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스테리아 문학과지성 시인선 454
김이듬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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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의 본능 찾기, 본능의 자유 찾기

    -김이듬의 "히스테리아"

 

 

다라다라

 

 

갈 때까지 가 본다. 김이듬 시집의 시를 모두 읽고 나서 든 생각이며 느낌이다. 웃음 속에서 나는 눈물과 슬픔 속에서 피어나는 웃음이 있다. 울리거나 웃기는 시들이 가득하다. 이것은 동양의 고전적 시론의 입장에서 성공이다. 시를 보고 웃었으니, 시를 보고 울었으니 시의 효용에 값한 것이다. 김이듬의 시를 읽으면 자유, 자유, 하는 소리가 들린다. 자유로 가는 길은 일상 속에서 드러나 시인의 본능적 대응에서 대부분 드러난다. 드러남의 속성은 쾌감을 동반하고 있다. 신선한 환기가 일어나며 새로운 향기다, 라는 동의가 든다.

 

 

 

아 어쩐다, 다른 게 나왔으니, 주문한 음식보다 비싼 게 나왔으니, 아 어쩐다, 짜장면 시켰는데 삼선짜장면이 나왔으니, 이봐요, 그냥 짜장면 시켰는데요, 아뇨, 손님이 삼선짜장면이라고 말했잖아요, 아 어쩐다, 주인을 불러 바꿔달라고 할까, 아 어쩐다, 그러면 이 종업원이 꾸지람 듣겠지, 어쩌면 급료에서 삼선짜장면 값만큼 깎이겠지, 급기야 쫓겨날지도 몰라, 아아 어쩐다, 미안하다고 하면 이대로 먹을 텐데, 단무지도 갖다 주지 않고, 아아 사과하면 괜찮다고 할 텐데, 아아 미안하다 말해서 용서받기는커녕 몽땅 뒤집어쓴 적 있는 나로서는, 아아, 아아, 싸우기 귀찮아서 잘못했다고 말하고는 제거되고 추방된 나로서는, 아아 어쩐다, 쟤 입장을 모르는 바 아니고, 그래 내가 잘못 발음했을지 몰라, 아아 어쩐다, 전복도 다진 야채도 싫은데

- 「사과 없어요」 전문

 

 

 

 

시인은 왜 사소한 것에 목숨을 거는 걸까? 왜 목숨을 걸고 사소한 것을 거대한 문제로 환원하려할까? 그 목숨은 시와 바꾼 시인의 시공간이다. 시인의 그 재능의 근원은 어디에서 올까? 언어에 대한 통찰력일까! 이런 질문과 답을 하면서 우리는 사과가 없는 한 편의 장면을 보여준다. 말은 소통의 수단도 되지만 시인에게는 제거와 추방의 원인이기도 했다. 말은 두려운 존재다. ‘내가 잘못 발음했을지’도 모른다고 주문을 걸고 있다. 타자의 고집은 나의 불행인데 그 불행을 시인은 모두 짊어지려하는 순간에 있다. 사과는 없었다. 문든 에덴의 선악과였던 사과가 생각난다. 에덴에 사과가 없었다면 어땠을까 생각한다. 제거와 추방이 없는 성경을 만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발음 때문에 안절부절 하는 시간을 싹둑 자를 모의가 보인다.

 

 

 

 

진주에 기생이 많았다고 해도 / 우리 집안에는 그런 여자 없었다 한다 / 지리산 자락 아래 진주 기생이 이 나라 가장 오랜 기상 역사를 갖고 있다지만 / 우리 집안에 열녀는 있어도 기생은 없었단다 / 백정이나 노비, 상인 출신도 없는 사대부 선비 집안이었다며 아버지는 족보를 외우신다 / 낮에 우리는 촉석루 앞마당에서 진주교방굿거리 춤을 보고 있었다 / 색한삼 양손에 끼고 버선발로 검무를 추는 여자와 눈이 맞았다 // 집안 조상 중에 기생 하나 없었다는 게 이상하다 / 창가에 달 오르면 부푼 가슴으로 가야금을 뜯던 관비 고모도 없고 / ... / 국란 때마다 나라 구한 조상은 있어도 기생으로 팔려 간 딸 하나 없었다는 말은 진짜 쓸쓸하다 // 내 마음의 기생은 어디서 왔는가 / 오늘 밤 강가에 머물며 영감(靈感)을 뫼실까 하는 심정은 / 영혼이라도 팔아 시 한 줄 얻고 싶은 이 퇴폐를 어찌할까 / 밤마다 칼춤을 추는 나의 유흥은 어느 별에 박힌 유전자인가 / 나는 사채 이자에 묶인 육체파 창녀하고 다를 바 없다 // 나는 기생이다 위독한 어머니를 위해 팔려 간 소녀가 아니다 자발적으로 음란하고 방탕한 감정 창녀다 자다 일어나 하는 기분으로 토하고 마시고 다시 하는 기분으로 헝클어진 머리칼을 흔들며 엉망진창 여럿이 분위기를 살리는 기분으로 뭔가를 쓴다 // 다시 나는 진주 남강가를 걷는다 유등 축제가 열리는 밤마다 취객이 말을 거는 야시장 강변이다 다국적의 등불이 강물 위를 떠가고 떠내려가다 엉망진창 걸려 있고 쏟아져 나온 사람들의 더러운 입김으로 시골 장터는 불야성이다 // ... // 눈앞에서 마귀가 바지를 내리고 / 빨면 시 한 줄 주지 / 악마라도 빨고 또 빨고, 계속해서 빨 심정이 된다 / 자다가 일어나 밖으로 나와 절박하지 않게 치욕적인 감정도 없이 / 커다란 펜을 문 채 나는 빤다 시가 쏟아질 때까지 / 나는 감정 갈보, 시인이라고 소개할 때면 창녀라고 자백하는 기분이다 조상 중에 자신을 파는 사람은 없었다 ‘너처럼 나쁜 피가 없었다’고 아버지는 말씀하셨다 / 펜을 불끈 쥔 채 부르르 떨었다 / 나는 지금 지방 축제가 한창인 달밤에 늙은 천기(賤技)가 되어 양손에 칼을 들고 춤춘다

