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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본성에 대하여 사이언스 클래식 23
에드워드 윌슨 지음, 이한음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0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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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본성에 대하여 ON HUMAN NATURE」를 읽으면서 나는 사회생물학(Sociobiology)이라는 학문이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마침 <학습 행동 생물학> 수업 시간에 동물의 사회성을 배우면서 '사회생물학'이란 학문과 또 다시 마주칠 기회가 있었지만, 윌슨의 책 한 권을 읽고서 이해하기에는 이 학문은 내게 너무 낯설었다. 그래서 나는 여기 저기서 자료를 찾아 사회생물학의 등장과 생물의 사회적 행동에 대한 기본적인 입장, 몇몇 사회생물학자들이 주장하는 바와 그에 대한 증거, 그리고 이런 주장에 대한 비판들에 대하여 간략하게나마 살펴본 후 이 책을 다시 읽었다.

사회생물학(Sociobiology)은 이 책의 저자인 에드워드 윌슨(Edward O. Wilson)이 1975년 「사회생물학 : 새로운 종합」을 출간하면서 정립한 용어로,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물의 사회적 행동의 생물학적 원리에 관한 체계적인 연구'라고 정의할 수 있다. 사회생물학은 유기체의 행동을 그 유전자의 산물로 보며, 인간을 포함한 동물의 사회적 행동에 대해서도 유전적인 적응의 측면에서 연구하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말하자면, 동물들은 자신의 유전자를 다음 세대로 전달하는 기회를 극대화하는 방식으로 행동한다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행동양식은 어느 정도 유전되므로 개체의 번식 기회를 증가시키는 행동들은 자연선택을 통하여 더욱 강화되게 된다는 것이다.

이 책 「인간 본성에 대하여」의 첫머리에서 윌슨은 인간을 생물학적인 존재로 규정하고 있다. 즉 인간의 본성을, 인간의 고유한 것으로 여겨져 왔던 이성이나 정신 등이 아니라, 모든 생명체가 공통으로 지니고 있는 유전자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이다. 그는 인간 또한 다른 생물들과 마찬가지로 유전자의 우연과 환경의 필연에 의해 창조된 존재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는 인간 본성에 대하여 지난 수천 년간 있어왔던 모든 형이상학적 논의를 원점으로 되돌리는 것이다.

그동안 우리를 여타 생물 종들과 구별해준다고 믿어왔던 인간의 정신은 어떻게 설명될 수 있을까? '정신'이라는 것의 실체가 뇌의 물리적, 화학적 작용이라는 것이 이미 밝혀졌다. 많은 이들이 아직까지도 그러한 사실을 인정하고 싶어하지 않는데, 그는 인간 정신은 유전자의 생존과 증식을 촉진하기 때문에 존재한다고까지 말한다. 이것이 결국 의미하는 바는 인간과 여타 생물 개체들은 유전자가 자신을 영속적으로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운반자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우리 인간은 스스로를 자율적인 의지를 가진 존재라고 믿어왔다. 하지만 윌슨의 주장대로라면 우리를 지배하는 것은 유전자이며, 우리의 행동은 결국 유전적으로 프로그램되어 있다는 것이 된다. 여기서 도출되는 것은, 인간을 포함한 어떤 종도 자신의 유전적 역사가 부과한 의무---생물학적 본성---를 초월하는 다른 어떤 목적도 갖고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즉. 우리가 나아가야 할 정해진 방향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이 윌슨이 말하는 인간의 정신적 딜레마 중 그 첫 번째이다.

우리는 저마다 가치 있다고 믿는 것을 실현하기 위하여, 또는 자신의 가능성을 실현하기 위하여 살아간다고 말하지만 정작은 유전자의 이익을 위해 봉사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말인가? 우리는 이제 무엇을 목표로 삼아야 하나? 이러한 물음들에 대답하기 위하여 윌슨은 인간의 내부를 들여다보고, 정신의 장치를 해부하고, 그것의 진화사를 되짚어 볼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며, 그러한 노력은 두 번째 딜레마를 드러낸다고 말한다.

