헐버트의 꿈 조선은 피어나리! - 고종의 밀사 헐버트의 한국 사랑 대서사시
김동진 지음 / 참좋은친구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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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89일은 호머.B.헐버트 박사의 70주기가 되는 날이었고 이날 오전 서울특별시 마포구 합정동 양화진에 있는 외국인 선교사 묘원 내의 100주년 선교기념관에서 추모식이 열렸다고 한다. 그 당시 얼핏 관련 기사를 본 것 같기도 하다. 헐버트 박사라고 하면 학창시절에 언더우드나 아펜젤러 같은 미국의 선교사들이 우리나라에 와서 교육과 선교활동을 하였다는 정도의 피상적이고 상식적인 내용만을 알고 있었지 구체적으로 어떤 활동을 했는지는 솔직히 기억이 나질 않는다. 우연히 접한 헐버트의 꿈 조선은 피어나리!를 읽어가면서 단순하게 그가 선교사로서의 활동만을 한 것이 아니고 우리 민족의 독립과 우리 민족의 정신과 문화를 세계에 알리고자 한평생을 바친 선각자이자 독립운동가였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면서 가슴 속에서 미안함과 존경심이 함께 복합적으로 일어남을 느꼈다. JP모건체이스은행 한국회장을 역임하셨던 김동진 회장께서 대학시절 헐버트 박사의 대한제국의 종말을 읽고 감동을 받아 헐버트 박사를 연구하면서 시작된 이 사업은 관련 자료를 찾기 위해 박사의 모교인 다트머스대학, 컬럼비아 대학, 버클리 대학, 유니언 신학대학 등 대학과 연구기관을 방문하고 런던의 고서점가와 뉴욕타임스100년 전 신문기사 등을 훑기도 하며 헐버트 박사의 후손들을 한 분 한 분 찾아뵙고 그와 관련된 유품과 역사자료들을 모아 1999년 헐버트 박사 기념 사업회를 발족하여 매년 추모식을 거행하고 박사님의 후손들을 초청하고 학술회의를 개최하는 등 다양한 기념사업을 하고 있으며 2010파란눈의 한국혼 헐버트2016헐버트 조선의 혼을 깨우다에 이어 헐버트의 꿈 조선은 피어나리!를 출간하기에 이르렀다.

 

    7부로 구성된 이 책은 188654, 뉴욕을 출발하여 샌프란시스코를 거쳐 소형 증기선으로 태평양을 건너 610일에 일본 요코하마를 경유하여 출발한 지 두 달 만인 75일 아침에 제물포 항구에 도착하는 것으로 운명적인 조선과의 만남이 시작된다. 그가 일제의 박해로 19077월에 조선을 떠나 미국으로 돌아가기까지 우리나라와 민족을 위해 목숨을 걸고 활동한 이력과 그리고 그 이후 미국에서의 38년 동안의 독립운동 과정을 살펴보면 뤼순감옥에서 안중근 의사가 한국인이라면 헐버트를 하루도 잊어서는 아니 되오!”라는 말씀에 충분히 공감하고도 남을 것이다. 조선인이 세운 최초의 근대식 학교인 육영공원(育英公院)영재를 기르는 학교라는 뜻인데 조선과 미국이 협력한 최초의 개화사업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고 교사로 온 헐버트와 벙커 그리고 길모어 세 사람은 조선에 온 지 10일 만에 교과 과목과 수업 일정 등 학교운영에 관한 기본 원칙을 만들어 고종의 재가를 받고 이에 조정에서는 18개조로 이루어진 육영공원설학절목(育英公院設學節目)’이라는 이름의 조선 최초의 신식학제를 발표하였다. 헐버트 박사는 학생들을 잘 가르치기 위해서는 자신이 조선어 공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열정적이고 창의적인 방식으로 공부하여 조선에 온 지 두 달여 만에 입학식에서 서투르지만 조선말을 구사하고, 5개월 만에 조선말을 섞어 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1년째 될 즈음에는 조선말로 상당한 수준의 강의를 할 수 있게 되었고 2년째 되던 무렵에는 조선어 동사 일람표를 만들기도 하였다. 그는 조선에는 학생뿐만 아니라 일반인도 제대로 볼 책이 없다는 점을 안타까워해서 자신이 직접 서양에서 가르치는 근대 서적을 출판하겠다는 결심을 하고 조선에 온 지 4년 반 만인 18911월에 선비, 백성 모두가 반드시 알아야 할 지식이라는 의미의 170쪽의 사민필지(士民必知)를 순한글로 출간하였다. 이는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 교과서로서 천문, 지리, 각 나라의 정부형태, 사회제도, 풍속, 산업, 교육, 군사력 등을 담은 유용한 책이다. 