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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 속의 검은 잎 문학과지성 시인선 80
기형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8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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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 머물다 간 풍경

                               - 기형도論



  시인은 기억하기 위해 시를 쓴다. 그 기억은 당연히 시인의 감각과 사고의 기록이겠지만 (시인의 현재를 ‘시’라는 텍스트 자체로만 한정을 시킨다면) 그 기억은 현재의 시인에게 ‘시’라는 하나의 대상물 속에서 재조직되고 구체화된다. 예술과 예술가의 관계를 규정한 여러 가지 상반되는 이론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예술작품이 온당한 가치를 지니고 또 그것이 움직이는 논리를 알기 위해서는 작품의 내적인 논의가 가장 우선 시 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하나의 예술작품과 하나의 예술가에 대한 온당한 평가가 이루어 질 것이고, 온전한 가치와 의미를 획득할 수 있을 것이다.

   기형도라는 시인을 직접, 간접적으로 접한 사람들은 모두 그의 ‘죽음’이라는 아우라에 휩싸여 그의 시에 대한 이성적 접근을 포기한 채, 비탄과 동정(동경과 그리 다르지 않은)에 쉽게 합류한다. 한 시인이 젊은 나이에 죽었다. 자연사나 사고에 의한 죽음이 아니라면, 그의 요절은 반드시 어떠한 필연성을 지니고 있다. 그 필연성이라는 것이 만약 존재한다면 말이다.


  짧은 생애


  시인 기형도는 1960년 경기도 연평에서 3남 4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이북 출신의 아버지 우민 씨는 민주당원으로 활동했는데 영종도 간척 사업에 몰두했다가 정부보조금 단절과 여러 가지 압력으로 실패하고 모든 것을 포기, 시흥으로 왔다가 자리를 잡고 가족을 부른다. 그리고 69년 정초(음력)에 ‘유리병 속에서 알약이 쏟아지듯 힘없이’(「위험한 가계․1969」)쓰러진다. 중풍이었다. 기형도의 시에서 자주 등장하는 아버지는 기형도가 죽을 때까지 ‘여전히 말씀도 못 하시고 굳은 혀’로 누워만 있는다. (아버지는 기형도가 죽은 2년 후인 1991년에 세상을 떠난다.) 뒤에서 자세하게 언급하겠지만 아버지의 병은, 아버지의 병으로 인한 아버지의 모습은, 또한 아버지의 몰락과 함께 찾아왔을 가계의 몰락은 기형도의 유년 체험의 근간을 이룬다. 이 체험은 15살 때의 바로 윗누이 ‘순도’의 죽음과 함께 기형도 시의 중요한 모티프를 형성하게 된다. 가사(假死) 상태의 아버지와 누이의 죽음. 기형도 시에서 번번히 등장하는, 아니 그의 시 전체를 뒤덮고 있는 암울한 분위기는 어렸을 적의 불행한 가계사(家系史)에 대부분을 빚지고 있는 듯 하다. 신림중학교와 중앙고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연세대학교 정법대 정법계열에 입학하게 된다.(1979년). 「대학시절」이라는 시에서 보이듯, 암울한 1980년대 초반을 보내고 그는 84년 10월 중앙일보에 입사한다. 그리고 8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안개」로 등단한다. 그리고 89년 3월 7일 종로의 심야극장에서 죽을 때까지 4년 남짓한 문단 생활을 하면서 왕성한 창작활동을 한다. 89년 가을에 계획하고 있었던 시집의 목차라든가, 제목에 대한 메모, (그는 시집의 제목을 「정거장에서의 충고」로 하기를 원했다. 「입 속의 검은 잎」이라는 제목은 평론가 김현이 정한 것이다.) 그리고 유작 등을 간직한 채였다.