그것은 우리가 인간의 생물학적 본성에 내재한 윤리적 전제들을 놓고 '선택'을 해야한다는 것이다. 그는 이러한 문제 제기를 통해 이를 극복하기 위한 처방으로 사회과학과 생물학의 통합을 내세우고 있다. 최적 대안은 인간의 본성에 대한 보다 근원적이고 심층적인 자연과학적 지식을 사회 과학에 접목시키는 것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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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파니샤드 2 한길그레이트북스 21
이재숙 옮김 / 한길사 / 199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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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파니샤드를 읽다보니, 존재는 '나'를 인식함과 동시에 '참나' 그러니까 아뜨만으로부터 떨어져 나오게 되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에 대해 묻는다는 것은 나 아닌 '타자'를 전제로 한 것이다. 구약 성경의 창세기에서 아담과 하와는 나와 너, 선과 악, 남과 여를 인식하게 되자 낙원으로부터 추방당하고 죽어야하는 존재가 되었다.

나와 너, 선과 악, 남과 여의 구분.. 이러한 대극(大極)을 인식하는 순간부터 인간은 그 근원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일 지도 모르겠다. 브리하다란야까 우파니샤드에서도 '그는 보고 있으면서도 보고 있지 않으며, 다만 보는 것을 그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다. 그가 볼 대상, 즉 그 외에는 다른 자, 그와 분리된 다른 존재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 하나를 여럿으로 본다. 하나를 무수히 많은 이름으로 부른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하고 욕망하며, 결국 죽을 수밖에 없다.

이 우파니샤드에는 인간의 육신을 마차에 빗대는 부분이 있다. 인간이 숨을 쉬는 것은 아뜨만을 싣고 가며 덜커덩 소리를 내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다가 육신이 노쇠해지면 아뜨만은 모든 숨과 감각들을 한데 모아 다른 육신으로 들어간다고 한다. '덜커덩!' 이 구절에서 나는 두려움을 느꼈던 것 같다. 내가 그토록 열망하는, 그 속에서 무언가 의미를 찾으려 하는 나의 삶이 그저 '덜커덩!' 소리라니! 그것은 너무나 허무하고 두려운 소리다. 그러나 우파니샤드에서 말하는 존재의 법칙이 실재하는 것이라면, 이 '덜커덩' 소리는 끝없이 반복될 것이다. 내 육신에 의해 표현된 욕망, 즉 행위는 반드시 그 결과를 얻고, 다시 새로운 행위를 위하여 세상에 돌아오도록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 존재의 수레바퀴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무엇일까? 이에 대한 대답은, '내가 아뜨만이다'라는 진리를 깨닫는 것이라고 한다. 더 이상 브라흐만이 추구해야할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이 그에 녹아 들어가 그와 하나가 되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 이후엔 선과 악의 구분이 없을 것이고, 나와 너의 구분도 없을 것이다. 삶도, 죽음도 없을 것이다. 모든 대극(大極)을 극복한 것이다.

결국, 나는 참 자아인 아뜨만, 혹은 브라흐만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나는 그것에 대한 성찰들 중 아주 일부를 살펴보았을 뿐이며, 내 스스로 내 근원, 우주의 근원에 대하여 절실하게 알고자 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근본적으로는, 그것은 모든 것을 있게 하였고 그것들을 포함하는 동시에, 그것들 속에 내재하는, 그리고 자신조차 초월하는 존재이므로 어떠한 말로도 이를 포괄한 수는 없기 때문일 것이다. 아뜨만이건 브라흐만이건 또는 그 어떤 이름으로 불려지던 간에 그것은 결국 '네티, 네티'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그래도 이 우파니샤드를 읽으면서 내 나름대로 생각한 바는 있다. 그것은 자신과 세계에 대하여 물음이 가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다. 묻는다는 것은 인식을 전제로 하는 것이고, 인식은 스스로와 다른 것이 있을 때 가능하다. 그렇다면 물음은 하나를 여럿이라고 여기는 무명(無明)에서 비롯되는 것이리라. 이처럼 인간은 내가 아닌 것이 있다는 대극을 인식함으로써 그 근원에서 멀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분리되어 나온 이 아뜨만과 다시 합일하려는 욕망은 모든 것의 출발점이 될 것이다. 그 욕망이 알고자 하는 욕망, 즉 물음이다.

