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김연수 지음 / 자음과모음 / 2012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나의 사랑 김연수 작가님. 이번 책은 제목과 표지의 카피 문구만으로도 나를 한없이 설레게 만들었다.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너를 생각하는 건 나의 일이었다.' 라는.

그렇게나 당연한 일, 사람이 숨을 쉬는 것과 진배없는, 너무나 당연해서 의식조차 하지 못하는 일이 누구에게 있어서는 사랑하는 이를 생각하는 일이었다.

나는 누군가를 그렇게, 마치 바다가 파도를 일으키고, 내가 숨을 쉬고, 매초 눈을 깜빡이는 것처럼, 생각해 본 일이 있었을까?

 

 

_p. 228 ;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너를 생각하는 건 나의 일이었다. 너와 헤어진 뒤로 나는 단 하루도 너를 잊은 적이 없었다. …

네게 말하고 싶지만 말할 수 있는 입술이 내게는 없네. 네 눈을 빤히 쳐다보고 싶지만, 너를 바라볼 눈동자가 내게는 없네.

너를 안고 싶으나, 두 팔이 없네. 두 팔이 없으니 포옹도 없고, 입술이 없으니 키스도 없고, 눈동자가 없으니 빛도 없네.

포옹도, 키스도, 빛도 없으니, 슬퍼라, 여긴 사랑이 없는 곳이네.

 

 

 

애초에 튼튼한 뿌리를 가진 나는, 내가 어디에 깊게 뿌리를 내리고 있는 지 알고 있는 나는 내 존재에 대한 불안도, 불신도 없다. 엄마 뱃속에 있을 때 찍힌 사진부터, 태어나자마자 찍힌 나의 발자국과 그 진료기록에 남은 엄마의 싸인, 아가때 입던 배냇저고리까지 모두 내가 가지고 있으니, 내가 아기였을 적 기억은 물론 없겠지만 설령 유아기 전부의 기억이 없다 하더라도, 나는 딱히 불안해 할 일도, 흔들릴 일도 없다. 그저 과거에 집착하지 않고 앞날만을 상상하고 설계하고 그릴 뿐이다.

 

그래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근본을 알지 못하기에 자신의 존재 자체에도 정착하지 못하며 표류하는 불안정적인 삶을 사는 이들에 대하여. 잠시 머물렀다 기척없이 사라지는 손님처럼,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하고 매 순간 시간의 흐름에 그저 몸을 맡긴 채 둥둥 떠다니는 사람들에 대하여. 그들이 뿌리를 찾아가는 이유는 자신의 존재의 이유를 확인받고 싶기 때문일 수도 있다는 것을.

 

 

_p. 201~202 ; 모든 것은 두 번 진행된다. 처음에는 서로 고립된 점의 우연으로, 그다음에는 그 우연들을 연결한 선의 이야기로. 우리는 점의 인생을 살고 난 뒤에 그걸 선의 인생으로 회상한다. 정상적인 사람들은 과거의 점들이 모두 드러나 있기 때문에 현재의 삶에 어떤 영향도 끼치지 못한다. … 하지만 너 같은 경우는 완전히 다르다. 과거의 점들이 모두 발견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네 인생은 몇 번이고 달라지리라. 인생의 행로가 달라진다는 말이 아니라 너라는 존재 자체가 달라진다는 뜻이다.

 

 

 

뿌리를 찾기 위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아무래도 '엄마'를 찾는 일이다. '나'의 존재를 가능케 한 사람은 물론 어머니와 아버지 두 사람이지만, 직접 '나'를 잉태하고 약 10여 개월간 품어 세상 밖에 내어놓는 것은 어머니이기 때문에 아버지보다는 어머니를 더 찾는 게 아닐까 싶다. 10개월간 나를 책임지던 사람이 갑자기 나를 책임지지 못하게 되었을 때 왜 그럴 수 밖에 없었는지, 그 이유를 아는 것이 비로소 '나'의 존재를 이해하게 되는 길 일지도.

 

책 속에서 카밀라는 '어머니'에 대해 새로운 정의를 내린다. 아마 이러한 이유로, 아주 밉고 원망스러운 엄마라도 꼭 한 번은 찾아보게 되는 게 아닐까?

 

 

_p. 88-90 ; '어머니'의 새로운 사전적 정의

1. 제일 먼저 나를 사랑한 여자

2. 날마다 한 번은 떠올리는 여자

3. 어떤 사람들에게는 평화와 비슷한 말 (책 속에서 카밀라는 '평화'란 자신에게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것, 무의미한 단어라고 했다.)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을 읽는 시기와 비슷하게, 『황금 물고기』도 함께 읽었다. 자세한 내용을 알지 못하고 읽은 두 권의 책은, 신기하게도 비슷한 맥락에 놓여 있었다. 르 클레지오의 『황금 물고기』는 '라일라'라는 한 소녀가 긴 방황을 통해 자신의 뿌리가 심어져 있던 곳을 찾아 인생의 항해를 하는 내용이다. 아주 어린나이에 유괴되어 그 순간의 끔찍함은 고이 간직한 채 자신의 근본에 대해 어떤 것도 기억해내지 못하는 라일라. 어디에 있든, 누구를 만나든, 무슨 일을 하든 그녀의 불안은 해소되지 않고, 그래서 난 그녀의 이야기를 읽으면서도 내내 가슴 한켠이 허전했다. 그 어떤 경험도 그녀를 충만하게 행복에 차도록 만들어주지 못하는지, 그녀의 어조는 내내 담담했으니까.

 

 

 

_p. 160 ; 그런 와중에도 나는 몹시 걱정스러워하는 기색이 담긴 시몬의 얼굴과 암소처럼 커다란 그녀의 눈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때 문득 나는 왜 그녀가 우리 둘이 서로 닮았으며 둘 다 자신의 육체를 가지지 못한 존재라고 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것은 우리가 뭔가 진정으로 원한 적이 없고 항상 타인이 우리의 운명을 결정했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존재를 온전히 이해하고 갖지 않는 이상, 무언가를 진정으로 원하고, 내 운명을 스스로의 의지로 이끌어가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닌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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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수 작가님, 소설가와 시인의 영혼은 다르다고 하셔놓고는, 이 책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에는 시가 엄청 나온다. 작품 속 고등학생 정지은이 쓴 시라지만, 결국은 김연수 작가님의 시... 아닌가? 모르겠다. 아무튼 난 좋았는데.

 

 

위에서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이 작품을 읽으며 '서로의 심연에 가닿기 위한 날개'라는 말이 자꾸 머리를 맴돌았다. 그 누구도 상대방의 심연에 가닿을 수는 없는 걸까. 하긴,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속담도 있지 않은가. 그렇지만 정말, 상대방의 심연에 가 닿으려면 그 날개라는 거, 어떻게 해야 얻을 수 있는걸까?

바람이 전해준 이야기들. 귀로 듣고는 입밖으로 꺼내지 않은 말들을 모으면, 김연수 작가가 쓰지 않은 이야기를 내가 마저 읽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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