 

   죽음이 머물다 간 풍경


 

   기형도의 시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궁극적으로는 ‘죽음’이라고 말할 수 있는, 어떠한 소멸의 대상들과 그 소멸의 징후들이다. 그의 시에서 보이는 대부분의 시적 화자는 그래서 ‘어둡고 축축한 세계’에 존재하거나 (「오래된 서적」) ‘도대체 또 어디로 간단 말인가!’(「여행자」) 라는 탄식에 사로잡혀 있다. 이러한 정서는 ‘불안’과 ‘공포’에서 기인하는데, 그의 시집 어떤 곳을 들춰봐도 쉽게 찾을 수 있는 이 불안하고 공포스런 징후들은 우선, 그의 유년의 체험에서 각인된 시인의 生來적인 상처에서 온다.「위험한 가계․1969」에서 보이는 화자의 유년은 ‘봐라, 나는 이렇게 쉽게 뽑혀지는구나’라고 말하는 아프고 무능한 아버지와 그 아버지 곁에서 ‘잠자코 이마 위로 흘러내리는 수건을 가만히 고쳐 매’는 어머니, ‘냉이꽃처럼 가늘게 휘청거리며 걸어’오는 누이, 그리고 ‘죽은 맨드라미처럼 빨간 내복이 스웨터 밖으로 나와 있’는 또 다른 누이로 결정될 수 있는, 암울하고 출구를 알 수 없는 깊은 고통의 세계이다. 그 중에서도 결정적인 것은 시집의 도처에서 보여지는 ‘아버지’에 대한 기억과 그것에서 파생되는 일련의 무기력하고 불안한 풍경들이다. ‘여전히 말씀도 못 하시고 굳은 혀’를 가진 아버지는 ‘추악하게’ ‘부러지지 않고 죽어 있는 날렵한 가지들’(「노인들」)에서와 같이 적대적인 증오의 대상으로, ‘불쌍한 내 장난감/ 내가 그린, 물그림 아버지’(「너무 큰 등받이 의자」)에서와 같이 동정과 연민의 감정으로 시집 전편에서, 모순된 여러 가지의 감정을 수반한 이미지로 변주된다. 기형도에게 있어서의 원체험은 이러한 아버지에 대한 기억들에 의해서 시인의 마음 깊숙이 각인된 어떤 ‘불구’의 모습이 아닐까? 그 회복 불가능한 불구의 모습은(어쩌면 그 불구에 대한 공포가) 기형도의 시세계를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단서가 될 것이다.

   그 불구의 모습은 유년기를 통과하면서 더욱 견고하게 시인의 가슴에 자리잡게 되는데 청년기의 서울 생활은 ‘하찮은 문장 위에 찍힌 방점과도 같은 것’(「조치원」)으로 기억되고, 사랑을 경험한 시인은 ‘못생긴 입술’(「그집 앞」)을 가진 사람으로 ‘이 세상에’ 자신과 같은 사람은 없다는 도저한 부정적 세계관을 지니게 된다. 대개의 부정(否定)이라는 것은 그 부정을 부정으로 만들게 한 어떠한 ‘정’의 세계 - 가령 이성복의 ‘몸도 마음도 안 아픈 나라’와 황지우의 ‘율도국’과 같은 - 를 갖게 마련인데, 기형도의 시에서 그 정의 세계는 찾아볼 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변증이 불가능하고 시인은 변화를 원하지 않는다. 다만,


      완전히 다르게 살고 싶었다, 나에게도 그만한 권리는 있지 않은가  - 「여행자」부분


   라는, 변화에의 열망에서 패퇴한 좌절과,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질투는 나의 힘」부분


   라는 아픈 독백을 거쳐


      나는 기적을 믿지 않는다  -「오래된 서적」부분


   라는 부정적 자기 인식에 도달하게 된다. 변증이 불가능한 시인의 인식, 그 소름끼치도록 견고한 묵시록의 종지부가 바로 ‘죽음’이라는 극단적 형태가 아닐까?

