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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人間)이라는 단어 자체가 내포하고 있듯이 예부터 인간은 홀로 존재하기 보다는 서로간의 상관관계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인지한다는 생각은 이미 오래 전부터 많이 들어왔을 것이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없이 온전히 나 자신을 정의하는 것은 꽤나 어려운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서로에게 감정적인 유대를 호소하기도 한다. 하지만 알베르 카뮈는 모두가 꼭 그렇지만은 않다고 이야기한다.

이 짧은 분량의 소설으로 알베르 카뮈의 창작 센스를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그가 내세운 뫼르소라는 인물과 책의 전반적인 문체와 분위기 그리고 그 어느 것 하나 빠뜨리지 않은 기가막힌 제목 L`etranger까지. 알베르 카뮈의 실존주의적인 사상과 당시 격변의 세태까지 책의 이해를 도와준다. 지금의 현대사회에 와서야 카뮈의 `이방인`이 더욱 더 와닿는 것을 본다면 그의 통찰력에도 감탄을 하게 된다.

소설 자체는 매우 짧고 간단하다. 민음사 본을 읽는 사람들은 더 그렇다고 느낄지도 모른다. 사실 소설 뒤에 꽤 긴 분량의 작품 해설과 카뮈의 후기를 담은 편지 등이 실려있기 때문에 책의 두께로 소설의 진행 정도를 예상하는 이에게는 갑작스런 결말에 당황스럽기까지 하다.

이른바 `감정 낭비` 이것이 내가 살아옴에 있어 늘 이해하지 못하고 하기 싫어하는 것 중 하나이다. 굳이 나의 감정 표출이 일들의 인과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는다면 그러한 감정은 오히려 나에게 아무런 이득이 없기 때문에 굳이 표출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도리어 내가 그러한 일에 대해 화가 나야할, 슬퍼야할 (`기뻐야할`에 대해서는 다르다 어떤 일에도 기뻐하는 것은 좋은 것이라 생각한다.) 이유 조차 모르는 나의 둔함은 오히려 나 스스로에의 귀중한 축복이라 생각하며 살아왔다. 이 책을 읽으며 뫼르소의 매력에 이끌렸던 것도 이러한 일종의 공감에서 였지 않았나 싶다.


나보다 더 불행한 사람들도 있는 것이다. 사실 이건 엄마의 생각이었는데 엄마는 늘 말하기를, 사람은 무엇에나 결국은 익숙해지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방인 中, 알베르 카뮈

학생 때에는 그런 종류의 야심도 많이 있었다. 그러나 학업을 포기하지 않을 수 없었을 때, 그러한 모든 것이 실제로는 아무런 중요성이 없다는 것을 나는 곧 깨달았던 것이다.
-이방인 中, 알베르 카뮈


뫼르소라는 인물은 철저히 정서적으로 strange한 인물이다. 그의 속내는 누구의 공감도 바라지 않은 채 자신의 방식으로 세상을 살아간다. 그의 삶의 방식에 적잖은 공감을 느끼면서 읽을 수 있어 좋았다. 책을 읽으면서 책의 주인공이 나와 비슷하다면 그것만으로도 책의 매력은 배가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뫼르소는 오히려 그러한 감정적인 백지 상태때문에 다른 인물들과의 몇몇 관계에서 매력을 나타내기도 한다. 이 매력에 끌린 주변인물들을 주의해서 보는 것과 동시에 그것과는 완전히 상반되는 뫼르소의 속내를 읽는 것도 또 하나의 재미 요소였다. 그러면서도 세세한 디테일을 놓치지 않은 재치있는 표현들도 좋았다 (사실 난 이 소설을 꽤나 웃기게 읽었다.)

카뮈가 밝혔듯이 그의 계획된 시리즈 중 이 소설의 테마는 `부정`이라고 한다. 이 소설의 독특한 매력에 갖혀 그의 본의를 제대로 느끼지는 못하였다고 생각되지만. 그는 인간이 다른 인간의 행동을 이해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또 그 행동을 판단하려는 것이 얼마나 부조리한 것인지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우리 모두가 어떤 면에서는 서로의 이방인일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누구나 남들이 이해 못할 `태양` 하나를 가지고 있지 않는가. 그렇다고 결백하지 못한 뫼르소에 대한 동정이 생기지는 않았다. 실제는 그가 방아쇠를 쏘았다는 것이고 불쌍한 아랍인은 그 총격에 죽었으니...

