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슈나는 신으로 아르주나를 태우고 말고삐를 잡는다. '말고삐'는 인간을 안내한다는 의미로, 아르주나의 고민에 크리슈나가 가르침을 준다는 의미이다. 크리슈나는 이곳에서 여러 요가(Yoga)를 이야기한다. 요가는 우리의 지성을 명료하게 하고, 마음이 미혹에서 벗어나게 하며, 실재에 대한 직접적인 지각을 얻게 하는 심리적인 단련체계이다. '바가바드 기타'에서 설해지는 요가는 크게 세 가지로 즈나나(지식의 길), 카르마(행위의 길), 바크띠(믿음의 길)로 나눈다.
아르주나는 적의 진영에 가족과 스승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 활과 화살을 내려놓으며 말한다.
"이들 존경할 스승들을 죽이기보다 차라리 이 세상에서 빌어먹는 것이 제 소원입니다. 비록 그들이 자기네 이익을 원한다 하더라도 그들은 제 스승입니다. 저는 그들을 죽임으로써 이 세상에서 피에 물든 복락을 누릴 뿐이옵니다. 또 우리가 그들을 정복하든 그들이 우리를 정복하든 그 어느 것이 과연 나은지를 알 수 없습니다. 우리가 그들을 죽인다면 살고 싶은 마음이 있을 수 없는 드리타라슈트라 왕의 아들들이 저기 진을 벌이고 서 있습니다. 제 목숨은 슬픈 심정에 오금이 저리고, 제 마음은 어지러워 제 할 의무를 가려낼 수 없습니다. 당신께 묻자옵니다. 확실한 말씀으로 일러주옵소서. 어느 것이 합당하옵니까? 저는 당신의 제자이옵니다. 당신께로 피하여 돌아왔사오니 가르쳐주옵소서. 저는 비록 이 땅 위에서 비길 수 없이 부요한 왕국을 얻으며 천신들까지도 다르실 수 있는 권세를 얻는다 할지라도 제 오감을 다 말리어버리고야 말 이 고뇌를 무엇으로 몰아낼 수 있는지를 알 수 없습니다."
크리슈나가 말하기를
"너는 슬퍼할 수 없는 자를 위하여 슬퍼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지혜의 말을 했다. 어진 이는 죽은 자를 위해서도 슬퍼 않고 산 자를 위해서도 슬퍼 않는다. 나는 일찍이 있지 않았던 때가 없으며, 너도 저 왕들도, 또 이 앞으로도 우리가 있지 않게 될 때는 없을 것이다. 이 몸의 주인은 여기서 어린이와 청년과 어른의 시대를 지내듯이, 그렇듯이 또 다른 몸을 가지는 날이 온다. 어진 이는 그 때문에 당혹하지 않는다. 아르주나야, 감관이 대상과 접촉하면 차고 덥고 즐겁고 괴로움이 일어난다. 그것은 오고 가는 것이어서 덧이 없다. 그것을 견디어라. 오, 바라타의 족속아."
'바가바드 기타'의 사상은
순환하는 우주의 삶 - 까르마 (업)
세계와 조화를 이루는 삶 - 다르마 (달마)
해탈의 추구와 달성 방법 이다.
어떤 행위 대하여 결과는 무의미한 것이다.
인간의 행위에 대한 욕망이 없는 행위를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목적은 있지만 목적 없는 행위를 추구한다. 노자의 도가도비상도(道可道非常道) -- 도를 말할 수 있다면 항상 그러한 도가 아니다. -- 와 같이 동양철학은 무언가 심오한 맛이 있다.
['행위'라는 의미는 '행동'과는 다른 것이다. '행동'은 생각 없이 움직일 수 있는 것이고 '행위'는 생각하여 행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