   기형도의 시에서, 기형도 자신의 죽음에 대한 예감은 도처에서 발견된다. 변증이 불가능한 고통의 땅에 자신의 발을 묶은 시인은 ‘미래가 나의 과거’(「오래된 서적」)라고 말한다. ‘독서행위’는 기형도가 절망의 세계에서 하나의 탈출구로서 자주 문을 두드렸던 곳으로 보이는데 그곳조차 ‘죽은 자들에 대해 추억이 바쳐지는 곳’(「흔해빠진 독서」)이다. 그 ’대부분 쓸모없는 죽은 자들‘(「흔해빠진 독서」)의 궤적을 읽는 행위는 곧바로 시인 자신과 동일화되는데, 다시 한번 시인은 ’검은 페이지가 대부분인 영혼‘(「오래된 서적」)을 발견한다. 이러한 일련의 ’독서시편‘들은 타자와의 소통 불가능성을 더욱 공고하게 시인이게 각인시킨다. 시인의 고립은 심화된다. 이러한 고립에서 기형도 자신의 유일한 대안은 ’쓴다‘는 행위 그 자체이다. 즉, 절망을 절망으로 있게 만든, 부조리한 세계의 관찰과 그 부조리한 세계에서의 고립된 개별자로서의 자신에 대해, 시인은 ’쓴다‘. 시작메모에서 시인은 ’글을 쓰지 못하는 무력감이 육체에 가장 큰 적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그때 알았다‘고 말한다. 부조리한 현실과 견딜 수 없는 고통의 완충지대가 바로 이 ’쓴다‘는 행위인 듯 하다. 그래서 시인은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빈집」)라고 말한다. 실연의 아픔을 아주 서정적으로 노래하고 있는 「빈집」이라는 시는 기형도에게 있어서 ’쓴다‘는 행위가 갖는 의미를 극명하게 드러내준다. 그것은 고통과 절망으로 점철된 세계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어루만질 수 있는 유일한 행위로 보여진다. 이러한 행위 속에서 시인 자신은 미미하나마 고통의 세계에 대한 대안적 모색을 찾게 되는데, 「먼지투성이의 푸른 종이」에서 그러한 징후들은 나타난다. 자신을 고통스럽게 하는 것들을 포용하는 음악의 이미지는 ’그 이상한 연주를 들으면서 어떨 때는 내 몸의 전부가 어둠 속에서 가볍게 튕겨지는 때‘를 경험한다. 하지만 이미 고통의 세계에 너무 익숙한 시인은 다시 한번 견고한 기억의 벽에 부딪친다. 그 기억이란,



         먼지투성이의 푸른 종이는 푸른색이다.

         어떤 먼지도 그것의 색깔을 바꾸지 못한다.   


                                 - 「먼지투성이의 푸른 종이」부분

                                 


   라는 의식이다. 변증의 시도는 곧바로 실패로 돌아가고, 기형도의 시세계는 더욱더 견고한 - 그 어떠한 것의 틈입도 거부하는 - 부정의 세계를 획득하게 된다.