마지막으로 덧붙이자면 2부의 감옥에서의 뫼르소의 심경 묘사와 자아내는 분위기는 가히 압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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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에서는 그 소설이 주는 강력한 메시지나 저자가 의도적으로 담은 저자의 사상을 느낄 수가 있다. 물론 소설이라는 장르의 특성 상 하나의 허구 즉 이야기를 통해서 그것들이 간접적으로 드러날 수 밖에 없다. 이야기 속에 그것들을 숨겨놓는 것이다. 이것이 논문이나 에세이에 대비되는 소설의 매력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우리가 찾아내지 않는 이상 그저 단순한 이야기일 수도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소설은 기본적으로 감성적인 글이기도 하다. 이성으로만 가득찬 이야기는 더 이상 이야기일 수 없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무언가 이상하고 무언가 도저히 내 생각으로는 이해가 되지않는 인물들의 행동과 사건들이 이야기의 한 부분을 차지하여야 한다. 조르바를 읽고 썼던 글에서도 밝혔듯이 아주 특이할 것 없이 일상적이고 논리적인 필연들은 이야기로서의 매력을 잃는 것이다. 우리가 주변 사람들과 나누는 사소한 잡담 속 이야기들도 우리가 이해 못 할, 예상 못 할 일들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즐거운 것이 아닌가.

블라디미르 나로코프의 소설 롤리타에 대한 나의 생각을 씀에 앞서 이렇게 장광설로 시작한 것은 롤리타라는 이야기가 후자 쪽임과 동시에 그렇기 때문에 딱히 느낀점을 길게 설명할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작가가 코멘트 했듯이 나로코프는 이 소설에 그 어떠한 메시지나 사상도 담지 않았다고 한다. 롤리타에서 그저 이야기 그 자체로 재미를 느끼라는 의도로 한 말인 것이다. (이 소설의 소재에 대한 맹렬한 비난를 피하기 위한 자기변호이기도 한 것 같지만서도...)

그렇다면 감상은 매우 단순해진다. 이 소설이 얼마나 재밌는가, 잘 쓰여졌는가에 대한 느낌만 남기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이 소설은 너무나도 뛰어나고 아름다우며 천재적이다. 문체가 엄청나게 대범한데도 불구하고 세심하게 쓰여진 그 어느 글과 비교해도 완성도가 뛰어나고 아름다우며 처절하다. 작가의 천재성이 어느 정도인지 분간이 되지 않을 정도이다. 위트있는 다양한 고전과 현대문학 전반적인 패러디와 언어 유희로 넘치고 리얼리즘의 형식적인 요소들도 뛰어나게 표현하고 있다. 이는 작가의 꼼꼼하고 치밀함이 돋보인다기 보다는 남자답고 시원시원한 여유가 느껴지기까지 하기 때문에 더 대단하게 느껴진다. 문학동네 판의 미주를 하나하나 맞춰보며 읽는 것도 이 소설의 재미를 도와줬다.

그런데도 선뜻 나서지 못한 이유는 어떤 식으로든 섣불리 운명의 흐름을 건드리다가, 즉 운명이 내 손에 쥐여준 환상적인 선물을 정당화하려다가 오히려 선물을 도로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 때문이었다.

-롤리타 中,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그리하여 나는 저물어가는 저녁의 가랑비를 뚫고 달려갔는데, 앞유리 와이퍼가 전속력으로 움직였지만 쏟아지는 내 눈물은 어쩌지 못했다.

-롤리타 中,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에로틱과 로맨스. 그 종이 한 장의 차이가 만들어내는 반전과 안타까움, 그리고 간절하고 처절한 이야기는 너무나 재밌고 아주 깊은 여운을 준다. 단순히 험버트 험버트의 비정상적이고 변태적인 스캔들로 치부하기에는 이 책의 그 이외의 요소들이 너무 아깝다. 그리고 오히려 나는 이런 특이한 소재가 이 책의 여러 요소들의 시너지를 돕는다라고 생각이 들 만큼 나는 나로코프의 매력에 설득되었다.

간만에 정말 재밌게 읽은 여운 진-한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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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인 조르바 니코스 카잔차키스 전집 1
니코스 카잔차키스 지음, 이윤기 옮김 / 열린책들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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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유명한 유수의 소설들은 독특한 인물로부터 시작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평범한 사람의 평범한 일상, 그리고 우연이 포함되지 않은 필연과 논리의 세상은 그 자체로도 따분하고 독자들의 흥미 유발에는 더할 나위 없는 악재인가 보다. 데미안, 안나 카레리나, 마담 보바리, 달과 식스펜스 등등 재밌게 읽었던 소설들의 주인공들을 생각해본다면 이 사실은 더욱 확실해 진다. 독특한 인물의 등장은 어떻게 보면 저자로서 벗어날 수 없는 필수의 재료인 것이다. 여러 책을 읽다보면 이러한 인물들의 독특한 사상과 행동들이 한데 섞여 머리 속에 남으면서 미묘한 클리셰를 만들기 마련이다. 처음 스트릭랜드를 만났을 때의 감명과 충격 그리고 스트릭랜드를 보면서 다졌던 각오는 이제는 다른 인물들을 만날 때의 식상함으로 바뀌었다는 말이다.

