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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전쟁 - 전쟁이 끝나면 정치가 시작된다 ㅣ 임용한의 시간순삭 전쟁사 2
임용한.조현영 지음 / 레드리버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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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전쟁하면 먼저 떠오르는 기억은 이스라엘이 아랍을 초전박살 냈다는 전쟁에서 쉽게 승리하였다는 기사이다. 역사는 승자의 편에서 서술되기에 주로 이스라엘 민족의 우수성과 애국심을 강조하고 아랍과 이슬람을 적대시하는 관점에서 이들을 바라보는 기사들이 대다수이다. 이러한 점은 중동의 오래된 갈등 구조와 복잡성에 대해 잘 알지 못하고, 편견이 심하다는 것을 이용하여 힘 있는 국가들이 자국에 유리한 방향으로 끌어갔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중동전쟁의 배후에는 미국, 소련, 영국, 프랑스 등 많은 나라와 사람, 이권, 갈등이 있다고 한다. 또한, 전쟁에 참전한 중동의 이집트, 시리아, 요르단, 레바논, 이라크, 리비아, 사우디 등 여러국가 사정 또한 복잡다단하였다고 한다. 중동전쟁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도 이념과 종교, 냉전의 편향성 때문에 어느 한 편에 서서 바라보아 일면 희생자라는 저자의 주장에 상당히 공감이 갔다.
제1차 중동전쟁은 1948년전쟁, 제2차 중동전쟁은 수에즈전쟁이라고 한다. 1940년대 팔레스타인은 분출 직전의 용광로였다. 세계대전이 한창이었고, 세계사에서 유례없이 복잡한 독립투쟁과 종족 갈등, 가장 완고하고 타협이 어려운 종교 분쟁, 20세기를 뒤흔들 자원 전쟁이 동시에 태동하고 있었다. 유대인이 수천 년간 박해의 대상이 된 것은 ‘예수를 죽인 민족’이란 오명이 원인이었지만, 유별나게 강력한 그들의 신념과 폐쇄성도 무시 못 할 요인이라고 한다. 유대인을 유대인으로 만든 특별한 조항은 바로 ‘토지 소유 금지’였다. 이것이 유대인을 영원한 이방인으로 만든 결정적 요인이 되었다. 토지를 소유할 수 없으니 농사도 지을 수 없었던 유대인은 중세시대부터 도시로 몰려들었고, 상인, 수공업, 고리대금, 무역을 장악했다. 그래서 도시마다 게토라는 유대인 거주지가 구축되었다 한다.

유대인 드레퓌스가 대위로 승진하자 유대인 혐오자들은 그에게 스파이 혐의를 씌워 스파이 활동에 대한 재판으로 종신형을 선고하고 섬에 가둬버린 만행을 저지른 것이 ‘드레퓌스 사건’이라 한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분할 독립을 제안한 유엔의 결의안은 화약고에 불을 붙인 셈으로 바로 중동전쟁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팔레스타인에는 아랍인과 유대인 거주지가 뒤섞여 있었고 첫 번째 전투는 도시 쟁탈전 즉 ‘도시 전쟁’이었다. 이 전투에서 이스라엘은 인상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어느 도시에서나 아랍 인구는 유대인에 비해 최소 3배 이상이었지만, 싸워서 도시를 지키기보다는 안전지대로 피신하려는 욕구가 훨씬 강했는데, 유대인들은 갈 곳이 없었고 아랍인들은 갈 곳이 많았다는 것이 근본적인 차이였다고 한다.
나세르의 수에즈 국유화는 서방측의 영향력과 권익을 아랍제국에서 모조리 축출하려는 계획적인 운동의 시작이다. 하지만 영국, 프랑스와 이스라엘의 협공으로 나세르는 이스라엘에 시나이반도를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에 수에즈를 빼앗기고 이집트는 쑥대밭이 된다. 2차대전 이후 냉전기의 시작과 함께 강대국 영국, 프랑스, 미국, 소련이 얽혀 벌어진 제2차 중동전쟁, 그 정전과 함께 세계의 패권은 영국, 프랑스로 대표되는 유럽에서 미국과 소련으로 넘어가며 세계 정세의 판도가 바뀌었다.

세계 3차대전이 일어난다면 가장 유력한 발생지역이 이스라엘-팔레스타인의 중동지역이 될 것이라는 미디어의 보도와 전문가들의 의견을 종종 들었던 기억이 있다. 이스라엘에 전폭적인 지지를 아끼지 않는 현재 미국의 대이스라엘 정책의 핵심은 현상 유지라고 한다. 강대국들의 패권다툼에 의한 전쟁으로 인해 무고한 시민들의 희생이 발생되지 않았으면 좋겠고, 이스라엘 이외에도 팔레스타인과 중동전쟁에 참전한 여타 중동국가들의 다양한 관점에서 중동전쟁, 이스라엘에 대한 생각, 중동의 현 상황 등을 조망하는 미디어나 책 등이 활성화되어 대중들이 중동의 역사에 더 알고, 편향된 시각에 사로잡히지 않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