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업에, 자신의 미래에 대한 준비에, 직장에서의 고된 일에 지쳐, 불타는 금요일이면 친구들을 만나 얼굴을 보고 대화를 나눈다. 하루는 삼겹살에 소주를, 하루는 치킨에 맥주를, 하루는 곱창에, 하루는 막창과 닭발에. 이렇게 나를 절로 행복해지게 만드는 맛나는 음식과 더불어 술잔을 기울인다. 순간적일지라도 마이너스(-)에서 플러스(+)로 변하는 기분을 만끽하고 싶은 걸지도 모른다.
우리는 지금 성장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멈춰있다는 생각을 떨쳐낼 수가 없을 때가 많다. 이렇게 멈춰있는 것에 혼자 아파하고 우울해하고 힘들어 하는 것이 너무나 벅차서, 술잔을 기울이며 서로에게라도 털어놓는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모두 암묵적으로 동의한다. 실은 이는 모두 자신 스스로가 짋어지고 가야 하는 일들이라는 것을.
내 이런 속을 읽기라도 한 것일까? 나는 정진홍 작가의 이 책이 너무나도 끌렸다. "마지막 한 걸음은 혼자서 가야 한다"라는 제목부터, '정지통'이라는 생소한 용어까지. 들끓는 청춘에 멈춰있는 것만 같아 자책하는 내 맘을 들킨 것만 같아 뜨끔했고, 한편으로는 '나만 이러는 게 아니겠구나' 싶어 안도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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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울로 코엘료의 『순례자』이후, 산티아고 순례길은 중세 유럽의 역사에 그치지 않고, 다시 조명을 받고 많은 사람들이 찾아가 걷게 된 길이다. 물론 천 년 정도의 시간동안 꾸준히 순례자들이 있어왔지만, 이제는 전세계 곳곳에서 아주 다양한 사람들이 끊임없이 찾아가는 길이 된 것이다. 본래는 카톨릭 순례길이지만, 이제는 단순히 종교에 국한되지 않는 길이 된 듯 하다. 유네스코에도 지정된 800킬로미터에 달하는 산티아고 순례길. 요즘에는 우리나라 사람들도 매우 많이 가고, 그 때문에 산티아고 순례길과 관련한 책들이 심심치않게 나오고 있다는 것은 서점에 가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은 단순 여행기가 아니다. (물론 다른 산티아고 순례길에 관한 책들에도 모두 각자의 여행길에서 얻은 귀중한 깨달음이 많다. 그 질을 비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책의 목적에 중점을 두고 싶은 것 뿐이다.) 순례길을 걸으며 한 사람의 인생 철학이 정리되어 이 책 속에 담겼다고 볼 수 있겠다. 그렇기 때문에 책 속에 사진이 그리 많지도 않다. 예쁘고 멋진 여행길을 소개하고자 한 책이 아니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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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표지는 내 마음을 실은 조금 서늘하게 만들었다. 약간은 어두운 때, 구름이 하늘을 가득 덮고있는데 사진 속 길에는 순례자 동상들만 보일 뿐 사람의 존재는 느껴지지 않는다. 황량하고 쓸쓸하지만 책의 제목과 참 잘어울리는 사진이다. 그리고 저 어둠은 알고보면 동틀 무렵, 동트기 직전의 배경이라는 것. 그러니 조금 고독하고 쓸쓸해도, 어느정도는 혼자 힘으로 조금 더 감내해보자.)
_p. 110 내버려둔다는 것은 본래 그것의 성질과 기운대로 움직일 수 있도록, 내 안의 힘이 원기 회복을 하도록 기다리고 배려하는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내버려둔다는 것은 무관심한 것이 아니라 본래의 생겨먹은 그대로의 기운과 성질을 회복해 자기다움을 되찾도록 만드는 보다 근원적인 자기 사랑의 한 방법이다. … 불안에서 벗어나 있을 때 비로소 내버려두기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내버려둔다는 것이 행복할 수 있고 또 스스로를 사랑하는 것이 될 수 있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렛 잇 비’는 불안에 지지 않고 불안에 포박당하지 않을 때 비로소 가능하기 때문이다. _
우리는 '나 좀 내버려 둬.'라는 말을 남에게 몇 번이나 해오고 살았을까. 실은 그 말은 싹수 노란 자식이 부모를 향해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요(그 싹수 노란 자식이 아무래도 나겠지만은), 마음 상태가 복잡할 때 귀찮게 구는 친구에게나, 작정을 하고 나를 괴롭히는 사람들에게 겉으로, 혹은 마음속으로 몰래 그 말을 내뱉고는 한다. 그런데 남한테는 수없이 외쳐온 그 말, 나한테는 과연 몇 번이나 해왔을까? 남이 나를 괴롭히거나 귀찮게 굴 때는 좀 내버려두라고 하면서, 정작 내가 내 자신을 괴롭히고 있지는 않은 지 생각해보게 된다.
이렇게 반성을 해본다. 기억을 더듬는다. 조금 더 가본다. 과거로 가본다.
