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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의 언덕 (양장)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86
에밀리 브론테 지음, 김정아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12월
평점 :
품절
사랑때문에, 앞으로 얼마나 더 미칠지 모르겠다.
'격정적 사랑' 이라는 말이 정말이지 잘 어울리는 작품이다.
모든 사랑이 시작되고, 일이 발생하고, 비극적 사건을 낳기도 하는 장소인 '폭풍의 언덕(저택 이름)'의 이름처럼, 매 사랑이 어찌 이렇게 폭풍같이 휘몰아치는지 이야기를 듣는 사람조차 같이 휩쓸려가 버린다. (하녀 넬리에게 이야기를 전해 듣는 세입자 록우드씨도, 그리고 독자인 나도)
거부할 수 없었던 운명적(소울메이트적) 사랑 앞에서, 인간이 얼마나 끝없이 잔인해지고 악(惡)해질 수 있는지. 한편 성격, 성품, 교양적 수준 등에 상관없이 사랑에 빠진 인간이 얼마나 진지하고 진솔하게 자신의 사랑을 내장 깊숙한 곳에서부터 끌어올려 표현해낼 수 있는지를 잘 드러낸 작품이다.
(실은 표지 그림을 얼핏 보고는, 휘몰아치는 바람을 표현한 것인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여자의 얼굴과 머리카락이었다. )
캐서린 언쇼에게 있어 히스클리프는 순수한 사랑, 같은 영혼으로 빚어진(같은 영혼을 나눠갖은) '소울메이트'이다.
반면 캐서린 언쇼에게 있어 에드거 린턴은 '현실적 사랑'이다. 이것 저것 다 재고 따지다보니 멋있어보이고, 그렇게 눈에 콩깍지가 씌어 하게되는 사랑. 이 경우 유효기간이 존재하고, 그 기간이(그 기간이 얼마만큼 길고 짧을지는 모르나) 지나면 사랑은 시들고, 부패하고는 한다. (혹은 애초부터 계산적인, '사랑'자체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 관계가 되어버린다던가.)
"내가 히스클리프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 애가 알아서는 안돼.
넬리, 내가 그 애를 사랑하는 건 잘생겼기 때문이 아니야. 그 애가 나보다 더 나 자신이기 때문이야.
그 애의(히스클리프) 영혼과 내 영혼이 뭘로 만들어졌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같은 걸로 만들어져 있어.
린턴의 영혼이 우리의 영혼과 다른 것은 달빛이 번개와 다르고, 서리가 불꽃과 다른 것과 마찬가지인걸."
- 본문 190쪽 -
"그 애가 정말로 나를 잊는다면, 린턴도 허깨비, 힌들리도 허깨비, 내가 꿈꾼 모든 것이 허깨비야.
그 애가 정말로 나를 잊는다면, 내 앞날은 죽음과 지옥이라는 두 마디로 끝나. 그 애 없는 삶은 지옥이야.
...
그렇게 하찮은 인간이 혼신의 노력을 다해서 여든 해를 사랑한다 해도, 내가 하루 사랑하는 것만 못하거든.
그리고 캐서린의 가슴속은 나의 가슴속만큼 깊은데, 그자가 그 애의 사랑을 모두 차지하겠다는 건
여물통이 바다를 담겠다는 것과 다름없지."
- 본문 235쪽-
이 작품은 사랑이 단순히 아름답고 낭만적인 것을 넘어서서, 얼마만큼의 파괴력을 지녔는지를 강렬하게 보여주는 작품이다. 인간이 사랑 때문에 얼마만큼 나약해지는지, 때로 얼마만큼 악해지고, 얼마만큼 미치게 되는지 말이다. 반면 사랑으로 인해 얼마만큼 강해질 수 있고, 사랑하는 이의 내면에 어떻게 하면 빛을 되찾아 주어 밝게 밝혀 줄 수 있는지 하는 파급력을 보여주기도 한다.
