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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노자의 거미 - 자연에서 배우는 민주주의
박지형 지음 / 이음 / 2019년 8월
평점 :
스피노자의 거미를 읽고
“스피노자는 파격이며, 우리에게는 귀중한 야성적 부정, 즉 부르주아의 억압적인 태생적 질서에 대한 부적이다. 스피노자는 오늘날 현대적인 것을 당연하게도 그가 모든 근대적 사고의 적대자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자연에서 민주주의를 배울 순 없는지를 책 전반에 걸쳐서 묻고, 그에 대한 답을 마련해 나간다. 혹자는 ‘자연’과 인간이 사는 ‘사회’가 비교 혹은 대안을 적용할 수 있는 같은 차원의 공간일 수 있는가라는 의심을 가질 수도 있지만, 사실 철학/사회학을 포함하는 학문은 대개 자연을 통해 인간의 본성이나 인간이 모여 사는 사회의 방향 규정하였다. 저자는 많은 사례, 철학과 사회학의 기본과 역사를 언급하지만, 또한 경제학이야말로 자연에서 ‘근대’ 혹은 ‘근대적 인간’을 차용한 대표적인 학문이다. 저자는 근대의 가정에 반하는 사례가 많지만, 자기 학문의 세부적이고 좁은 관점만으로는 다양하고 총체적인 현실의 위험을 해석하지 못한다(16)고 비판한다.
경제학에서 상정하는 근대적 인간의 특징인 ‘경제적 인간’ 역시 마찬가지다. 경제학은 보통 한정이 있는 자원을 배분하는 과정에서 최대의 이익을 얻고자 하는 개인의 마음(이기심) 때문에 불가피하게 합리적인 계산을 할 수밖에 없는데, 결국 이러한 합리적 인간/경제적 인간/근대적 인간은 경쟁을 통해 자신의 이익을 팽창시켜 나간다. 그러나 저자는 묻는다. 자연을 관찰하면 학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승자독식, 적자생존이 판치는 가혹한 공간이 아니라 그 속에는 다양한 생물 종들이 공존하고 있다. 그런데 왜 인간의 사회에서는 독과점이 만연하며, 나아가 이것이 그저 경쟁에 적응하는 유일한 과정이자 자본주의의 승리자 혹은 수혜자로 기록되고 있는지를 비판적으로 묻고 있다. 경제학이 상정하는 자연은 승자독식이자 적자생존의 논리가 가득하며, 온갖 경쟁이 판치는 엄혹한 세상이다. 이러한 자연관은 자연스럽게 인간 사회에도 적용되었고, 결국 그 속에서 살아가는 개인들은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을 겪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래서 저자는 스피노자가 거미를 관찰한 것처럼. 자연에서는 생존 논리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공존과 공생의 논리가 어떻게 펼쳐지는지를 말한다.
저자는 우리가 생각하는 근대라는 것이 얼마나 작위적이고 오해와 왜곡에 둘러싸여왔는지를 차근차근 분석하는데, 근대는 이성과 진보의 산물이라기보다는 폭력과 공포가 압도한 시기라고 말한다. 특히 이성/합리주의란 사실 그 시대의 이해관계자들을 대변한 것으로서 폭력과 공포가 이성의 이름으로 대체되었다고 강조한다. 또한, 앞에서도 언급한 인간의 본성과 사회의 성격 역시 근대를 거쳐 잘못된 자연관이 형성되었고, 이것은 곧 왜곡과 곡해로 가득한 인간과 사회를 만들었다. 그렇다면 이러한 왜곡은 왜 만들어졌고, 현재까지 진리로 받아들여진 것일까? 그것은 바로 경쟁에 의해 합리화된 독과점은 부정의하고 불평등하고 비합리적인 것이 아니라 자연의 산물, 경쟁의 산물이자 자연스러운 결과로 인정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지배계급 혹은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지고 합리화된 인간과 사회가 사실은 경쟁만이 득시글거리는 자연이 아니며, 이때 그러한 자연조차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인위적 산물이라고 말한다. 자연은 비이성과 비합리가 가득한 공간이자 폭력과 힘의 논리만으로 설명되는 공간으로 알고 있지만, 그곳은 경쟁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저자는 자연에서는 경쟁이 오히려 ‘비합리적인 상황’인데, 왜냐하면 소수의 종들이 차지하여 만들어지는 자연은 곧 없어질 수도 있는 위험을 안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윤리, 도덕의 말보다 비합리적/비논리적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자연에서는 어떠한 과정을 통해서 비합리적인 경쟁상황이 공존, 공생, 상생의 장으로 바뀌는 것일까? 자연은 결코 단일하고 단순한 공간이 아니라 다차원적 공간인데, 독과점이 발생할 위기에 처하면 각 종이 차지하는 시공간, 즉 니치가 분화/변화한다는 것이다. 원래 차지하던 근원적 니치가 적응과정을 통해 실현된 니치로 변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다양한 종이 만들어 낸 ‘복잡한 영양 구성’을 가진 집단이 소수가 독점하는 환경보다 더욱 안정적이기 때문이다. 이때 니치분화는 자원분할/섭식니치를 변화시켜, 같은 공간에서 다양한 종들의 먹이가 겹치지 않도록 만들며, 이를 통해 경쟁보다는 공존과 공생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에 의해 설정된 ‘보이지 않는 손’은 결국 경쟁이 아니라 공존을 만들어낸 것이며, 인간 사회에는 권력과 힘으로 만들어진 ‘보이는 손’이 평형과 합리적인 관계를 깨트리는 것이다. 특히 더 큰 문제는 니치 분화가 이루어지더라도, 사회에서는 권력을 차지한 이들이 다른 이들이 ‘차지 해야 할’ 공간마저 침탈한다는 점이다. 이를 통해 보이는 손을 억제하거나 제재할 제도와 장치들이 인간사회에 필요해진다.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한 자율적 시장/자본주의는 실제로는 보이는 손이며, 이 보이는 손의 폭주를 막을 국가의 개입이 절실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개입은 흔히 ‘복지병’으로 비난/비판받기 일쑤이며, 그러한 개입으로 인한 복지와 지원이 개인의 일 할 의지를 꺾어 결국에는 무능한 인간으로 살아가도록 만든다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는 영국에서 구빈법이 개인의 ‘일 할 권리’를 빼앗기 때문에 폐지해야한다고 주장했던 것과 동일하다.
이 책은 우리가 지금까지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논리, 진리, 진실들이 실제로는 의도를 갖고 만들어지고, 무언가를 합리화/정당화하기 위해 만들어진 비합리적 논리라는 것을 말해준다. 자연을 ‘비합리와 경쟁, 승자독식’의 공간이라고 부르는 자들을 경계하자. 그들이 원하는 것은 그러한 자연관에서 기초한 근대적 산물들이 앞으로도 우리의 삶과 사회를 지배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자연을 보고, 특히 인간을 설명하는 다양한 근대적 설명방식들에 대해서도 고민해봐야 한다. 그런 과정을 통해 보이지 않는 손이 얼마나 노골적으로 우리의 사회에 영향을 끼쳤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