어렸을적의 나와, 지금의 내 모습을 비교한다면 나는 얼마나 많이 달라져 있을까? 우선 그 때만큼 순수하지 못하다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것이고, 곰곰이 생각해보니 '사고의 복잡함'이 있었다. 아마 이는 내가 너무나 많은 것을 알게 되었고, 손에 쥐게 되었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나는 어린 시절에 비해 갖고있는 것, 누리고 있는 것이 훨씬 많다. 그런데 그 때에 비해 나는 부족함을 훤씬 많이 호소한다. 욕심은 더욱 많아졌고, 그에 비례해 부족함을 느끼는 마음도 더 커진 것 같다. 그나마 요즘은 철없던 중고등학생 때나 갓 대학생이 되었을 무렵에 비해 부족함을 대놓고 호소하는 경우가 드물긴 하나, 마음속으로는 여전히 부족해하고, 허전해한다. 그러다보니 발걸음은 무거워지고, 걸음은 느려지다 못해 자주 멈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작가는 이를 인생배낭에 비유해 내 마음을 확 휘어잡는다. 아무래도 나도 곧 여행을 갈 예정이라 그런지, 이 비유가 참으로 현실적이게 느껴진다.
_p. 23, [인생 무게만큼만 짊어지고 가라] 中 ;
털어야 할 대목에서 털지 못하면 우리네 인생배낭은 온갖 잡동사니로 가득 차버린다. … 인생배낭의 잡동사니들은 대개 미련이거나 회한이거나 쓸데없는 미움과 증오이거나 정말 쓸모없는 시기이거나 후회다. 우리 인생길이 힘겨운 진짜 이유는 그런 잡동사니를 버리지 않고 인생배낭에 꾸역꾸역 구겨 넣은 채 가기 때문이다. 그러니 미련, 후회, 회한, 미움, 증오, 시기 등의 찌꺼기 같은 잡동사니를 버리고 소망, 꿈, 도전, 화해, 사랑, 모험을 담아 자기의 인생배낭을 다시 꾸려야 하지 않겠나. _
어렸을적의 나와 지금 나의 모습 비교 또 하나. 나는 지금도 종종 길을 잃는다. (물리적 길은 잘 찾는다. 적어도 흙으로 된 땅 위에서 나는 길치가 아니다.)
지도를 펴놓고 아무리 길을 확인하고 또 확인해도, 조금 가보고 나면 어라? 이거 내 길이 아니다. 아무래도 내가 가고 있는 길은 숨겨진 구석구석, 골목길을 지나야 하는 모양인걸까. 남이 그려놓은 지도만 보고 따라 가려고 하니, 좀처럼 내가 상상한 풍경은 나오지를 않는다. 그저 막막하다. 몇 번을 더 길을 잘못들고, 얼마나 더 걸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막연하다 못해 두렵기까지 한게 어디 한두 번일까?
_p. 84, [내 안의 나침반을 믿고 나아가라] 中 ;
대개의 인생길 위에는 화살표도 없고 그것을 표시해주는 지도도 없다. 오직 내 안의 자기만의 방향감각만을 가지고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는 것뿐이다. 바로 그 자기만의 방향감각이 곧 내 안의 나침반인 셈이다.… 세상의 온갖 잡동사니를 내 안으로 끌어들여 교란을 일으키는 내 안의 나쁜 자석들을 미련 없이 버려야 한다. 그래야 내 마음의 나침반도 제대로 돌아가고 내 안의 방향감각도 오롯하게 살아난다. 삶의 기로에서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를 때는 먼저 나쁜 자석들을 치우라. 그리고 침잠해서 내 마음의 나침반이 가리키는 방향을 보라. 거기 나아가야 할 방향이 또렷하게 나올 테니깐. _
그런가보다. 남들은 당연히 내가 아니고, 내가 꿈꾸는 길을 가는 이들이 아니다. 남들이 그려놓은 지도는 내게 여행길의 지팡이처럼 어느정도의 도움만을 줄 것이다. 직접 걷는 것은 나의 몫이었다. 고독은 나쁜 것이 아니다. 고독이 있어야만 사람이 비로소 사람다우며, 고독은 인간이 독립된 존재로서 일어서는 계기가 되어줄 것이다. 각자에게 저마다의 길은 다르므로, 남에게 의지만하며 살아 갈 수 없는 노릇. 자신의 길은 그리고 마지막 한 걸음은 혼자서 짊어지고 가야하는 것이다.
주변의 시선과 세상의 잣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에 있는 그 무언가를 끝까지 믿고 자신만의 길을 걸으라고 다독여주며 일깨워주는 이 책이 참 좋다. 지금 내가 겪는 고독이 절대 불행한 것이 아님을 확인시켜주었고, 내가 가지지 못한 많은 것들이 실은 내가 가볍게 삶을 여행하기 위한 필수적 요소였다는 사실에 위안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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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내가 이 책을 읽게 된 동기중 하나인 '정지통'이라는 단어. 이 단어는 실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님을 책을 다 읽고 난 후에야 깨닫게 되었다. 나는 누가 뭐래도 아직도 성장통을 앓는 중이다. 아무래도 이렇게 예상을 빗나가게 되는 순간 순간이 바로 책읽기의 묘미가 아닐까 생각하며...
* 정진홍 작가님께
- 이 책에서 아버지를 느낍니다. ‘마지막 한 걸음은 혼자서 가야한다’는 제목과 ,성장통이 아닌 ‘정지통’이라는 말에 끌려 책을 읽었습니다. 물론 산티아고 순례길을 통해 단순 여행기가 아닌 자신만의 인생철학을 발견하려 했던 작가님의 모습도 좋았습니다. 그렇지만 어느 순간 저희 아버지 연배의 중년 남성의 향기가 물씬 풍기더랍니다. 작가님께서 느낀 그 수많은 감정이 실은 우리 아버지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니 마음이 찡했습니다. 아버지를 조금 더 이해하고 사랑하게 된 것 같습니다. 나 자신을 위해 읽었던 책이 어느 순간 내 아버지, 우리 가족을 위한 책이 되었습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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