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걷고 싶어서
이훈길 지음 / 꽃길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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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10분만에쓴서평 #마음에와닿았다는이야기 #한번씩읽어보시길




행적에 대한 기록을 엮은 책은 많이 봐 왔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많이 나와 있는 걸로 알고 있다. 하지만 내가 걸은 길이 아닌, 남이 걸은 길이라는 사실부터 읽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던 게 당연했다. 몰입해 보려 해도 어느 정도의 거리감과 기시감이 들 수밖에 없다. 얼마나 유명한 작가의 여행이든, 설령 내가 호감을 갖고 있었던 연예인이 쓴 글이라 해도 그 사람이 느낀 감정을 고스란히 전달받고 공감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물론 같은 책을 읽더라도 마음 상태가 어떠냐에 따라 와닿는 느낌도 다르다는 걸 안다. 마침, 혼자 걸으며 생각을 정리하고 싶어졌을 때, <혼자 걷고 싶어서>가 우연처럼 놓여 있었다.


표지만 봐서는 가벼운 에세이 정도일 거라 예상했다. 목차를 볼 때까지도 이 책에 빨려들어갈 거라는 예감은 없었다.

그런데 첫 문장을 읽는 순간 이 책은 다르다는 것을 알아챘다. 어쩌면 지금까지 거부감을 주던 ‘남의 행적’에 대한 글들은 ‘지금’ 나에게 필요한 글들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이 책과 달리.


“기억하고 싶은 공간과 기억되는 공간이 있다. 어떤 공간이라도 기억될 수는 있지만, 기억하고 싶은 공간은 그렇지 않다. 기억하고 싶은 공간을 만나게 되면 눈에 보이는 것뿐 아니, 주변에서 들리는 소리, 코로 맡아지는 냄새, 입 안에 머무는 미감 그리고 피부로 느껴지는 촉감까지도 기억하게 된다.”


일기 같기도, 편지 같기도, 해설 같기도 한 작가의 문체는 ‘잠시 쉬었다 가’라고 말하는 듯 다정하고도 따뜻했다. 적당한 거리에서 한동안 그 자리에 머물며 누군가 들려주는 이야기에 자꾸만 귀 기울이게 되는 경험이었달까?


이 책에는 내가 서울에서 만 20년간 살면서 자주 마주친 건물들에 대한 스토리가 담겨 있다.


역대 왕들이 지내던 궁, 종종 눈길을 두고 지나가던 종로 한복판의 큰 빌딩, 유명하지 않은 동네에서 세월을 간직하고 있는 어느 작가의 집, 그리고 예술가들이 탄생시키고 지켜 가고 있는 문화예술공간, 삶과 생계와 예술을 한꺼번에 간직하고 있는 오래된 상가주택까지. 작가는 다정하고도 친절하게 소개하고 있다.


혼자 떠드는 느낌이 없어서 좋다. 독자로 하여금 작가의 시선을 강요하는 느낌도 없다.

적당한 호흡과 적당한 온도, 적당한 행간으로 이루어진 건물에 대한 스토리들은 나를 위해 준비된 안락한 의자에서 쉬어 가는 듯한 여운을 주었다. 현실적이면서 아득한 말투로, 내가 서 있는 공간에 대한 애정을 자아낸다.


이제는 낯선 곳에서 길을 잃는다 해도, 갈 길을 재촉하기보다 내가 서 있는 공간에 집중하며 그 공간들이 지니고 있는 오랜 시간을 곱씹어 보고 싶어질 것 같다.

작가가 그러했듯, 수백 년 전의 누군가 하늘을 바라보던 자리에서 나도 하늘을 올려다보는 시간. 그 자리에 나만의 쉼표를 하나씩 찍어 보는, 제법 멋진 나만의 행적을 남길 수 있을 것 같다 벌써부터 설렌다.

마음이 복잡할 때, 천천히 걸으며 내 마음에 집중하는 제법 멋진 습관이 이미 생긴 것만 같다.



“익숙함의 시작은 늘 낯설다. 낯선 감정 자체는 나쁜 게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종종 이것을 진짜 나쁜 것들로 착각하기도 한다. 낯섦이 곧 익숙해지고 시간이 좀 더 흐르면 포근해진다.”



“우리는 매일 도시의 길을 걷는다. 눈을 뜨고 감을 때까지 건축이라는 틀 속에서 살고 있다. 하지만 도시와 건축을 있는 그대로 즐기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현실의 공간은 여전히 차갑고 답답하고 삭막하다. 일상을 보내는 공간을 특별하게 만들기보다, 퇴근 이후의 삶이나 주말, 휴일과 같은 일상의 틀에서 벗어난 공간을 더욱 특별하게 만드는 데 노력한다.

사람들은 하루를 너무 바쁘게 살아간다. 그 사이 자신의 주변에 있는 공간들의 의미와 가치 그리고 그 공간들이 주는 행복함을 잊어버린다. 그래서 우리는 수많은 일상의 공간들을 지니지 못하고 있다. 가지고는 있지만 새겨두지 못한 공간들의 이야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 도시와 건축과 사람은 닮아서 마음먹기에 따라 다른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다. …

평범한 공간이 나의 공간이 되는 순간, 그 공간은 이미 특별한 공간이 된다. 무언가 특별한 건축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매일 마주치는 일상의 건축이 더욱 절실한 때라고 본다. 그래서 아침에 출근하여 회사에 들어가기 전 들르는 커피숍의 공간이, 냄새가, 촉감이 내게는 더 소중하다. 걸어다니며 만나는 공간에 애정을 느낄 수 있도록 관심을 주어야 한다. 멋있고 화려한 공간보다는 일상의 곁에 있는 도시와 건축에 다가가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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