나는 이 작가의 격정적 사랑의 전개에 책에서 손을 떼는 일이 무척이나 힘들었다. 한 순간도 잔잔하거나 조용할 일이 없고, 애잔함보다는 공포와 긴장을 불러일으키는 작품. 사랑이 뭐길래 인간이 그렇게나 잔혹하고 잔인해질 수 있는지 바라보게 되고, 매번 분노에 찬 인물들의 격앙된 어투에서 졸인 마음 때문에 마른 입술을 적시게 된다.
작품속 등장인물들과 함께 원망도 해보고, 비난도 해보고, 혀도 끌끌 찼다. 헌데 악마같은 사람한테서 그만 심히 공감가는 '사랑'을 찾고말아 혼란도 느꼈다.
(작품속 배경인 폭풍의 언덕이나 티티새의 농원. 가을이 지나 겨울이 되었을때의 그곳의 풍경 묘사는 무척이나 메마르고 황량한듯 분위기를 음울함과 함께 느끼게 해주었지만, 봄이나 여름의 풍경은 아마 위의 나무와 같이 아주 오래되고, 길게 뻗은 나무가 이곳저곳 듬직하게 서있을 것만 같다. 녹음이 짙을 때의 언덕과 농원의 풍경은 평온함을 느끼게 해주었으므로. 이건 그냥 여담. 완전히 개인적인 상상.)
에밀리 브론테는 다양한 인격과 성품을 지닌 각 인물들의 내면을 저마다의 어조로 잘 표현해낼 줄 아는 작가인 것 같다. 누군가는 무척이나 교양없고, 또 누군가는 무식하고 상스럽고, 누구는 아주 악독하고 표독스럽게, 누구는 점잖고 교양이 철철 흘러넘치도록 말이다.
영국 요크셔에서 목사의 딸로 태어나, 황량한 자연 속에서 사람들과의 교제를 꺼리고 살았던 작가가 어떻게 이렇게 다양하고 구체적으로 인물들을 조명해냈는 지 신기하다. 그녀의 작가적 상상력이 가히 놀라울 따름이다.
얼마전, 김연수 작가님께서 본인이 연재를 하시는 문학동네 카페 게시판에서, 댓글 이벤트(?)를 하셨었다. 작가님께 아무거나 질문을 하는 것이었는데, 난 '작가님도 혹시 시를 쓰시나요? 소설가와 시인은 어느정도 두께의 종이 한 장 차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라는 질문을 했었다. 무슨 질문이 이래? 할수도 있겠지만, 나로서는 정말이지 궁금했고, 특히 소설가나 시인분께 직접 대답을 듣고싶었다.
작가님께서는 이런 대답을 해주셨다.
'저는 시는 쓰지 않습니다. 소설가와 시인의 차이는 종이 한 장의 정도가 아니라 다른 노트를 가진 사람들이라고 생각해요. 시와 소설은 서로 다른 영혼에다가 쓰는 겁니다.'
실은 요 며칠 작가님의 이 대답이 머리를 떠나지 않고 있었다. 내 생각과는 조금 달라 기대했던 답변은 아니었고, 그렇지만 그럴법하다는 생각에 동요하고 있던 탓이다.
그러나 에밀리 브론테의 책을 읽고나니, '때로는 그 두 노트를 모두 가진 영혼의 부자가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에밀리 브론테는 사랑을 하는 이들의 감출 수 없는 진솔한 감정을 꾸밈없이 아름다운 시어로 표현했고, 그 각부분을 따로 떼어놓고 보아도 '시'로서 손색이 없다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지금 현대와 200년 이상의 시간적 배경의 차이가 있지만, 그런 것은 전혀 문제될 것이 없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사람의 본연의 감성은 똑같고, 사랑의 본질도 이와 다르지 않다. 에밀리 브론테는 이런 본능적이고도 운명적이어서 거부할 수 없는 사랑을, 전혀 미화하거나 포장해내지 않고, 격정적이면서도 강렬하며 매우 아름다운 시어로 풀어냈다. 그녀에게 시라든가, 소설이라든가 하는 글의 형식이 상상의 세계를 이야기로 재조명 해내는데 있어서 무슨 제약이 되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