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통각하
배명훈 지음, 이강훈 그림 / 북하우스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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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통각하』

- “이 책은 맨 뒷부분 ‘작가의 말’이 모든 것을 망쳐놓았다.”

 

 

바이센테니얼 챈슬러

새벽의 습격

* 고양이와 소와 용의 나라로부터

* 발자국

* 혁명이 끝났다고?

위대한 수습

냉방노조 진압작전

* 초록연필

내년

Char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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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F소설은 참으로 오랜만이다. 베르나르의 SF소설은 정말 재미있게 읽고는 했는데, 이젠 그마저도 까마득하다. 실은 굳이 SF 장르소설을 읽지 않아도, 상상력이 기발한 여러 작가들의 소설작품들을 읽으며 단편으로 SF나 다름없게 느껴지는 작품들을 접하다 보니 점점 더 SF를 찾아 읽지 않게 되었다고나 할까.

 

 자극적인 책 제목, 시퍼런 색의 책 표지 색깔, 70년대 이전의 것으로 느껴지는 표지의 글씨체. 그 때문에 우선은 책을 집어 들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게다가 “지난 5년간 참 많이도 참았다! 그간 끊임없이 영감을 준 ‘나의 뮤즈’, 각하를 위한 연작소설” 이라는 표지의 자극적인 글은 내 안의 모든 궁금증 세포들을 발동시켰다. 거기에 박찬욱 영화감독이 배명훈 작가를 극찬한다는 사실까지 책 소개글을 통해 알게 되니 이 책을 꼭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이 신선했음은 틀림없다. 난 특히 <고양이와 소와 용의 나라로부터>, <발자국>, <혁명이 끝났다고?>, <초록연필>의 네 작품이 참 좋았다. 골라놓고 보니 책에서 이 작품들이 가장 현실감 있는 작품들인 것 같다.

 

 

 10가지의 단편 작품들은 각기 다른 내용이지만 실은 아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그 기반에는 ‘총통이 독재하는 시대’라는 정치 상황이 깔려 있다. 자, 여기서 알 수 있다. 각각의 작품들은 하나의 작은 구역을 담당하고, 이것들이 모여 합치면 하나의 커다란 세계를 이루게 되는데, 이야기가 거기까지 도달하고 나면 이제 ‘공상과학 장르’라는 것은 이 책에 있어서 전혀 중요하지 않다.

 

 이 모든 단편 안에는 ‘위’와 ‘아래’가 명확히 존재한다. 힘이 있는 자와 힘을 가지지 못한 자, 세력을 가진 자와 그렇지 못한 자, 높은 자리에 있는 자와 그렇지 못한 자, 지배 하는 사람과 지배당하는 사람. 이런 식으로 상하구별이 뚜렷하게 나타나며 도통 중간이라고는 보이질 않는다. 지극히 흑과 백이며, 모와 도다.

 

 

 

 <바이센테니얼 챈슬러><새벽의 습격>에서는 도저히 피할 수도, 벗어날 수도 없는 강압적인 힘에 못 이겨 인물들이 사상이나 이념, 자유 등을 포기하거나 체념해버리며, 스스로의 의지를 잃어버리는 등 아주 답답하고 무기력한 모습들이 그려진다. <발자국>이나 <내년>에서는 절대 보이지도 않고, 찾을 수도 없는 세력에 맞서 저항하려 하나 결국에는 닿지도 못하고 실패로 돌아가는 좌절이 짙게 묻어있으며, 실은 그 악의 세력은 당연하게도 맨 위에서 군림하고 있음을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알게 만든다.

 

 

 

 <초록연필>은 위의 세 가지 이야기에 비하면 훨씬 낙관적 이야기이기는 하다. 장인이 만든 명품 초록연필을 통해 권력구조와, 더 높은 권력을 향한 자본의 이동과 흐름을 확인해 볼 수 있다는 내용이 흥미진진하게 전개되었다. 연필이나 펜 등의 이동경로를 추적하고 보니, 계속 위를 향해 흘러간다는 내용은 신기하고 재밌기도 했지만, 굉장히 수긍이 가는 내용이기도 했다. 내가 쓰던 연필이나 펜을 들고 상사에게 결재를 받으러 가고, 그 펜이 상사의 상사에게 넘어가는 일은 직장인들이라면 한 번씩은 경험해본 내용이 아닐까?