- 「시골 창녀」부분

 

 

 

 

결론부터 말하면 시인은 기생도 아니고, 창녀도 아니다. 시인은 시인이다. 이 단순명제가 결론이다. 시인은 시인이다, 라는 명제가 싱겁고 단순하다 보니, 시인을 여러 상황 속에 던져서 시인이 생각하고 꿈꾸는 현실의 새로운 시인을 다시 창조하는 것이다. 이 시는 그 창조되는 시인에 관한 시다. 영혼을 팔아 시를 산다는 것은 과장이다. 영혼의 실체부터 따지자면 끝이 없으나 시인의 ‘감정 갈보’라는 자기 확인은 자극적이며 적극적이다. 이는 자신의 집안 내력과는 다른 길을 시인이 걷고 있다는 고백이다. 자기 파괴적인 ‘나쁜 피’에 다다르면 시인은 시공을 초월하여 칼춤을 추는 장면 속으로 흡수 되니, 이 시는 타임머신에 타고 있음이 분명하다.

 

 

 

 

요가원에 등록했다 인도에서 수련하고 온 선생은 정갈한 수도승 같은 인상이다 옴 샨티 낮고도 맑은 목소리가 좋다 눈을 감고 마음을 바라보라고 한다 그럴 때마다 내겐 갖가지 생각이 떠오른다고 하자 차차 잡념을 버리게 될 거라며 웃는다 웃는 미간 사이에서 밝은 빛이 퍼져가는 듯하다

 

 

 

며칠 후 지하철 역에서 선생을 봤다 감색 요가복 대신 가죽점퍼에 청바지, 상투처럼 묶었던 머리칼을 풀어 내리고 있다 무언가에 짜증 난 표정이다 그저 그렇다 평범하고 너무나 평범한 행인이다 화장이 진해서인지 그 빛나던 밝은 빛이 보이지 않는다 나는 그녀가 더 좋아진다

 

- 「잡스러워도 괜찮아」 부분

 

 

 

 

여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가면 성속일여(聖俗一如)가 될 것이다. 이 시는 성속일여의 다른 버전이다. 요가 선생의 ‘정갈한 인상’도 좋고, 지하철역에서 본 ‘평범한 행인’은 더 좋다. 상대적으로 제목인 ‘잡스러워도 괜찮아’와 ‘그녀가 더 좋아진다’ 사이에는 서술적 차이는 분명하지만 시 속에서는 동일한 의미로 쓰인다. 많은 시를 읽으면서 늘 확인하는 부분이지만, 시인은 논리와 거리가 먼 존재라는 점이다. 시인은 본능과 분위기 그리고 자유와 감성에 가까운 존재다. 그래서 이성은 쫓겨나며 논리는 파괴되고 법망이 만들어 놓은 족쇄와 수갑은 풀리며 딱딱한 가슴은 녹는 것이다. 이것이 시의 효용이며, 기능이다. ‘잡스러워도 괜찮’은 너그러운 마음이 시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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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도 없이 개미귀신 창비시선 377
최금진 지음 / 창비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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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초에의 향수

- 최금진의 "사랑도 없이 개미귀신"

 

 

다라다라

 

 

 

 

  태초부터 인간을 따라다닌 내면의 실체가 있었다. 그것을 최근에 와서 원형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집단 무의식으로도 명명 되는 이것은 첨단문명 속을 쾌속으로 달리며 살고 있는 현대인들에게도 여지없이 드러나 열광의 현장에서 인류가 포장도로보다 흙길을 많이 걸었다는 것을 증명하곤 한다. 최금진 시인의 이번 시집의 시편들 속을 관통하는 하나의 중요한 의식은 일상인의 자기 통찰이다. 그 통찰의 빛은 고독이다. 그 통찰의 내용물을 자발적 소외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체적 시인의 당당한 홀로살기를 목격하는 행운을 얻는 것이다.

