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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파니샤드 2 ㅣ 한길그레이트북스 21
이재숙 옮김 / 한길사 / 1996년 11월
평점 :
우파니샤드를 읽다보니, 존재는 '나'를 인식함과 동시에 '참나' 그러니까 아뜨만으로부터 떨어져 나오게 되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에 대해 묻는다는 것은 나 아닌 '타자'를 전제로 한 것이다. 구약 성경의 창세기에서 아담과 하와는 나와 너, 선과 악, 남과 여를 인식하게 되자 낙원으로부터 추방당하고 죽어야하는 존재가 되었다.
나와 너, 선과 악, 남과 여의 구분.. 이러한 대극(大極)을 인식하는 순간부터 인간은 그 근원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일 지도 모르겠다. 브리하다란야까 우파니샤드에서도 '그는 보고 있으면서도 보고 있지 않으며, 다만 보는 것을 그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다. 그가 볼 대상, 즉 그 외에는 다른 자, 그와 분리된 다른 존재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 하나를 여럿으로 본다. 하나를 무수히 많은 이름으로 부른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하고 욕망하며, 결국 죽을 수밖에 없다.
이 우파니샤드에는 인간의 육신을 마차에 빗대는 부분이 있다. 인간이 숨을 쉬는 것은 아뜨만을 싣고 가며 덜커덩 소리를 내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다가 육신이 노쇠해지면 아뜨만은 모든 숨과 감각들을 한데 모아 다른 육신으로 들어간다고 한다. '덜커덩!' 이 구절에서 나는 두려움을 느꼈던 것 같다. 내가 그토록 열망하는, 그 속에서 무언가 의미를 찾으려 하는 나의 삶이 그저 '덜커덩!' 소리라니! 그것은 너무나 허무하고 두려운 소리다. 그러나 우파니샤드에서 말하는 존재의 법칙이 실재하는 것이라면, 이 '덜커덩' 소리는 끝없이 반복될 것이다. 내 육신에 의해 표현된 욕망, 즉 행위는 반드시 그 결과를 얻고, 다시 새로운 행위를 위하여 세상에 돌아오도록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 존재의 수레바퀴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무엇일까? 이에 대한 대답은, '내가 아뜨만이다'라는 진리를 깨닫는 것이라고 한다. 더 이상 브라흐만이 추구해야할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이 그에 녹아 들어가 그와 하나가 되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 이후엔 선과 악의 구분이 없을 것이고, 나와 너의 구분도 없을 것이다. 삶도, 죽음도 없을 것이다. 모든 대극(大極)을 극복한 것이다.
결국, 나는 참 자아인 아뜨만, 혹은 브라흐만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나는 그것에 대한 성찰들 중 아주 일부를 살펴보았을 뿐이며, 내 스스로 내 근원, 우주의 근원에 대하여 절실하게 알고자 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근본적으로는, 그것은 모든 것을 있게 하였고 그것들을 포함하는 동시에, 그것들 속에 내재하는, 그리고 자신조차 초월하는 존재이므로 어떠한 말로도 이를 포괄한 수는 없기 때문일 것이다. 아뜨만이건 브라흐만이건 또는 그 어떤 이름으로 불려지던 간에 그것은 결국 '네티, 네티'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그래도 이 우파니샤드를 읽으면서 내 나름대로 생각한 바는 있다. 그것은 자신과 세계에 대하여 물음이 가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다. 묻는다는 것은 인식을 전제로 하는 것이고, 인식은 스스로와 다른 것이 있을 때 가능하다. 그렇다면 물음은 하나를 여럿이라고 여기는 무명(無明)에서 비롯되는 것이리라. 이처럼 인간은 내가 아닌 것이 있다는 대극을 인식함으로써 그 근원에서 멀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분리되어 나온 이 아뜨만과 다시 합일하려는 욕망은 모든 것의 출발점이 될 것이다. 그 욕망이 알고자 하는 욕망, 즉 물음이다.
인간이 그토록 오랫동안 '존재가 스스로에게 던지는 물음'을 계속하여 올 수 있었던 것은, 그 안에, 그를 있게 했고 그 자신이며 나아가 그 자신을 초월하는 지고의 무언가가 깃들여 있음을 느끼기 때문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