조르바는 카잔차키스의 출생과 생애 속에 실존했던 인물이라고 한다. 그는 실제로 광산 사업을 하러 크레타 섬에 갔었으며 그 곳에서 조르바라는 사람을 만났다고 한다. 이 점이 소설의 독특한 식상함을 변호해준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여전히 이 소설은 식상했다.) 자유와 실존을 중요시하는 그에게 조르바가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는 사실은 소설의 서술자의 회고적인 문체와 서술자의 성격과 행동을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짐작할 수 있다.

아무것도 믿지 않아요. 오직 나만 믿지. 내가 딴 것들보다 나아서가 아니오. 나을 거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어요. 나 역시 딴 놈들과 마찬가지로 짐승이오! 그러나 내가 나를 믿는 건? 내가 아는 것 중에서 아직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게 나뿐이기 때문이오.
-그리스인 조르바 中, 니코스 차잔차키스
˝터질 만큼 처넣는 것 이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습니다. 금욕주의 같은 걸로는 안 돼요. 생각해 봐요, 두목. 반쯤 악마가 되지 않고 어떻게 악마를 다룰 수 있겠어요?˝
-그리스인 조르바 中, 니코스 차잔차키스

다시 글의 서두의 이야기로 돌아가면 조르바는 매우 독특한 인물이다. 조르바라는 인물은 그-소설의 서술자. 소설의 저자 혹은 독자로 까지 확장해도 무방할-가 정작 실천하지 못했던, 할 수 없었던 욕망과 사상적인 이상을 나타내는 인물로 그려진다. 우리는 조르바의 괴팍한 사상과 행동에 공감을 하고 몰입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이 소설의 주인공의 행동과 사상에 공감을 하면서 몰입하게 된다. 우리는 결국 조르바가 될 수 없기에 조르바의 행동들에 동경을 보낸다. 진정한 실천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방구석의 한심한 책벌레로서. 이러한 특징이 데미안의 싱클레어와 미묘하게 겹친다. 하지만 조르바는 데미안과 다르게 자신의 고상한 신념보다는 일차원적이고 마쵸적인 본능에만 충실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의 본능과 욕망은 모든 윤리적인, 종교적인 것들을 뛰어넘어 오히려 그것들을 멸시하기까지 한다.

단순히 인물들간의, 크레타 섬의 작은 마을의 차원을 넘어서 그가 목격해왔던 격동의 시기들이 담겨있기 때문에 이 소설을 단순한 조르바의 이야기로 치부할 수는 없을 것이다. 주민들의 시선과 종교적인 편견 때문에 할 수 없는 수많은 행동들을, 보통 사람이라면 고뇌하고 그 실천을 결국 기꺼이 포기해야 했을 그런 행동들을 조르바는 스스럼없이 행한다. 서로에게 강요하는, 어쩌면 인간들끼리 만들어버린 굴레에 우리가 스스로 갖혀버린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을 그는 `자유`라는 단어보다는 `조르바`라는 말로 표현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세계1,2차 대전과 그리스에서의 격동 등을 겪으면서 그는 `정작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하는 의문의 답을 조르바를 통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우리는 우리의 굴레에 의해 진짜 중요한 단순한 것들을 잃어버리고 있는 것이 아닌지 생각하게 해주는 것 같다.

소설은 꽤나 두껍다만 읽고 나면 두꺼운 양 만큼의 생각이나 줄거리가 머리 속에 남아있지는 않았다. 저자가 글을 멋들어지고 아름답게 쓴편도 아니거니와 소설 자체는 매우 평면적이고 어쩌면 따분하고 지루하다고까지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점에서 이 소설이 재밌었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이 점은 저자의 역량 때문인지 아니면 저자가 정말로 실화 그대로를 가져오기 위해 노력을 한 결과인지는 알 수 없기 때문에 개인적인 느낌일 뿐이라고 남겨두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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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 (2004), 알랭 드 보통



원제는 `Status Anxiety`로 지위에 대한 인간이 느끼는 불안감이 주제이다. 인간의 보편적인 모든 불안을 해소하거나 더 잘 알기 위한 해결법을 적은 책은 아니기에 우리나라에서 출간된 책의 제목을 보고 읽었다가 실망할 수도 있겠다 싶기도 했다. 이 책을 최대한 보편적이고 객관적으로 `지위`에 대해 느끼는 인간의 불안을 `분석`한 책이라 보는게 가장 적절할 것 같다.