 

 

 

 

인류가 아프리카에서 비롯되었다는 이십만년 전에

나는 원숭이 비슷한 우리 할아버지 고환에 담겨

말하는 꽃도 보고 텔레파시 하는 뱀도 보고

움막에서 어멈들이 어, 하면 아범들은 아, 하면서

낮이고 밤이고 인류를 길어올려 흘려보냈겠지

내 본향이 아프리카라 생각하니

평소 안 좋아하는 파프리카도

적도에 걸린 생소한 탄자니아, 소말리아도 예뻐 보인다

나는 얼마나 멀리 흘러온 건가

얼굴 시커먼 우리 할아버지는 긴 막대기랑 돌덩이 서너개 들고

얼마나 오래 걸어 전라남도 화순에 와서 화순 최씨가 되었던 걸까

내 이름은 스와힐리어로는 뭐라 할까

우리는 형제니까

아동복지기금도 내고 기아 난민도 돕고

아프리카에 호적을 두었으니

나도 늙으면 아프리카에 가고 싶다

어쩌면 신께서 철조망을 쳐놓은 성경의 에덴이 있을지도 모른다

이십만년도 더 먹은 우리 할머니가

축 늘어진 가슴을 출렁이며 날 알아보고는

나를 무릎에다 눕히고 자장가를 불러주실까

이 세상에 없는 새의 언어로, 나무의 모국어로

아프리카, 아프리카, 너무 늙은 나를 안고 안타까워해주실까

 

 

- 「아프리카에 가고 싶다」 전문

 

 

 

 

 

이 시는 원형적 상상력이 빚어낸 일상의 변용이다. 그 방법은 현실적이고 그 내용은 유쾌하다. 인류의 시초가 살았다는 아프리카에 대한 향수는 단순한 이국취향의 향수가 아니다.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관심이다. 우리는 시인이 과연 아프리카에 갈까? 혹은 갈 수 있을까를 생각하기 전에 드러난 이 시를 만난다. 아프리카에 가고 싶은 시인의 마음을 먼저 만나는 것이다. 그리고 시인이 아프리카에 가든 말든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님을 알아차린다. 시는 시로서 실천된다. 시는 아프리카 여행 계획표가 아니다. 시 속의 아프리카는 아주 달콤하고, 낭만적으로 읽힌다. 그것은 시인이 아프리카를 사랑하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는 토굴이었고, 손바닥엔 언제나 더러운 때가 끼어있었다 / 이사를 다닐 때마다 친구들의 당돌한 악수가 무서웠다 / 학교에선 숙제를 안해온 벌로 손바닥을 맞고 / 아이들은 입을 가리고 웃는 나를 계집애라고 놀렸다 / 그 손이 늙은 것이다 / 쩌릿쩌릿 경련도 오고, 각질이 때처럼 일어난 손이 / 남에게 싹싹 빌던, 터져나오는 울음을 막기 위해 입을 가리던 / 내 손이 누워 나를 쓰다듬는다 / ... / 이 손으로 남은 생애 동안 밥이나 퍼먹다 갈 것이다 / 손 위에 바지랑대처럼 근심을 괴어놓고 / 바람 좋은 날엔 어머니의 헐렁한 속옷이라도 널어야 한다 / 남은 게 고작 손 하나뿐이라는 걸 알았을 때 / 손은 슬며시 반대편 손을 잡아 가슴팍 위에 얌전히 올려놓았다 / 처음부터 이런 순간을 알고 있었다는 듯 / 심장이 뛰는 소리, 보일러 도는 소리, 창밖엔 눈이 내리고 / 눈을 감으면 어둠이 사분사분 속삭이는 소리, 나야, 나, 나야 - 「나의 손」 부분

 

 

 

 

손만 남았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그 다음은 어둠이 속삭이는 소리가 들린다. ‘남은 생애 동안에 밥이나 퍼먹다가 갈’ 수 있는 것은 손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과거는 토굴이었’다는 진술을 주목한다. 시인의 가까운 과거도 토굴이었다. 토굴은 흙을 파서 만든 굴이 아닌가? 원시의 시퍼런 본능만이 존재한 곳이 토굴이다. 그곳에는 처벌과 희롱만이 존재하므로 고통스러운 곳이다. 하지만 그것을 지나오면서 남은 손을 격려하고 또 손에게 위로를 받는 것이다. 손은 타자에게서 고통을 받는 대상이지만 스스로를 위로하고 치료하는 주체이기도 하다.