그는 한글에 매료되어 1892년에 이어 18966, 조선글자(The Korean Alphabet)를 조선 최초의 월간지인 조선소식에 발표하여 한글의 문자적 우수성과 세종의 위대함을 설파하고, 헐버트 자신이 창간한 한국평론1903, 2회에 걸쳐 훈민정음(The Hun-min Chong-eum)을 발표하였다. 이 글은 훈민정음에 관한 근대적 의미의 최초의 언어학적 고찰로서 한글 자모를 일일이 분석하고 영어 자모와 비교하였다. 헐버트는 한글의 우수성을 설파하는데 그치지 않고 한글 맞춤법의 중요성을 강조하여 지석영, 주시경 선생 등과도 깊은 교류를 가지게 된다. 헐버트 박사의 관심사는 역사와 언어뿐만 아니라 설화, 속담, , 소설, 음악, 예술, 풍속 등 다양한 분야로 확장되어 한국의 설화를 국제 학술회의에 소개 하고, 한국 속담 123개를 조선소식한국평론을 통해 발표하기도 하였으며, 우리 민족의 한과 희망이 담겨있는 아리랑에 최초로 음계를 붙이기도 하였다. 세계박람회에 출품하기 위해 역사상 최초로 거북선 모형을 제작하고, 금속활자를 뉴욕 자연사 박물관에 전시를 위탁한 것도 바로 그였다. 헐버트의 집념 어린 역사 탐구는 단군 시대부터 조선 고종 시대까지를 체계적으로 기술한 우리나라 최초의 온전한 역사서로 평가받는 한국사(The History of Korea)라는 명저 탄생으로 이어진다. 1905년에 두 권으로 출간된 한국사 800쪽이 넘는 360,000개의 단어로 쓰인 초대형 한국 역사책으로 근대 역사학의 출발점이자 자주적 역사 기술의 효시로 인정받고 있다. 헐버트는 한국사에 이어 1906년에 한민족의 특성, 역사, 문화, 산업, 사회제도, 생활상을 집대성하고 을사늑약에 대한 분노를 눈물겹게 표출한 대한제국의 종말(The Passing of Korea)을 뉴욕과 런던에서 동시에 출간하였는데 이는 한민족의 역사와 문화를 세계에 알리고, 을사늑약의 억울함을 국제사회에 호소하기 위해서였다. 아울러 그는 한국인들은 미개해서 자치능력이 없다고 국제적으로 떠들고 다니는 일본인들의 멸시를 상쇄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르기 위해서 교육을 통해 일본을 따라잡고 빼앗긴 주권을 되찾기를 희망하였다.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 신문인 독립신문의 탄생에 기여하고, 국내외 각종 강연이나 언론 기고문을 통해 한국의 독립을 국제 사회에 호소하였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19058, 일본의 대한제국 지배를 영국이 양해한다는 제2차 영일동맹을 체결하자 주권상실의 심각한 위협을 느낀 고종은 비밀을 지킬 수 있고 대한제국이 처한 현실과 일본의 부당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헐버트를 통해 고종의 친서를 미국의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 대통령에게 전달하여 일제의 침략야욕을 막아줄 것을 호소하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도움을 요청한 서울 주재 미국 공사 모건(Edwin V. Morgan)이 헐버트의 미국행 비밀을 일본에 흘리고 일본은 헐버트의 미국행을 알고서 을사늑약 처리를 서두르게 되었으며, 가쓰라-태프트 밀약으로 이미 미국과 일본간에는 미국의 필리핀 통치와 한국의 보호통치에 합의를 한 상황인지라 미국의 백악관과 국무부의 냉대는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힘의 논리만이 통하는 국제정세의 비정함이 느껴지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아이러니하게도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은 세계평화에 기여한 공로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하게 된다. 고종 황제가 헐버트를 특사로 미국에 보내 을사늑약을 저지해 보겠다는 계획은 루스벨트 대통령의 제국주의적 사고로 볼 때 처음부터 가능하지 않은 일이었는지 모르지만 국내에 친일파 대신들이 득시글대는 상황에서 고종 황제의 강력한 주권 수호 의지를 보여 주었고 을사늑약이 국제법적으로 무효임을 뒷받침하는 역사적 근거를 남겼다는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볼 수 있다. 헐버트도 자신의 특사역할은 성공하지 못하였으나 적어도 고종 황제가 대한제국의 주권을 지키기 위해 끝까지 투쟁했다는 기록을 역사에 남기는 일은 성공했다고 회고록에서 밝혔다. 