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오기 전에**는 슬픔을 다루는 소설이 아니다.
이 책이 끝까지 붙잡고 있는 건 죽고 싶다는 말의 이면이다.
p.42에서 봄은 말한다. 정말 무너지고 싶어서가 아니라, 너무 살고 싶어서 그런 말을 뱉어버렸다고. 그 문장을 읽는 순간, 나는 이 소설이 얼마나 잔인하게 정직한지 알게 된다. 사람은 정말 힘들 때 ‘살고 싶다’는 말을 정면으로 하지 못한다. 대신 그 반대말을 빌려 말한다. 너무 잘 살고 싶어서, 더는 이렇게는 살고 싶지 않아서, 그래서 튀어나온 말이 “그냥 콱 죽고 싶다”라는 문장이 되는 순간들. 이 책은 그 말을 절망으로 처리하지 않는다. 오히려 생의 집요한 의지로 되돌려 놓는다. 그래서 p.42는 슬픔의 고백이 아니라, 삶에 대한 가장 처절한 애착처럼 읽힌다.
그 고백이 더 아픈 이유는, 결국 그 말을 전하고 싶었던 언니가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미안하다고 말할 기회조차 남지 않은 상태. 이 소설에서 상실은 언제나 ‘늦음’의 얼굴을 하고 있다. 말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말하려고 마음을 정리한 그 순간에 사람이 떠나버렸다는 사실. 그래서 『봄이 오기 전에』는 후회를 크게 외치지 않는다. 대신 독자의 가슴속에서 조용히 부풀어 오르게 만든다. 나도 모르게, 이미 사라진 누군가의 얼굴이 떠오르게 하는 방식으로.
p.115에 이르면 이 소설은 계절을 다루는 방식이 완전히 달라진다. 봄과 설이라는 이름, 봄과 겨울이라는 생의 위치. 가장 예쁜 봄에 태어난 아이와, 가장 아름다운 눈이 내리던 화이트 크리스마스에 태어난 아이. 엄마는 말한다. 아무리 바빠도, 그 계절이 가장 예쁠 때만큼은 꼭 주변을 돌아보라고. 그런데 시간이 지나 돌아보니, 그 말을 했던 엄마 자신은 늘 그러지 못했다는 깨달음이 뒤늦게 도착한다. 이 장면이 아픈 건, 부모의 바람이 언제나 ‘자신이 살지 못한 방식’이라는 사실을 너무 정확히 짚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죽으면 생일은 사라지고 기일만 남잖아.”
이 문장은 소설 속 문장이지만, 현실에서 너무 자주 증명된다. 생일은 살아 있는 사람의 시간이고, 기일은 남겨진 사람의 시간이다. 『봄이 오기 전에』는 살아 있는 사람의 시간과 남겨진 사람의 시간이 어떻게 어긋나는지를 끝까지 따라간다. 그래서 봄이 생일을 챙기지 않게 된 이유는 단순한 무관심이 아니라, 누군가의 시간이 멈춘 자리 앞에서 혼자만 축하받는 게 어색해졌기 때문처럼 읽힌다. 이 소설은 그런 감정을 설명하지 않는다. 이미 알고 있을 거라고, 독자를 신뢰한다.
p.123에서 분위기는 조금 달라진다. 사랑이 등장한다. 그것도 첫사랑. 그런데 이 사랑은 설렘보다 어색함에 가깝다. 심장은 엇박자로 뛰고, 웃음은 이유 없이 튀어나오고, 감자탕 집 아들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온갖 엉뚱한 생각이 이어진다. 이 장면이 좋은 이유는, 사랑을 구원으로 쓰지 않기 때문이다. 사랑은 겨울을 끝내주는 장치가 아니다. 다만 잠깐, 아주 잠깐 따뜻해지는 순간일 뿐이다.
“이주 잠깐이라도 좋으니까, 내 겨울이 따뜻해지면 좋겠어.”
이 문장은 소설의 핵심에 가깝다. 봄은 영원을 바라지 않는다. 완벽한 치유도, 완전한 회복도 원하지 않는다. 그저 이주만, 잠깐만이라도 괜찮아지길 바란다. 이 소설이 현실적인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사람은 평생 따뜻해질 수 없고, 어떤 겨울은 끝내 봄을 보지 못한다. 하지만 잠깐의 온기만으로도, 사람은 다시 하루를 건널 수 있다는 사실을 이 책은 알고 있다.
그래서 『봄이 오기 전에』의 제목은 희망이 아니라 조건처럼 느껴진다. 봄이 오기 전에 해야 할 일은, 완전히 회복되는 게 아니라 버티는 것이다. 살아남는 것이다. 누군가를 잃은 채로도 웃어보고, 사랑을 믿지 않으면서도 설레어보고, 생일을 챙기지 않으면서도 계절을 바라보는 일. 이 소설은 그 모든 모순을 허락한다.