인간이 그토록 오랫동안 '존재가 스스로에게 던지는 물음'을 계속하여 올 수 있었던 것은, 그 안에, 그를 있게 했고 그 자신이며 나아가 그 자신을 초월하는 지고의 무언가가 깃들여 있음을 느끼기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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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7 아무일도 없었던 해
황런위 지음, 박상이 옮김 / 가지않은길 / 199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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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란 특정한 사건들을 시간 순서로 나열한 것이다. 이것이 초등학교 때부터 시작하여 고등학교 시절까지 역사 수업을 받으며 느껴온 역사에 대한 희미하나 분명한 이미지이다. 역사 교과서의 연대표에는 천재지변이나 전쟁, 반란, 왕조의 창건과 멸망 등 거창한 사건들이 몇 해를 건너뛰고서 띄엄띄엄 기록되어 있다. 끊임없이 이어져 왔던 시간의 고른 흐름 가운데에서 '주목할 만 하다고 인정된' 사건들이나 영웅, 천재들의 활동은 엄청나게 확대되어 논의되는 반면, '사소한' 사건들이나 '평범한' 사람들의 생활은 간과되어 왔다.

나는 <1587 : 아무 일도 없었던 해>, 이 제목이 특이한 책을 읽는 내내 이러한 '불공평한' 처사에 항의하고 있었다. 연대표의 빈 공간은 결코 비어있지 않다고. 인류의 역사 가운데 단 하루라도 아무 일도 없었던 적은 없었다. 아무 일도 없었다고 여겨지는 수많은 날들이 우리가 주목하는 커다란 사건들의 실마리를 제공했던 것이다. 오히려 비어있는 공간을 매꾸는 무수히 많은 '일상적인' 일들과 대다수의 '평범한' 사람들이야말로 그 시대의 전형적인 삶을 이야기해줄 수 있지 않을까?

1587년, 중국에서 1587년이 차지하는 의미는 무엇일까? 그 해에 실제로 누구나 알 수 있는 큰 사건은 발생하지 않았다. 이렇다할 외적의 침입도, 내전도 없었다. 중국과 같은 거대한 나라에서라면 충분히 무시될 수 있는 사소한 사건들이 일어났을 뿐이었다. 그리하여 1587년 정해년은 아무 일도 없었던 해로 기록되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그다지 중요한 사건이 없었던 당시, 중국은 다음 세기 역사의 물길을 바꾸는 큰 일을 겪고 있었다. 명나라 말기 만력제의 통치 시기인 이 해에 중국에서는 결정적인 외침이나 내란은 없었으나 비대한 관료 조직과 형식적인 군주제로 명은 안으로부터 붕괴되어가고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하기만 한 수많은 사건들이 명 왕조의 멸망을 재촉하고 있었던 것
이다.

결국 이 책의 저자가 주목하는 1587년은 16세기 말 중국의 역사적 위기를 상징하는 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명조 말기의 6인을 등장시켜 그들의 심리와 생활을 자세히 묘사함으로써 명 왕조 몰락의 길을 상세히 분석하고 있다.

저자는 명 말기 행정 작용과 개인의 행위를 판단하던 도덕적 원칙이 지나치게 획일적이고 편협했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황제를 비롯하여 대학사, 장군, 철학자 등의 개혁 세력들은 사회 개혁을 도모했으나 그들은 관료제의 근본적인 모순을 파악하지 못했기에 좌절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듯 1587년 당시 명은 도덕적 원칙에 의한 규제가 그 어느 때보다도 강화되어 사회의 창조적 능력은 철저히 제한되었기에 발전의 한계점에 도달해 있었다. 그리하여 그 해는 황제나 관료나 모두 자신의 가치를 발휘하지 못한 해였다. 1587년 중국에는 결국 아무 일도 없었다. 그러나 비대해진 관료 조직과 형식적인 군주제로 명은 내부로부터 봉괴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책은 1587년을 지목하여 어두운 현실과 빛나는 도덕 규범으로 표상되는 명 말기의 현실과 명분과의 엄청난 괴리를 이해시키고 있는 것이다.

2000년 11월 현재 한국에서는, 또는 전세계에서는 무슨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가? 방송이나 신문을 통하여 보도되는 '중요한' 사건들은 현재 일어나고 있는 무수히 많은 사건들 중 극히 소수에 불과하다. 그러나 내 주변에서 흔하게 일어나고 있지만 무시되고 있는 이러한 '사소한' 사건들이 모여 조만간 '역사적' 사건을 유발하게 될는지 누가 알겠는가?
<1587 : 아무 일도 없었던 해>는 셀 수 없이 많은 '아무 일도 없던 날'들이 역사 속에 당당히 자리잡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준다. 진정 '아무 일도 없던 해'란 여태까지 없었고 앞으로도 없으리라. 이 날 이 순간을 역사는 비껴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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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이란 무엇인가? - DNA 발견 이후 다시 쓰는 진화론
린 마굴리스.도리언 세이건 지음, 황현숙 옮김 / 지호 / 199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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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생물계의 다채로운 모습을 제시함으로써 생명의 특성과 생명체들간의 관계를 알기 쉽게 풀어 설명하고 있다. 생명 현상을 바라보는 관점의 다양성이라는 면에서, 내게 도움이 많이 되었던 것 같다. 생물학적 지식이 별로 없다보니, 잘 이해할 수 없는 부분들도 많아서 좀 안타깝긴 하지만, 진화의 개념과 생명, 보다 가까이는 '나'에 대해 생각해 볼 기회가 되었기에 만족한다.

