네.
사람한테 제일 깊이 남는 기억이 모욕당한 기억이랍니다.
근데 사람이 제일 쉽게 잊어버리는 게 뭔지 압니까? 남을 모욕한 기억이랍니다.
… 원한 관계라는 게 그럴 때가 많아요.
당시의 가해자 쪽에서는 까맣게 잊고 있는데
모욕을 당했던 쪽에서는 평행 못 잊고 복수를 꿈꾸는 거지." (165쪽)
끝났다 싶은 순간 갑자기 진정한 나락으로 끌고가는 사건이 발생한다.
그리고 그것은 욕망과 믿음, 배신과는 다른 종류의 것 때문이었다.
그러고보면 복수는 참으로 여기저기에서 탄생한다.
종잡을 수 없는 복수의 감정, 끝을 내는 방법이 도대체 뭘까.
감정 컨트롤을 제대로 하든가,
미리 눈치 채고 진정한 고백과 사과를 하든가,
아니면 시작된 복수가 깨끗하게 끝나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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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무서운 복수는 자기 자신을 잃게 만들고 그와 동시에 주위의 모든 사람을 잃게 만드는 것이 아닐까.
나만이 간직하고 싶은 모든 치부가 적나라하게 드러날까봐 전전긍긍한 한석호를 보며,
만약 이와 비슷한 상황이 내게 닥친다면 나는 나의 치부를 들키지 않고 조용히 묻는 것과
한때 배신감을 선사할지언정 모든 것을 밝혀 내 주위사람을 지켜내는 일 중에 어느쪽을 선택하게 될까 생각했다.
막상 상황이 닥친다면, 어느쪽도 쉽지 않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