`우리가 현재의 모습이 아닌 다른 모습일 수도 있다는 느낌.

우리가 동등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우리보다 나은 모습을 보일 때 받는 그 느낌.

이것이야말로 불안의 원천이다.`



-불안 中, 알렝 드 보통



원인, 해법으로 나누어져 있고 파트 별로 확실하게 구분되어져 있어 읽는 이의 생각을 정리하는데에 아주 유용한 구성을 갖추고 있다.



무감정한 담담한 어조.

사견의 최대한의 배제.

좋은 문장들의 연속.



저자의 무덤덤한 한마디 한마디의 호소력이 짙다. 주로 잘 알려진 책들을 끌어와 자신의 논지를 조금씩 조금씩 설명해나가는데 그 과정의 문장들이 매우 좋다. 이 점에서 보편성과 대중성을 고루 잡은 느낌이다. 저자의 모든 논지를 생각해가며 집중해서 읽든, 그냥 재미로 읽든 어떻게 읽든지 간에 쉽게 읽힐 수 있다는 점이 큰 장점인 것 같다. 뭐 이 점이 너무 대중적이고 평범에서 텐션이 떨어진다라고 비판한다고 해도 크게 틀린 느낌은 아닐 것 같지만..



누구에게도 추천할 만한 좋은 책임은 틀림없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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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 (2009), 요나스 요나손


`나의 할아버지는 청중을 휘어잡는 재능이 있으셨다. 코담배 냄새를 물씬 풍기며 지팡이에 몸을 비스듬리 기댄 채 벤치에 앉아 계시던 그분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떠 그분의 손주인 우리가 입을 헤벌리고서 하던 질문도 아직 귀에 생생하다.
《할아버지 ••• 그게 ••• 진짜 정말이에요?》
《진실만을 얘기하는 사람들은 내 이야기를 들을 자격이 없단다》라고 할아버지는 대답하셨다.
이 책을 그분에 바친다.`
-요나스 요나손, 소설 中 머리말

대중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며 높은 판매고를 올렸고 최근엔 영화화까지 된 요나스 요나손의 첫번째 이야기.

100살이라는 주인공의 나이답게 한 세기의 역사와 함께 살아 숨쉰 알란의 유쾌한 에피소드를 담은 책이다. 늘 그렇듯 이런 모험기의 주인공은 유쾌하기 그지없고 뛰어난 기지와 의도치 않은 생존 본능, 엉뚱함으로 세상을 발칵 뒤집으며 전진한다.

상업적으로 큰 성공을 거둔 만큼, 대중성은 이 책의 크나큰 매력이 된다. 짧지 않은 이야기를 요나손의 뛰어난 재담능력으로(아마도 그는 할아버지를 많이 닮았나보다) 뻑뻑하지 않게 채워놓았다. 처음에는 사건의 시간 교차적 배치가 소설을 산만하게 만드는 것이 아닌가 라는 의문이 생겼었지만 이러한 서술 방식때문에 저자는 영리하게도 독자들이 호기심의 끈을 끝까지 유지하게 만든다.

`아론손은 뒤죽박죽 그 자체인 이 사건 가운데서 진실을 찾아내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점점 강해지는 걸 느꼈다. 그냥 이 상태 이대로가 좋았다. 왜냐하면 인생 만사는 그 자체일 뿐이고, 그 자체로 온전하니까.`
-소설 中

주인공의 삶을 쭉 함께 하면서 통쾌하게 웃거나 훈훈한 모습에 공감도 하고 엉뚱하기 그지없는 그의 생활방식에 나의 삶을 돌아보기도 한다. 객관적으로 보면 이해가 되지 않고 몇몇 부분은 측은한 생각까지 들긴 하지만 《진실만을 얘기하는 사람들은 내 이야기를 들을 자격이 없단다》라는 요나손의 할아버지의 멋들어진 대답처럼 나는 그런 것에 사소한 감정들을 꺼낼 필요는 없을 것이다. 말도 안되는 일들에서 재미를 느끼고 유쾌함을 간직하는 것이야 말로 이 이야기를 가장 잘 즐기는 방법이라고 저자는 머리말부터 말하고 있는 것이다. 재밌는 마술을 볼 때 인상 찌푸려가며 나의 모든 의심을 끄집어 낼 필요는 없지 않은가.

그렇다고 해서 `꼭 이 책이어야만 한다`는 이 이야기에 대한 소중함은 적다. 이러한 책은 옛날에도 많았고 현재까지도 비슷한 책은 얼마든지 소개될 수 있다. 하지만 어떤가 진실만을 우리는 이야기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100세 노인 알란 칼손은 늘 씨익 웃으며 어딘가로 가고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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