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계에서
김상묵 지음 / 모비딕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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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데렐라의 좌절

소설은 우주로 뻗어나가려는 인류의 끝없는 욕망이 좌절되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좌절된 욕망의 이름은 ‘신데렐라 프로젝트’다. ‘신데렐라’하면 ‘환상’, ‘꿈’, ‘신분 상승’ 같은 개념이 떠오른다. 이 소설에서는 인류가 바로 신데렐라다. 오로지 지구에 목매인 인류는 늘 ‘한계’를 의식하며 살고, 자본과 계급, 그리고 결정적으로 죽음이라는 중력 아래 산다. 그런 인류에게 우주란 ‘유리 구두’ 같은 것이다. 깨어지기 쉽고, 쉽게 손에 넣을 수 없으며, 설사 수중에 들어온다고 해도 신고 오래 걸을 수 없다. 이 상징성 가득하지만 실용성은 일천한 우주에, 인류는 도전한다. 그렇게 중력을 거슬러 우주로 향한 인류는, 지구라는 ‘한계로 가득한 별’을 위에서 조망할 수 있게 된다. 신분 상승을 이루는 것이다.

소설 속 인류는 우주로 향하는 것을 넘어, 스스로 빛 너머의 무엇이 되려 한다. 빛의 속도를 뛰어넘으려는 무모한 시도를 추동하는 것은 미지에 대한 인류의 환상이다. ‘빛 너머에 과연 어떤 세상이 있을까?’, ‘인류는 빛 너머에 존재할 수 있는가?’ 소설 속 인류는 이런 담대한 물음을 결행하는데, 그 결말은 무척 당연하면서도 섬뜩하다. “오, 빛이, 모든 게 빛이 된다!”


갈라파고스의 허무

신데렐라 프로젝트의 처참한 실패로 자신의 한계를 똑똑히 목격한 인류는, 이제 더 이상 신데렐라의 꿈을 꾸지 않는다. 그의 시계는 이미 12시가 넘었음을 분명히 가리키고 있다. 자신의 비참을 목도한 인류는 서둘러 왕자의 성에서 뛰쳐나온다. 그 과정에서 유리 구두는 벗겨졌고, 그는 남루한 자신의 현실을 재차 인식한다. 이제 소설 속 인류는 ‘신데렐라적 전환’의 시대에서 ‘갈라파고스적 전환’의 시대로 이행한다.

한계를 뛰어넘는 일에 한번 대패한 인류는, 더는 한계에 도전하지 않는다. 갈라파고스 시대의 인류는 자신의 실패에 직면하는 대신, 온통 그것을 회피하는 데 열심이다. 그는 이제 신분 상승을 이루려고 하기보다는, 한 신분으로 영영 사는 길을 택한다. ‘환생 시술’이라는 의료 기술을 개발해 끝도 없이 젊은 육체로 갈아타면서 생명을 연장하는 일에만 매달린다. 육체라는 껍데기를 얼마든지 갈아치울 수 있게 된 인류에게 ‘후대 잇기와 삶의 의미 찾기’라는 구시대의 덕목은 아무것도 아니다. 고립된 문명은 점차 쇠락한다.


허깨비의 뿌리 찾기

쇠락한 시대에, 세상을 가득 채운 건 환생 이후 버려진 육신인 '허깨비'들이다. 자기 정체성과 존재감이 없는 이들은 무감과 무기력에 휩싸여 있다. 소설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메밀’(김 수지 다비치 소접시 백이십 종묘 메밀 준)과 ‘칠’(김 수지 다비치 소접시 백이십 종묘 메밀 칠 준)은 각각, 몸을 8번 바꿔치기 한 김준의 여섯 번째, 일곱 번째 육신으로, 50세부터 35년 동안 허깨비로 산 노인이다. 이 두 노인의 팔에는 김준의 환생 기록이 하나하나 새겨져 있다. 허깨비로서는 드물게 전생에 대한 의문을 품은 칠은, 자기 팔에 새겨진 이름의 기원과 그들의 행방을 좇는 여행을 떠난다. 그리고 그는 그 과정에서 메밀을 만나고, 메밀을 설득해 같이 길을 떠난다. 이 허깨비들의 여행은 명목상 ‘이름을 찾는 여행’이지만, 본질적으로는 ‘뿌리를 찾는 여행’이라고 할 수 있다. 허깨비들은 오직 육신만이 이어져 있을 뿐 정신적으로 과거와 단절된 존재다. ‘허깨비’라는 명명과 그 존재에 대한 저자의 설정은, 현대인의 실존에 대한 비유로 읽힌다.


한국 독자 맞춤형 SF의 묘미

저자는 독자에게 익숙한 장소, 공간, 시간에 두 허깨비를 던져 놓는다. 이 허깨비 둘은 ‘까치산시장’과 ‘종로’와 ‘종묘’와 ‘동대입구역’과 ‘청라지구’를 전전한다. 이런 친근한 지명 덕에 독자는 소설에 등장하는 장소를 생생하게 상상할 수 있고, 명확한 지리적 이미지를 가지고 내용을 전개할 수 있다.

이 로드무비 활극의 끝에 허깨비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하다면 책을 끝까지 읽어야 한다. 이야기는 큰 알레고리 안에서 점진적으로 상승했다가 하강한다. 이 온건한 전개를 따라 찬찬히 걸으며 저자의 세계관에 집중하다 보면, 독자 자신의 ‘허깨비’성을 깨닫는 경험도 하게 될 것이다. ‘그늘’, ‘포말’, ‘일식’, ‘소리’ 같은 예쁜 우리 단어를 곱씹게 되는 것은 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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