   「정거장에서의 충고」그리고 「노인들」


미안하지만 나는 이제 희망을 노래하련다

마른 나무에서 연거푸 물방울이 떨어지고

나는 천천히 노트를 덮는다

저녁의 정거장에 검은 구름은 멎는다

그러나 추억은 황량하다, 군데군데 쓰러져 있던

개들은 황혼이면 처량한 눈을 껌벅일 것이다

물방울은 손등 위를 굴러다닌다, 나는 기우뚱

망각을 본다, 어쩌다가 집을 떠나왔던가

그곳으로 흘러가는 길은 이미 지상에 없으니

추억이 덜 깬 개들은 내 딱딱한 손을 깨물 것이다

구름은 나부낀다, 얼마나 느린 속도로 사람들이 죽어갔는지

얼마나 많은 나뭇잎들이 그 좁고 어두운 입구로 들이닥쳤는지

내 노트는 알지 못한다, 그 동안 의심 많은 길들은

끝없이 갈라졌으니 혀는 흉기처럼 단단하다

물방울이여, 나그네의 말을 귀담아들어선 안 된다

주저앉으면 그뿐, 어떤 구름이 비가 되는지 알게 되리

그렇다면 나는 저녁의 정거장을 마음속에 옮겨놓는다

내 희망을 감시해온 불안의 짐짝들에게 나는 쓴다

이 누추한 육체 속에 얼마든지 머물다 가시라고

모든 길들이 흘러온다, 나는 이미 늙은 것이다



- 「정거장에서의 충고」전문    


   시적 화자는 어딘가로 떠나기 위해 ‘정거장’에 서 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끊임없는 ‘떠남’의 도상에 있다. 떠도는 ‘검은 구름’이 잠시 ‘멎는다’. 그리고 시인은 어딘가로 떠나기 전에 담담하게 말한다. 이제 희망에 대해 노래하겠다고. 그런데 왜 미안한걸까? 변증을 거부한 시인 자신에게도 상처(어렸을 적의 가난이나 청년기의 이별의 상처)의 치유책은 당연히 ‘희망’일 것이다. 하지만 그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질투는 나의 힘」), 어떠한 대안책이나 모색의 전망을 지니고 있지 못하다. ‘황혼이면 처량한 눈을 껌벅’일 ‘군데군데 쓰러져 있는 개들’만 화자의 세계를 암울하게 지배할 뿐, 자신이 떠나온 집(그것은 아마도 시인에게 각인된 ‘원초적 불행’으로서의 최초의 세계, 즉 자신의 유년의 체험일 것이다)으로 ‘흘러가는 길은 이미 지상에 없’다. 화자가 서 있는 세계는 ‘느린 속도로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는 곳일 뿐이다. 물론 그 세계의 시작은 ‘나뭇잎들이 그 좁고 어두운 입구로’ 들이닥치던 그 집일 것이다. 도저한 불행과 암울한 세상은 ‘주저앉으면 그뿐’, 시에서의 화자는 ‘흉기처럼 단단’한 혀를 가진 모든 것들, ‘나그네’로 상징되는 화자의 내재적, 외재적 관계들과의 소통을 거부한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저녁의 정거장을 마음 속에 옮겨 놓는’일, ‘노트’로 상정할 수 있는 ‘쓴다’는 행위뿐이다. 그 노트는 아마도 ‘톱밥같이 쓸쓸해 보이는 청년들’(「조치원」)과 ‘춥고 큰 방에서’ 혼자 울고 있는 ‘書記’(「기억할 만한 지나침」)가 살고 있는, 고통과 불행이 유일하게 연대할 수 있는 공간이다. 기형도의 시작메모나 시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말하자면 ‘고통의 연대의식’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쓴다’는 행위가 궁극적으로 가지고 있는 목표인 듯 하나, 그것도 어디까지나 시인 자신의 내면에 ‘갇혀 있는’ 그런 의식일 것이다. 그것이 종국에는 시인 자신이 탈출구로 생각한 지향점으로 생각되는데, 이 제스쳐는 불행하게도 어떤 타협점을 찾지 못하고 좌초하고 만다. 이 좌초된 의식 속에서, ‘불안의 짐짝들에게’ ‘감시당해온 불안’ 속에서 시인은 쓴다. ‘이 누추한 육체 속에 얼마든지 머물다 가시라고/ 모든 길들이 흘러온다, 나는 이미 늙은 것이다’ 라고. 나는 이미 늙은 것이다 라니! 누추한 육체를 거느리고 있는 시인 자신, 그러니까 早老의 인식이야말로 기형도 시가 다다를 수밖에 없었던 귀결점이 아닌가 한다. 기형도에게 있어 삶 자체는 ‘긴 겨울’이다. ‘감당하기 벅찬 나날들은 이미 다 지나갔다’. 남은 것은 ‘봄빛이 닿는 곳마다 기다렸다는 듯 목을 분지르며 떨어지는 일’, 즉 죽음뿐이다.

    

                  노인들



감당하기 벅찬 나날들은 이미 다 지나갔다

그 긴 겨울을 견뎌낸 나뭇가지들은

봄빛이 닿는 곳마다 기다렸다는 듯 목을 분지르며 떨어진다


그럴 때마다 내 나이와는 거리가 먼 슬픔들을 나는 느낀다

그리고 그 슬픔들은 내 몫이 아니어서 고통스럽다


그러나 부러지지 않고 죽어 있는 날렵한 가지들은 추악하다



   여러 시인 평론가들이 기형도가 살아 있다는 가정 속에서, 그 이후의 시세계를 가늠해보았다. 부질없는 짓이겠지만 나는, 그것은 아마도 신대철의 오랜 침묵과 김중식의 절필과 같은 형식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시인은 ‘쓴다’라는 행위로 자신의 고통의 해방구를 찾았지만 그 세계는 이미 ‘죽음의 편에 서 있는’(「10월」)것들이었다. 시인은 죽었고, 죽었기 때문에 더 이상 시를 쓰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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