우선, 진화가 '경쟁'과 '배제'가 아니라 '공생'과 '협력'의 과정이라는 저자들의 견해가 새로웠다. '진화론' 하면 다윈이 떠오르고, '자연 선택', '생존 경쟁', '적자 생존', '도태' 등과 같은 살벌한 단어들이 연상되기 마련이었다. 이것들만이 진화의 주요 과정이라면 생물계는 서로 자기가 살아남기 위해 상대방을 죽여야 하는 전쟁터에 다름 아닐 것이다. 하지만 린 마굴리스와 그의 아들은 공생에 의한 진화를 주장함으로써 생물들 간의 '관계'를 재해석했다. 더욱이 이 '공생을 통한 진화'로 오늘날 우리가 겪고 있는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고 말한다.

오히려 지구 역사에서는 지금 인류가 겪고 있는 것보다 훨씬 심각한 위기가 여러 차례 있어 왔지만, 그 때마다 생물체들은 공생을 통해 응전함으로써 위기를 기회로 만들어왔음을 상기시킨다. 이런 태도는 생물계에서뿐만 아니라 인간 사회에 적용시킬 수도 있겠다. 물론, '공존'의 필요성은 누구나 인정하면서도 그것을 모두가 함께 실천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일 것이다. 단순히 '뭉쳐야 살 수 있다.'는 외침은 주목받을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하지? 아직 참신한 해결책은 모색 중이다. 생각해보면, 찾고자 하는 '의지'가 있다는 사실이 희망인 듯도 싶다. 생물들의 살아남으려는 '의지'가 바로 진화의 원동력이 아니었나.

우리 몸만 해도 수많은 생물들이 공존하여 살아가고 있는 복합적인 시스템이다. 생명을 개체 수준으로만 인식하는 것은 생명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생명의 모습은 총체적 단일체로 이해되어야 할 것 같다. 개체는 의존적인 존재 단위이고 한 개체는 때로는 더 큰 개체의 일부가 되기도 하고 때로는 자신의 내부에 수많은 작은 개체들을 포함하고 있기도 한 상호 의존적인 통합체이다. 그리고 지구 자체가 이런 홀러키적인 시스템으로 파악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이 책의 부록에 실린 '온생명'의 개념이나 '가이아' 이론들과도 상통하는 면이다.

여기서 인간의 위치는 어디쯤 있을까? 인간은 지구 유기체의 한 일부에 불과할 지라도 그 안에 속한 생명에 대하여 깊이 고찰하는 존재라는 점에서 매우 특이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를 지구의 충추 신경계라는 식으로 보는 데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의 경험과 인식에는 근본적인 제약이 따르기 때문이다. 우리가 스스로를 '보다 의식적이고 지능적'이라고 하는 것은 철저히 인간의 시각에서 본 것이다.

내가 보는 세계는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경험한 세계이므로 '나에게만' 의미를 갖는다. 예를 들어 내 방에서 자라고 있는 선인장도 스스로를 가장 유능하고 지적이라고 생각하고 있을지 누가 알겠는가! 나는 '나의 세계'에서만 '중심'이 될 수 있다. 그래도 우리는 생물권 내에서 우리의 위상을 나름대로 파악하여, 다른 생물들과 공생 관계를 형성하고 전 지구 안에서 내공생 하면서 살아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 책을 통해 생명의 여러 가지 특성들을 보다 다양한 차원에서 조명하면서 생명의 정의에 다가서려고 해 보았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생명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은 결국 구할 수 없는 것 같다. 생명은 장기간에 걸쳐 상호 작용하고 공진화하면서 원래의 자기 이상이 되는, 창발적이고 자기초월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명은 충분히 탐구할 가치가 있는 까닭은 비록 우리가 '살아있음'의 '의미'를 알 수는 없을지라도, 생명에 대하여 상고함으로써 '살아있음'을 보다 생생하게 '느끼고 즐길' 수 있기 때문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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