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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휴먼이 몰려온다 - AI 시대, 다시 인간의 길을 여는 키워드 8
신상규 외 지음 / 아카넷 / 2020년 2월
평점 :
“오케이 구글, 좋은 아침!” 매일 아침 구보씨는 산책을 나가기 전 구글의 배웅을 받는다. “안녕하세요, 구보님. 현재 서울의 기온은 영상 6도이며, 한낮에는 13도까지 올라갑니다. 미세먼지는 29 ‘좋음’이고, 초미세먼지는 ‘좋음’입니다. 일교차가 심하니 외출시 옷차림에 유의하십시오.” “오늘 뉴스는? 밤새 코로나 환자는 몇 명이지?”. “구로동 콜센터에서 80명의 확진자가 나왔습니다. 이탈리아는 확진자 만명을 넘어섰습니다.” “오늘 약속은?”, “2시에 새 단편집 출간을 위해 아카넷 편집장과 미팅이 있습니다.” “땡큐, 미스 구글” “네. 외출시 꼭 마스크를 착용하십시오.” 구보는 주상복합 현관문을 나와 청계천을 따라 걷는다. 서울의 도로에는 자동주행하는 차들이 오가고 있다. 책을 덮고 나는 상상해 본다.
구보씨의 하루는 구글과의 대화로 시작된다. 스피커 속의 미스 구글은 인공지능이다. 1930년대 모더니스트 작가 박태원이 만들어낸 산책자 구보씨는 몇 편의 패로디 작품을 거치며 변화하는 서울의 일상을 보여준 시민의 대명사이다. 모던보이 구보씨는 어머니의 잔소리를 뒤로 하고 집을 나와 모던 경성의 거리를 산책하며, 온갖 사람들과 그들의 욕망을 만난다. 인공지능 시대의 구보씨의 일상은 AI 비서의 친절한 배웅을 받으며, 인공지능 기술로 설계된 도시를 걷는다. 그러나 독자들에게 이제 더 이상 구보씨의 관찰 노트는 필요없을 것이다. 관찰을 위해 돌아다니지 않아도 제자리에서 모든 것을 검색하고, 빅데이터로 사람들의 욕망을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포스트휴먼 서사는 어떤 모습일까. 세계는 이야기로 구성된다. 굳이 영화, 드라마, 소설 속의 인공지능 존재들에 한정된 이야기가 아니다. 오히려 이 책이 강조하는 포스트휴먼 서사는 AI, 사이보그만이 아니라 인간의 삶과 그 의미에 대한 이야기이며, 이른바 인류세를 살아가고 살아갈 현재의 인류와 미래의 신인류들의 역사이자 일상이다. 즉 미래의 기술발전으로 가능해진 기계장치에만 주목하지 않고, 장치들과 더불어 공진화하는 일상성의 조건변화를 포괄하는 기술-사회적 미래에 대한 비전이다.(22쪽) 변화된 기술조건 하에서 인간이 지구에 거주하는 방식, 우리가 무엇을 입고, 먹으며, 어디에 살며, 어떻게 이동하며 소비할지와 같은 삶의 습관들의 문제이다. 나 같은 독자에게 궁금한 것은 복잡한 수식이나 거창한 서구 이론으로 가득한 미래서적이 아니라 포스트휴먼의 일상이다. 개념서라기보다는 포스트휴먼 일상을 보여주는 이야기란 점에서 이 책은 꽤 만족스럽다.
그렇다고 이론 없는 현상과 예측의 나열은 아니다. 이 책의 내용은 포스트휴먼 담론의 논의 및 함의에 대한 교양적 지식이다. 주지하듯이 ‘포스트’라는 말은 ‘이후’ 또는 ‘탈(脫)’이란 뜻을 지니고 있다. 포스트휴먼 담론은 휴머니즘 시대의 종언을 이야기한다. 이 책의 필자들은 저마다 ‘휴머니즘 다음에는 어떤 세상이 올까’ 또는 ‘휴머니즘을 넘어서’에 관한 물음들에 답하고 있다. 즉 겉으로는 인간과 기계의 ‘경계 넘어서기’이며, 더 들어가서는 기존의 인간관이나 인간 개념에 대한 새로운 인간학임을 강조하는 사유의 경계 넘어서기이다. 8명의 저자가 각각 쓴 글임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일관성 있는 주장들을 전개하고 있다. 그 지향점은 무엇인가. 이 책은 지구라는 땅에서 모든 다른 피조물 위에 군림해 온 인간의 위치에 대한 성찰, 다른 존재들과의 경계를 없애고 공존을 위한 새로운 삶의 방식을 기획하며 아직은 없는, 이미 도래한 미래로 나아가는 나침반이다. 다 읽고 나니 내 자신 포스트휴먼으로 몇 센티 진화한 느낌이다. 앞장서 간 8명의 선발대, 인간 필자들에게 감사드린다. 다음번 책은 인공지능이 써 줄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