 

 진실을 파고 들어가보니 초록연필을 만든 장인이 실은 예언가였고, 악을 처단하기 위해 죽기 전 명품 연필을 만들었다는 이야기. 결과적으로 악을 처단하고 죽기는 하나 그 악이 처단 되었다는 것을 아는 것은 우리 독자들뿐이다. 오히려 악 대신 그 예언가가 많은 이들을 희생시킨 악인이 되었다. 연필을 통해 악을 처단했다는 것은 즉 악이 아주 높은 정치권력을 지닌 자(사람이 아닐 수도 있겠지만)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 장인, 예언가는 정말 악을 처단할 자격이 있던걸까? 아직 구체적으로 아무것도 실현되지 않은 악을 막기위해 무고한 수많은 시민이 목숨을 잃었다. 이렇게 모든 이야기들은 점차 진행되어가며 마음속에 근본적인 악의 결정에 대해 갈팡질팡함만을 새겨 놓는다.

 

 

 

 이 차갑기 그지없는 작품들 속에서 어떤 강력한 ‘힘’을 지닌 사회나 집단이 아닌, 그 사회 내에 있는 인간 개개인을 살펴볼 수 있었던 작품들은 바로 <고양이와 소와 용의 나라로부터><혁명이 끝났다고?>이다.

 

 먼저 <혁명이 끝났다고?>는 아주 유머러스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참 씁쓸하고, 또 한편으로는 공감가기 그지없는 내용을 담고 있다. 한때 엄청난 민주화 투사였고, 사회주의자였던 멋진 첫사랑 여 선배를 10년도 더 지나 만나고 나서, 변한 그 모습에 엄청난 실망을 하게되고, 자신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고 해서 결국엔 아주 유치하게 구는 한 남자의 이야기. 이래서 첫사랑은 첫사랑으로만 남아야 하는건가 싶기도 하고. 멋대로 상상하고 기대해놓고는 그에 미치지 못했다고 해서 화와 심술을 주체하지 못하는 사람이 상대방을 비난할 자격이 있나 싶기도 하고. 시간이란 참 무서운 놈이어서 사람을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저 먼 곳으로 데려가기도 한다는 것이 날 그저 한없이 무섭게 만들기도 하고. 혁명이란 모두에게 동시에 시작해서 동시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개개인 모두에게 달리 시작해 달리 끝난다는 점에서 참으로 상대적인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고양이와 소와 용의 나라로부터>는 수호신인 고양이가 대접받는 나라, 헌법상 분명히 용이 지배하는 나라, 소를 숭배하는 나라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즉, 우리나라를 비롯한 세계 대부분의 나라가 민주주의, 국민이 주인인 나라를 정치의 근간으로 삼는다면, 저 세 나라들은 인간대신 고양이가, 소가, 용이 그런 비슷한 대우를 받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이해하기가 쉽다. 그렇다고 해서 인간의 지위가 더 낮고 동물들이 신으로서 존엄하게 숭배되느냐, 라고 묻는다면 그건 아니다. 숭배의 개념보다는 ‘존중’, ‘공존’의 개념이 훨씬 잘 어울린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말하면 이런거다. 고양이, 소, 용을 숭배하는 나라에서는 그들의 품위를 지켜주기를 원한다. 그러니 민주주의인 우리나라에서는 당연히 나라의 주인인 국민들(사람들)의 품위를 지켜주어야 한다는 내용이다.

 

 

_p. 81 - 시위대를 둘러싸고 쭉 늘어서 있는 경찰 병력이 바라보고 있는 방향 말이야. 광장에 모인 사람들을 향해 있더라고. 그래서 그 생각이 났지. 그 여자의 나라에서 용을 둘러싼 경찰이 어디를 바라보고 있었는지가. 어디였겠어? 당연히 용 반대쪽이었지. 그때 깨달은 거야. 지키려고 마음먹은 건 등 뒤에 두는 거구나. 시선이 향하는 쪽에는 위험해 보이는 걸 두는 거구나.

그거야, 그거. 그게 다야. 그러니까 이건 그냥 고양이랑 소 이야기라니까. 고양이와 소의 품위에 관한 이야기지. 고양이나 소나 용이 품위를 지킬 수 있다면 그 자리에 사람이 놓였을 때도 똑같아야 하지 않겠어?