이 책을 읽고 나면, 죽고 싶다는 말이 함부로 들리지 않게 된다. 그 말 뒤에 얼마나 많은 ‘살고 싶음’이 숨겨져 있는지 알게 되기 때문이다. 『봄이 오기 전에』는 결국 말한다. 가장 어두운 겨울 한가운데서도, 사람은 여전히 잘 살고 싶어 한다고. 그리고 그 마음만으로도, 아직은 봄이 오지 않아도 괜찮다고.
p.141은 이 소설이 ‘사랑’을 어떤 온도로 다루는지 가장 선명하게 보여준다. 도영은 봄을 보고 웃는다. 특별한 사건도, 극적인 고백도 없다. 그저 눈이 마주쳤고, 손을 흔들며 웃는 얼굴이 예뻤다. 그런데 그 예쁨은 외형의 문제가 아니다. 봄이 웃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도영에게는 기적에 가깝다. 그래서 그는 봄이 늘 웃었으면 좋겠다고, 웃게 해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한다. 이 소망은 욕심이 아니라 다짐에 가깝다.
도영이 봄을 대하는 태도에서 인상적인 건, 보호하려 들지 않는다는 점이다. 봄을 ‘지켜줘야 할 존재’로 격하시키지 않는다. 겨울이 되면 숨어버릴 봄설공주이든, 잠자는 숲속의 공주이든, 그런 설정들은 도영에게 중요하지 않다. 그는 봄이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는지 보다, 그 옆에 자신이 어떤 사람이 될 수 있는지를 더 오래 생각한다. 언제든 기대 쉴 수 있는 사람, 마음이 무너질 때 대신 버텨줄 수 있는 사람. 이 소설에서 사랑은 구원이 아니라 동행이다. 끌어올려 주는 손이 아니라, 옆에 서서 같이 버텨주는 어깨에 가깝다.
그래서 도영의 확신은 격렬하지 않다. 소용돌이치는 푸른 마음이라고 표현되지만, 그 소용돌이는 폭풍이 아니다. 고요한 마음 안에서 천천히 생겨나는 움직임이다. 이 장면을 읽으며 나는, 이 소설이 사랑을 얼마나 조심스럽게 다루는지 다시 느꼈다. 사랑은 상대를 바꾸겠다는 결심이 아니라, 내가 어떤 사람이 될지를 묻는 질문으로 시작된다는걸, 『봄이 오기 전에』는 알고 있다.
p.209에 이르면 이야기는 다시 ‘가족’이라는 단어로 돌아온다. 유리에게 가족은 혈연이 아니다. 기억이고, 태도이고, 선택이다. 모든 순간 자신의 편이 되어줄 사람. 소문에 흔들리지 않고 믿어줄 사람. 설령 믿지 못하더라도, 곁에 같이 있어줄 사람. 이 정의는 너무 현실적이어서 아프다. 우리는 모두 가족이라는 단어에 기대지만, 실제로는 그 조건을 충족하지 못한 채 살아온 시간이 더 길다.
율이 개화로 향한 이유는 희망 때문이 아니다. 재회에 대한 기대도, 가족이 될 수 있으리라는 환상도 아니다. 다만 겨울이라는 계절, 눈이 쏟아지는 시기, 크리스마스라는 이름이 그를 이곳으로 이끌었을지도 모른다는 문장은 이 소설의 정서를 정확히 요약한다. 사람은 종종 목적이 아니라 계절에 이끌린다. 특별한 이유 없이도, 어떤 날에는 그저 그곳에 가야 할 것 같은 마음이 든다. 『봄이 오기 전에』는 그런 선택을 설명하지 않는다. 설명하지 않기에 더 설득력 있다.
이 소설에서 가족과 사랑은 결국 같은 질문으로 수렴한다. 나는 누군가에게 어떤 존재가 될 수 있는가. 끝까지 믿어줄 수 있는가, 아니면 믿지 못하더라도 떠나지 않을 수 있는가. 이 질문 앞에서 인물들은 모두 완벽하지 않다. 흔들리고, 도망치고, 늦는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의 곁으로 다시 돌아오려는 시도다. 이 소설은 그 시도를 미화하지 않는다. 대신 가능한 한 조용하게, 그러나 끝까지 따라간다.
『봄이 오기 전에』를 읽다 보면 깨닫게 된다. 이 책이 말하는 봄은 계절이 아니라 상태라는걸. 누군가의 곁에서 잠시라도 웃을 수 있는 상태, 겨울 한가운데서도 잠깐 숨을 고를 수 있는 상태. 그래서 이 소설에는 완벽한 해답이 없다. 대신 살아 있는 사람들의 선택이 남아 있다. 그 선택들이 모여, 겨울을 조금 덜 춥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