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혜석의 말 - 남성 중심 사회에 맞선 불꽃 인생
나혜석 지음, 조일동 옮김 / 이다북스 / 2020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초등학교 시절 새 학년이 될 때마다 장래희망을 발표하는 일은 매년 계속되었다. 앉은 순서대로 각자 적성에 맞는 직업을 말하다 보면 어느새 내 차례가 되었고 늘 비슷한 직업군을 말하면서도 괜스레 부끄러워 얼굴을 붉혔다. 성적이 좋은 아이들보다 더 거창한 건 아닌지 꿈마저도 비교하던 시절이었다. 내 발표가 끝나고 다음 순서였던 친구는 반에서 항상 1,2등을 하는 친구였다. 다들 기대하는 눈빛으로 친구를 바라봤고 친구의 입에서 한마디가 흘러나오자 교실은 술렁이기 시작했다.

원어민만큼 영어를 잘했던 친구라 외교관이나 통역사가 될 거라 예상했지만 친구는 아무도 되지 않을 거라고 말했다. 대신 꼭 되고 싶은 게 있다면 현모양처라고 선언했다. 이 말을 들은 선생님은 실망을 감추지 못한 표정으로 그건 누구나 될 수 있는 거니까 하고 싶은 일에 대해서 다시 이야기해보라고 했다. 하지만 친구의 다음 대답이 더 충격이었다. "아무나 엄마는 될 수 있어도 현모양처는 될 수 없어요." 선생님은 그 말 뒤에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다.

이 오래된 기억을 떠올릴 때마다 나도 현모양처로 살고 있는지 점검하게 된다. 현명한 어머니와 착한 아내라는 뜻을 가졌기에 그에 맞게 사는 것이 좋은 사람이 되는 길이라 생각해왔다. 물론 좋은 의미를 가졌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남성과 여성의 성별 역할을 분리시키는 말이기도 하다. 남성의 입장에 대입시킬 현부양부라는 개념은 들어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남자도 아버지이자 남편인데 여성처럼 현모양처가 되어야 한다는 교육을 받지 않는다.

현모양처의 의미를 뜯어볼수록 아쉬운 점을 발견하게 된다. 여성의 관점에서 생겨난 말은 아니라는 느낌이 강하게 느껴지고, 현모양처라는 굴레 안에서 모든 여성을 평가하는 건 아닌지 되묻고 싶어진다. 자녀를 양육하는 어머니가 현명하고 어진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어리석고 성품이 바르지 못하다면 자녀 교육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기 쉽다. 그러나 지혜롭고 지식을 겸비하는 일은 어머니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한 사람으로서 당당히 자신의 생을 살아가기 위한 과업이다. 어머니나 여성이기 이전에 사람이므로 자신을 갈고닦는 것이다.

더 생각해봐야 할 것은 착한 아내라는 말이다. 착하다는 뜻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양처에서 말하는 착함이란 남편의 말에 무조건 순종하는 걸 뜻한다. 사랑으로 인연을 맺은 부부 사이는 처음부터 끝까지 동등해야 옳을진데, 한 쪽인 여성에게만 온량 유순해야 한다는 잣대를 들이미는 게 이해하기 어렵다. 지금이야 결혼이 선택사항이 된 시대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여성의 조혼은 당연한 일이었다. 어린 여성을 노예처럼 길들이기 위해 현모양처가 되어야 한다고 교육한게 아닌지 의문을 갖게 된다.

                                                      

시대착오적인 교육 이념이 된 현모양처에 대해 반론을 제기하는 게 지금은 대수롭지 않은 일이어도 100년 전에는 그렇지 못했다. 이것을 문제 삼았던 여성은 반역자이자 이단아로 여겨졌다.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나혜석'이다. 나혜석은 "여자도 사람이외다"라는 발언으로 화제를 모았다. 지금 같으면 당연한 말이 그 시대에는 해방운동만큼 파격적인 것이었다. 당시에는 여성이 주체적이고 독립적인 존재라는 의식이 통하지 않았다.

우리 조선 여자도 인제는 그만

사람같이 좀 돼 봐야만 할 것 아니오?

미국 여자는 이성과 철학으로

여자다운 여자요,

프랑스 여자는 과학과 예술로

여자다운 여자요,

독일 여자는 용기와 노동으로

여자다운 여자요.

그런데 우리는 인제서야 겨우

여자다운 여자의 제일보를 밟는다 하면

이 너무 늦지 않소?

우리의 비운은 너무 참혹하오 그려

P.24

나혜석은 여성 최초의 서양화가이자 작가였다. 그리고 근대적 여권론을 펼친 운동가였다. 그녀를 따라다니는 수식어인 신여성은 시대와 부조화를 이뤘다. 조혼을 강요하는 아버지의 뜻에 맞서 여성이기 전에 인간임을 말하는 소설 "경희"를 발표하면서 화제가 되었다. 결혼 후 네 아이의 어머니로 살면서도 그림을 그리고 글 쓰는 일을 놓지 않았다. 아이를 낳고 기르며 "모 (母) 된 감상기를 썼는데 여성만이 할 수 있는 고유의 경험을 처음으로 공론화함으로써 사회적 파문을 일으켰다.

이어 결혼 생활을 정리하고 "이혼 고백서"를 발표하면서 조선 사회의 가부장제와 여성에게만 강조되는 정조관념에 저항했으나 가정과 사회로부터 배척당했다. 당시로써는 이혼 당한 여성이 그 어느 곳에서도 자리 잡을 수 없었고 그림이 불타버리는 사건도 겪어야 했다. 사회로부터 외면당하고 아이들을 만나지 못하는 슬픔에 심신이 쇠약해진 나혜석은 끝내 어느 겨울 행려병인으로 죽음을 맞이했다.

그녀는 조선의 여성들을 향해 욕심을 가지라고 힘주어 말했다. 첫째, 사람이 될 욕심을 가져야 한다. 남존여비의 사상을 버리고 남녀동권, 남녀평등으로 진화해야 한다. 둘째, 자기 소유를 만들려는 욕심을 가져야 한다. 배우는 학문을 자신의 소유로 만들 줄 알아야 한다. 셋째, 활동할 욕심을 가져야 한다. 욕심을 내지 않으면 자손들에게 줄 것이 없으며 비난받지 않으면 역사를 무엇으로도 꾸밀 수 없다.

여성이기 이전에 한 인간으로서 깨어있기를 바랐던 그녀는 예술과 인생이 무엇인지, 조선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하고 조선 여성은 어찌 살아야 하는지 결코 다른 사람과 사회에 묻지 않고 스스로 생각하고 결정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세상이 많이 변했다고 하지만 100년이 지난 지금도 여자다움이 강요되는 사회적 분위기는 여전히 존재하며 여성이기 때문에 겪어야 하는 고충이 남아있다. 나혜석이 말했던 것처럼 여성으로 살기 위해 사는 것이 되지 말고, 여성으로 사는 것이 유쾌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해봐야 하지 않을까.

https://blog.naver.com/dramapearl/2220863257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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