 

 

 

 

밥을 먹을 때, 어머니와 마주 앉지 않는다

아이들 생활이며, 왜 신발을 꺾어 신는지를 묻지 않는다

식사를 다 하면, 설거지통에 수저와 그릇을 갖다놓고

내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아걸면

이상하고 불행하고 조금은 행복한 나라가 깃든다

어제 나는 목검 3종 세트를 기어이 샀다

나는 애완견을 씻기지도, 먹이를 주지도, 때리지도 않는다

쓰다듬지도, 눈빛을 주지도 않는다, 그냥 맘대로 짖다가 죽을 권리가 있지 않은가

식구들이 TV를 보며 웃는 소리 속에 잠깐씩 내 헛기침이 끼어들고

누가 볼륨을 줄이고, 또 웃고, 또 조용해지고, 그러다간 마침내

각자 제 할 일을 찾아 뿔뿔이 흩어지는 이상하고 불행한 평화를 위해

나는 조금은 떨어져서 살아야 하는 걸까

밤중에 거실에 나가 서 있으면, 잠들지 않은 개가 나를 바라본다

개는 나를 안다, 나를 가장 많이 알고 있다

목검 3종 세트를 홈쇼핑에서 구입했지만

아무도 내게 이유를 묻지 않는다

가장은 스스로 결정하고, 스스로 물러나고, 스스로 도태된다

비가 새는지, 수도꼭지가 부러졌는지, 형광등이 나갔는지

이 조용하고 지루한 평화를 보수하기 위해선 서로 말을 아껴야 한다

개에게 저녁밥을 한차례 더 주고, 나는 팬티 바람으로 거실에 서서

목검을 휘두르며

어떤 죽은 사람의 얼굴을 떠올렸다, 두려움이라도 있으면 좋겠지만

아이들은 벌써 훌쩍 다 크고

나는 어머니와는 절대 밥을 함께 먹지 않는다

 

 

 

-「목검 3종 세트를 샀다」 전문

 

 

 

 

 

어머니에 대한 거부와 그 밖의 것들에 대한 자유 혹은 무관심은 대조적이다. 왜 어머니와 밥을 같이 먹지 않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없지만 우리에게 묵직한 느낌 하나를 던진다. 그러면서 도덕적 진실들이 머리를 쳐든다. 왜 어머니를 거부하지? 어머니는 아들의 존재 이유인데? 하지만 시인은 끝내 입을 다물고 다른 이야기들로 시를 채운다. 아이와 애완견과 식구들로부터 시인은 소외되어 있다. 아니다. 시인이 스스로 그들을 놓아줌으로 그들과의 거리를 만들고 그것에서 고독하고 우울한 작은 행복을 만들기도 하지만 그 행복은 미완이다. 애완견에게 먹이를 주지 않는다는 심정은 다음에 와서 개에게 저녁밥을 한 차례 더 주는 현실로 변환한다. 모순이며 진실이다. 「아이의 기차놀이를 보며」라는 시에서 시인은 ‘유희 속에 제 생각을 섞어서 말하는 법을 배운다’고 하였다. 최금진 시인이 시를 쓰는 수사의 방법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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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동네 병원에는 바다가 있다 - 달동네 외과의사의 가슴 따뜻한 이야기
최충언 지음 / 책으로여는세상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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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불편한 진실

책장을 덮으니 가슴이 먹먹하다. 책을 읽는 내내 마음이 불편하였다. 그 불편한 마음은 책 때문이 아니라 나를 돌아보는 불편이었다. 나는 현실 현장에 서 있은 적이 별로 없고, 그것을 내가 살아가는 한 방법으로 삼고 있다. 현실은 그것이 아름다운 속성을 가지고 있어도 결국 부조리하다는 게 삶을 살아오면서 내가 간파한 논리였다. 그러나 이 책은 논리 이전에 있는 삶을 보여주는데 처음부터 끝장까지를 할애하고 있다. 삶의 팍팍함을 여과 없이 드러내고 있다. 피 냄새, 똥 냄새, 고름 냄새, 우리가 불쾌감이라고 규정지어진 모든 냄새가 풍긴다. 그 곳에서 한 외과의사가 사람을 살리고 혹은 죽음을 바라본다. 지극히 담담하게 그리고 인정 속에서 감정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 나를 향한 불편한 마음은 나의 양심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였다. 물질적으로 부유한 사람, 정신적으로 핍진한 사람이 읽으면 다가오는 목소리가 있을 것이다. 나를 우울하게 만든 이 책은 황홀한 궁핍과 생명을 향한 애정을 동시에 소리 높여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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