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날로그
기타노 다케시 지음, 이영미 옮김 / 레드스톤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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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들수록 좋아지는 단어가 '아날로그'라는 단어이다.

1980년에 태어나 격변의 시대를 알게 모르게 살아오고,
김영삼, 노태우, 김종필 대통령의 연설을 보았던 열 살도 되지 않았던 나이의 시대를 떠올리니
새삼 나도 옛날 사람이구나 싶기도 하고,
그분들의 전성기를 떠올리고 나니 '한 시절 금방이다' 싶어 씁쓸하기도 하다.

<아날로그>라는 소설이 정말 이런 '아날로그'의 의미일 줄은 모르고 선택한 소설.
단어에 대한, 제목에 대한 얼마만큼의 기대도 두지 않고 읽으니 마음에 남는 것이 더 진하고 깊은 것 같기도.

남자 주인공 사토루는 보통 남자들에 비해 연애에 서툴다.
어떻게 해서든 한 번쯤 잠자리로 끌고 가려는 사토루의 친한 친구와 비교해 보아도 참 순수하다는 생각이 든다.
중간 중간 등장하는 인물들 역시 '여성'이라는 상대에 '잠자리'는 필수로 따라붙는 개념인 듯 보이고.
나이 든 재벌이든, 회사에서 멀쩡히 일하는 동료든, 사토루 주변엔 사토루만큼 건전한 남자는 없어 보였다.

사토루는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의 보살핌으로 바르게 잘 자라왔지만
어머니는 항상 일을 하러 다녔기 때문에 사토루는 소위 말하는 '열쇠아이'로 지내 와서 혼자 있는 게 익숙한 편이었다.
그러다 보니 어머니와 대화할 시간도 많지 않았고, 밖에서 친구들과 놀다가도 어머니 귀가 시간에 맞춰 혼자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나이를 먹으면서도 휴대폰으로 의미없는 인사를 주고받거나 누군가에게 적극적으로 연락하는 성격도 아니었다.

그런 사토루에게 우연인듯 운명처럼 나타난 미유키. 그녀 역시 가볍거나 도도하거나 계산적인 여성이 아니다.
마음이 함부로 움직이지 않는 사토루에게 미유키는 처음 보자마자 마음을 뺏길 만큼 강렬한 이미지로 다가왔다.
미유키는 목요일 오후엔 늘 '피아노'에 온다는 말로 사토루가 싫지 않음을 드러내고, 두 사람은 굳이 연락처를 주고받거나 하는 일로 서로 부담을 주거나 상처를 받지 않는 게 좋겠다는 데 같은 의견이었다.
그렇게 '아날로그틱한' 방식으로 연애인 듯 연애 아닌 관계를 이어 간다.

매주 목요일 저녁, '피아노'라는 레스토랑에서 만남을 이어갈 뿐. 약속도 거절도 없는 썸남썸녀로 시간이 흐른다.
그런데 사토루가  며칠간 오사카에서 출장 근무를 하는 동안 목요일 데이트를 한 주 못 나갈 수밖에 없었고,
그 다음 주 데이트까지 놓치고 싶지 않아 핸드폰도 꺼 둔 채로 일에 매진했다.
그런데, 핸드폰이 꺼져 있으니 오랫동안 요양병원에 계시던 어머니가 위급하다는 연락을 회사 동료를 통해 듣고 말았다.
서둘러 도쿄로 올라갔지만, 어머니의 임종은 끝내 지키지 못했다.
출장과 어머니 장례일정이 겹쳐 2주일간 데이트를 하지 못했지만 미유키는 다행히 사토루를 만나러 왔었다.
재회한 두 사람은 어설프게나마 바닷가 데이트를 나섰다. 그날, 미유키에게서 어머니처럼 따스한 느낌을 받은 사토루는
참았던 눈물을 터뜨리고 만다.

얼마간의 데이트에는 별 문제가 없었다.
매주 목요일 두 사람은 음악회를 보러 가기도 하고 사토루가 친구들과 자주 가는 꼬치집에서 데이트하기도 한다.
그런데 도쿄에 사는 사토루에게 2년 동안 오사카에서 근무하라는 지시가 내려온다. 
사토루는 미유키에게 청혼을 하기로 맘 먹고 반지를 준비해 '피아노'에서 기다린다.
그러나 미유키는 나타나지 않았다. 다음 주에도, 그 다음 주에도.
사토루는 3주 연속 목요일 데이트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미유키를 단념하기로 한다.

오사카에서 거의 2년의 시간을 보낼 즈음, 미유키를 잊지 못해 레코드점에 들렀다.
미유키와 함께 들었던 음악 중 하나를 기억을 더듬어 골라낸 사토루는 CD에서 미유키의 얼굴을 보고 깜짝 놀란다.
이래저래 수소문을 해 본 결과 미유키가 일찍이 유학을 떠나 스무 살에 피아니스트와 결혼한 적이 있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별한 후 일본으로 돌아와 이름을 바꾼 채 살아가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사토루가 청혼하려던 그 날, 미유키는 택시에서 크게 사고를 당해 하반신 마비와 뇌신경 손상을 입었다는 것도.
결국 친구의 도움을 받아 약혼자라는 이름으로 미유키의 언니를 만나게 되고,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는 미유키도 만나게 된다.
미유키의 언니가 보여 준 미유키의 일기장에서 사토루를 처음 만난 '피아노'에 대한 내용과
새로운 사람에게 마음이 끌리고 있다는 내용을 읽는다.

사토루는 건축 디자인 관련 일을 하고 있었는데, 디자인 모형도 종이를 잘라 실제처럼 만드는 아날로그식 방식을 고집하고 있었다.
그것으로 회사에서 빈축을 사기도, 인정을 받기도 했다.
그런데 미유키를  다시 만난 후, 그녀와 함께 있어야겠다고 결심했고, 회사에 사정을 말해 재택근무를 할 수 있게 되었다.
그 덕에 두 사람은 더 이상 '목요일 연인'이 아닌, 부부 같은 삶을 살게 된다.
비록 미유키가 사토루를 기억하지 못하지만 사토루는 미유키의 곁을 지켜 줄 수 있어서 행복하기만 하다.
어쩌면 어머니의 임종을 지켜 드리지 못한 것에 대한 죄책감을 조금이라도 씻어 내는 듯한 느낌도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같은 책을 두 번 읽은 경우는 아직 없다.
내가 읽었떤 책 중 마음에 들어서 두 번 세 번 읽고 싶은 책이 꽤 있었지만, 이 책을 다시 한 번 읽고 싶어지는 이유는 좀 다르다.
이 책을 읽고 있는 동안에는 왠지 '아날로그의 삶'을 살고 있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질 것 같아서다.
여러 모로 편리함을 주는 스마트폰이 있지만 우리는 점점 더 멍청해지고 소중한 시간을 놓치며 사는 듯한 느낌이 아니라
천천히 흐르는 세상에 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갖고 싶어서다.


* 본 서평은 리뷰어스클럽을 통해 출판사에서 제공받은 책을 읽고 작성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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