이후 헐버트는 19076월에 열린 제2차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우리가 이미 잘 아는 이상설, 이준, 이위종에 앞서 또다시 고종으로부터 특사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일본의 집요한 방해 공작과 세계열강의 무관심 내지 방관으로 말미암아 회의 참석은 고사하고 이준 열사의 순국과 고종 황제의 폐위 그리고 대한제국 군대의 해산으로 이어지고 일제는 궐석재판을 열어 정사였던 이상설은 사형을, 이미 순국한 이준과 이위종에게는 무기징역을 선고하였다. 헐버트 역시 일제의 위협에 더이상 대한제국에 머물 수 없게 되어 미국으로 돌아가게 된다. 이후 헐버트는 미국에서도 38년 동안 각종 언론회견이나 순회강연을 통해 한국인들은 끝까지 투쟁할 것이다, 한국 청년들은 낙심하지 마라는 연설을 이어가고 친일 미국 지식인들에 둘러싸여 외롭게 투쟁하게 된다. 1919년 파리강화회의를 위한 독립청원서를 기초하고 그해 미국 상원 외교관계위원회한국독립호소문을 제출하여 31 독립운동을 알리고 일본의 잔학상을 고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하였던 헐버트 박사는 194978, 워싱턴의 주미 한국대사관으로부터 이승만 대통령의 국빈초청장을 받아들고 815 광복절 행사에 참석하기 위하여 729일에 86세의 노구를 이끌고 그토록 갈망하던 한국으로 왔으나 긴 여정에 지친 육신이 그를 괴롭혀 한국에 온지 일주일만인 85일에 눈을 감고 말았다.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보다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합니다.” 라는 평소의 소원대로 서울특별시 마포구 합정동의 양화진에 있는 외국인 선교사 묘원에서 영면에 들어가게 된다. 대한민국은 헐버트 박사 서거 다음 해인 195031, 미국 워싱턴의 주미 한국대사관에서 헐버트 박사에게 건국공로훈장 태극장(이후 독립장으로 명칭 변경)을 추서하였으나 독립장은 대한민국장, 대통령장에 이은 세 번째 등급으로 1950년 당시에는 공적 조서가 없는 채로 서훈하였기에 공적 심사를 제대로 한 연후에 서훈 등급을 결정하는 것이 올바른 서훈 행적으로 본다는 의견을 헐버트 박사 기념사업회측은 국가보훈처에 제시한 바 있다. 1999년 발족된 헐버트 박사 기념사업회는 2006년에 정부로부터 사단법인 인가를 받고 헐버트를 세계에 알리는 일이 곧 대한민국을 세계에 알리는 일이라는 인식하에 학술회의와 서적 발간 등 다양한 기념 사업을 하고 있고, 특히 매년 8월 헐버트 박사 서거일에 맞춰 추모식을 거행하고 있다. 당초 이승만 대통령의 글씨로 묘비명을 각인하기로 하였으나 한국전쟁 등으로 나라가 혼란스러워 묘비명 없이 50년의 세월이 흐르다가 199950주기 추모식에서야 김대중 대통령이 직접 쓴 헐버트 박사의 묘라는 묘비명을 새겨 넣게 되었다. 대한민국은 20137, 헐버트 박사를 외국인 최초로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고, 2014109, 한글날을 맞아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하였다. 한글날 기념식장에서 증손자가 헐버트 박사를 대신하여 훈장을 받았다. 이로써 헐버트 박사는 대한민국 역사에서 유일무이하게 건국훈장과 금관문화훈장을 받은 역사 인물이 된 것이다. 그가 우리나라와 우리 민족을 위해 수행한 업적을 고려하면 그만한 예우는 오히려 부족할지도 모르겠다. 23살에 조선과 인연을 맺어 63년 동안 대한민국과 한국인을 위한 삶을 살았던 헐버트 박사는 지금 한강을 내려다 보시면서 우리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던지고 계실까 궁금해진다. 아직도 남북으로 분단되어 있고 남한 역시 이념으로 양분되어 있는 상황을 보시고 그가 살아생전 주창해왔던 한민족의 동질성을 강조하고 외세의 힘에 휘둘리지 않기 위해서 국력을 기르고 단결하라고 하시지 않을까 싶다. 장차 남북한이 평화 경제 공동체를 만들어 강력한 통일국가를 건설하라고 하시지 않을까 싶다. 우리들이 이제 헐버트 박사의 꿈을 실현시켜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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