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7 아무일도 없었던 해
황런위 지음, 박상이 옮김 / 가지않은길 / 1997년 11월
평점 :
절판


역사란 특정한 사건들을 시간 순서로 나열한 것이다. 이것이 초등학교 때부터 시작하여 고등학교 시절까지 역사 수업을 받으며 느껴온 역사에 대한 희미하나 분명한 이미지이다. 역사 교과서의 연대표에는 천재지변이나 전쟁, 반란, 왕조의 창건과 멸망 등 거창한 사건들이 몇 해를 건너뛰고서 띄엄띄엄 기록되어 있다. 끊임없이 이어져 왔던 시간의 고른 흐름 가운데에서 '주목할 만 하다고 인정된' 사건들이나 영웅, 천재들의 활동은 엄청나게 확대되어 논의되는 반면, '사소한' 사건들이나 '평범한' 사람들의 생활은 간과되어 왔다.

나는 <1587 : 아무 일도 없었던 해>, 이 제목이 특이한 책을 읽는 내내 이러한 '불공평한' 처사에 항의하고 있었다. 연대표의 빈 공간은 결코 비어있지 않다고. 인류의 역사 가운데 단 하루라도 아무 일도 없었던 적은 없었다. 아무 일도 없었다고 여겨지는 수많은 날들이 우리가 주목하는 커다란 사건들의 실마리를 제공했던 것이다. 오히려 비어있는 공간을 매꾸는 무수히 많은 '일상적인' 일들과 대다수의 '평범한' 사람들이야말로 그 시대의 전형적인 삶을 이야기해줄 수 있지 않을까?

1587년, 중국에서 1587년이 차지하는 의미는 무엇일까? 그 해에 실제로 누구나 알 수 있는 큰 사건은 발생하지 않았다. 이렇다할 외적의 침입도, 내전도 없었다. 중국과 같은 거대한 나라에서라면 충분히 무시될 수 있는 사소한 사건들이 일어났을 뿐이었다. 그리하여 1587년 정해년은 아무 일도 없었던 해로 기록되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그다지 중요한 사건이 없었던 당시, 중국은 다음 세기 역사의 물길을 바꾸는 큰 일을 겪고 있었다. 명나라 말기 만력제의 통치 시기인 이 해에 중국에서는 결정적인 외침이나 내란은 없었으나 비대한 관료 조직과 형식적인 군주제로 명은 안으로부터 붕괴되어가고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하기만 한 수많은 사건들이 명 왕조의 멸망을 재촉하고 있었던 것
이다.

결국 이 책의 저자가 주목하는 1587년은 16세기 말 중국의 역사적 위기를 상징하는 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명조 말기의 6인을 등장시켜 그들의 심리와 생활을 자세히 묘사함으로써 명 왕조 몰락의 길을 상세히 분석하고 있다.

저자는 명 말기 행정 작용과 개인의 행위를 판단하던 도덕적 원칙이 지나치게 획일적이고 편협했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황제를 비롯하여 대학사, 장군, 철학자 등의 개혁 세력들은 사회 개혁을 도모했으나 그들은 관료제의 근본적인 모순을 파악하지 못했기에 좌절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듯 1587년 당시 명은 도덕적 원칙에 의한 규제가 그 어느 때보다도 강화되어 사회의 창조적 능력은 철저히 제한되었기에 발전의 한계점에 도달해 있었다. 그리하여 그 해는 황제나 관료나 모두 자신의 가치를 발휘하지 못한 해였다. 1587년 중국에는 결국 아무 일도 없었다. 그러나 비대해진 관료 조직과 형식적인 군주제로 명은 내부로부터 봉괴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책은 1587년을 지목하여 어두운 현실과 빛나는 도덕 규범으로 표상되는 명 말기의 현실과 명분과의 엄청난 괴리를 이해시키고 있는 것이다.

2000년 11월 현재 한국에서는, 또는 전세계에서는 무슨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가? 방송이나 신문을 통하여 보도되는 '중요한' 사건들은 현재 일어나고 있는 무수히 많은 사건들 중 극히 소수에 불과하다. 그러나 내 주변에서 흔하게 일어나고 있지만 무시되고 있는 이러한 '사소한' 사건들이 모여 조만간 '역사적' 사건을 유발하게 될는지 누가 알겠는가?
<1587 : 아무 일도 없었던 해>는 셀 수 없이 많은 '아무 일도 없던 날'들이 역사 속에 당당히 자리잡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준다. 진정 '아무 일도 없던 해'란 여태까지 없었고 앞으로도 없으리라. 이 날 이 순간을 역사는 비껴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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