 

 

 이건 아무래도 우리나라의 시위 진압현장을 비꼬는 글일 것이다. 이 글을 읽으며 쭉, 그리고 마지막 부분에서 위의 인용문이 나오던 순간 즈음에는 정말 머리가 띵- 했다. 그동안 쭉 우리나라의 주인은 바로 국민인 '나'라는 것을 도덕, 사회, 정치, 법 등의 과목을 학창시절 내내 배워 알고 자라온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라의 주인은 누구였더라?' 하며 망각하고 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러나, 위의 동물들의 경우와 사람들의 경우는 다르다. 아마 그 점이 작가가 그리 중요치 않게 생각했던 점일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위의 고양이와 소와 용은 자신을 지켜주려는 경찰들을 위협하거나 그들에게 폭력을 행사함이 없이 그저 평온하게 지낸 다는 점. 소가 숭배되는 나라에서도 소가 가게에 들어와 물건을 훔쳐먹으면 매를 맞는 다는 점 등이 고려되지 않았다. 고양이나 소나 용이 애초에 시위를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사람들의 시위를 진압하는 과정과 비교된다는 것은 바로 이 글의 잘못된 전제이다.

 

 

 물론 사람들은 모두들 주인으로서의 자신들의 당연한 권리를 주장하고 보호받기 위하여 시위에 참여하며, 그것은 자신을 온전히 지키기위한 바람직한 방식이다. 허나 불법으로 시위를 집회하며, 먼저 폭력적인 방식을 염두에 오고 시위에 참여하는 이들이 존재하기에 문제가 생기곤 하는 것은 아닐까. 가끔 뉴스에 나오는 의경이나 전경들을 볼 때면 불쌍하게 느껴질 때가 한 두번이 아니다. 아무것도 안하고 서 있자니 자신들이 다치고, 그렇다고 강력한 방어나 미미한 대응이라도 할 시에는 욕을 한 바가지로 얻어먹으니 말이다. 그렇다고 얌전히 말로만 한다고 아무도 귀기울여주지 않는 시위를 하자니 자신이 처한 상황 그 어느것도 달라지지 않음에 애타하는 이들을 볼 때에도 안타까울 뿐이다. 도대체, 어디에서부터 무엇이 잘못된걸까? 그리고 우리 모두는 이 문제를 단순히 한 국가에, 한 단체에, 한 사람에게 책임을 지우게 할 수 있는 것일까? 아, 역시나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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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을 얼마나 잘 읽었는지 모른다. 마지막 <작가의 말>을 읽기 전까지는.

 실은 책의 겉표지만 보아도 이책을 누구를 향해 던지는지는 다들 알고 독서를 시작하는 것이다. 책이 올해 출간되었는데 지난 5년간 쉴 새 없이 영감을 선사한 총통각하라 하면 곧 임기 마감을 앞두신 이명박 대통령님 밖에 더 있나?

 

 

 그 점을 숙지하고 읽었다고 해도 좋았다는 것이다. 내 나름의 많은 생각과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갖가지 해석을 더하며 책을 다채로운 방식으로 읽을 수 있었으니까 좋았다. 그것이 소설의 매력이고, 또한 SF의 매력이다. 그러나 작가는 <작가의 말>에서, 너무나 직설적으로 언급했다.

 

 

"그러니 이 모든 것이 다 그분의 등장으로부터 시작된 일이다. 이 책의 첫 단편 「바이센테니얼 챈슬러」를 쓰기 시작한 날이 5년 전 선거 바로 다음날인 2007년 12월 20일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더더욱 그렇다. 그 뒤로 나는 내가 '총통 시리즈'라고 부르게 될 몇 편의 단편을 더 쓰게 되었는데, 그 글들을 모으고 몇 편을 새로 더 써서 다행히 그분의 임기 안에 책으로 엮어낼 수 있었다."

 

 

 임기가 도중도, 끝나고 나서도 아니고, 임기가 시작된 시점부터라. 이렇게 단정적이고 극단적인 시선을 지닌 채 무작정 미운면만 찾아내려 안간힘을 쓰며 글을 쓰기 시작했다니 실은 조금 많이 실망이었다. 해서, 이 작가의 글은 내가 여러갈래로 펼쳐놓은 길을 모두 싹둑싹둑 잘라버리고 한 길씩만 남겨두었다. 독자에게서, 독자로서의 재미를 앗아갔다고 본다. 적어도 내게 있어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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