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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예수
셰인 클레어본.크리스 호 지음, 정성묵 옮김 / 살림 / 2010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 서론
처음 이 책의 제목을 보았을 때, 불편한 마음이 들었다. 기독교국가를 꿈꾸는 이들이 만든 책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 때문이었다. 하지만 저자와 출판사를 확인한 후 안심할 수 있었다. 물론 제목의 의미도 어느 정도 유추할 수 있었다.
그렇다! “이 책은 예수께서 대통령이 되신다면 세상은 어떻게 될 것인가?”라는 가정으로 책을 전개하고 있다. “예수님을 대통령으로 부른다면 그분의 선거 운동 슬로건은 ‘희년!’이라 할 수 있다”(p.94) 등의 표현이 바로 그것이다. 물론 이런 흐름만으로 책이 전개되지는 않는다.
사실 추천사를 쓰신 김민웅 교수의 글을 보면 이 책의 내용을 짧게 가장 잘 소개하고 있다. 그래서 굳이 서평을 또 쓰는게 의미가 있을까 고민도 되기는 했지만 그 분은 그분이고 나는 나이기에...
■ 본론
이 책은 서문을 제외하고 총 4부로 구성되어 있다. 여기서는 각 부별로 인상적이었던 것을 중심으로 써내려 가보도록 하겠다.
서문에서 저자는 “우리 교인들은 정신분열증에 빠져 있는데, 좋은 그리스도인이고 싶지만 속으로는 오직 국가의 군사력과 경제력만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으며, 그러다보니 미국인으로 사는 것과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을 구별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p.24) 라고 현실의 교회 문제를 지적한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성경의 정치적 상상력, 새로워진 기독교 정치, 새로운 희망과 목표와 관행을 탐구하는 것이다”(p.24) 라고 이 책의 방향을 알려주고 있다.
1부는 <왕과 대통령이 있기 전>이란 제목으로, 예수께서 태어나시기 전까지의 구약 이야기를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이야기식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미 이러한 시각으로 구약의 내용들을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조금 지루할 수도 있지만 그 밖의 사람들에게는 구약의 굵직한 사건들을 하나의 관점으로 꿰어서 볼 수 있는 안목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2부는 <전혀 새로운 대통령>으로, 예수께서 태어나시기 전의 배경부터 예수의 공생애, 초대교회 전까지의 시기를 다루고 있다.
아마도 대부분의 한국교회에서 복음서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는 중간기에 대한 배경의 이해가 부족한 것이 한 가지 이유일 것이다. 또한 예수께서 태어날 당시 로마가 지배하는 상황들에 대한 이해 부족도 자의적이고 개인적, 내면적 성경해석을 낳게 된 주요한 원인일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저자는 2부 시작부터 당시 로마제국의 언어와 예수님의 언어를 병행시켜서 비교하고 있는데(p.72~75), 꽤 충격적이다. 우리가 익숙하게 사용하고 있는 성경(특히 복음서)의 주요 언어들이 대부분 제국의 언어와 일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러한 배경에서 크리스마스 이야기를 1세기의 시각에서 다시 읽어보라고 제안한다.(p.77)
또한 저자는 소위 ‘메시아 선언’(눅 4:18~19)이라 부르는 예수의 공생애 시작 전 선포를 ‘취임 연설’이라고 소제목을 달고 그 슬로건을 ‘희년’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로마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는 길은 로마에 항소하거나 로마 제국을 전복시키는 것이 아니라 카이사르의 코앞에서 야훼의 새로운 경제 시스템을 부활시키는 것이었다.”(p.95~96)고 설명한다. “사람들이 공동체로 하나가 되어 서로의 필요를 채워주는 세상, 왕도 대규모 복지 시스템도 대통령도 전혀 필요 없는 세상, 이것이 예수님이 마음속에 그린 세상이었다.”(p.96)라고 말이다.
무엇보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산상수훈에 대한, 특히 마 5:38~42절에 나타난 이야기에 대한 저자의 설명이다. 그는 월터 윙크의 통찰을 설명하고 있는데, 아마도 처음 접하는 독자들은 적잖이 당황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이 말씀에서 뺨을 맞은 자가 “뺨을 돌려 가해자의 눈을 보면 이제 가해자는 상대방을 동등한 존재로서 때릴 수밖에 없으며, 뺨을 돌려대는 것은 ‘나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인간이에요. 이 형상은 파괴할 수 없을 거예요’라고 말하는 것이다”(p.98~99)라고 설명한다.
저자는 “예수님이 적을 상대하는 세 가지 실질적인 방법을 가르쳐 주셨는데, 이것들은 상대방의 적의를 누그러뜨리기 위한 방법이며, 그분은 수동성도 공격성도 아닌 ‘제 3의 길’을 제시하셨다”(p.98)고 한다.
또한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는 말씀은 악에 대한 시각을 완전히 바꾸는 말씀으로, “이 제 3의 길에 따르면 ‘악을 반영하지 않으면서 반대하고...압제자와 싸우지 않으면서 저항하고...적을 파괴하는 대신 무력화할 수 있다’”라고 말한다.(p.100~101)
“제 3의 길”...
필자는 이 표현에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최근들어 그리스도인의 행동에 대해 고민하면서, 특히 재세례파에 대한 글들을 보면서 제 3의 길에 대해서 생각을 많이 하고 있었다. 그러한 차에 이 책을 통해 다시 한 번 확신을 할 수 있었다. 즉 희년을 경제시스템으로 이해한다면, 이것은 자본주의도 공산주의도 아닌 제 3의 길인 것이다. 이것은 경제 뿐 아니라 모든 영역에 적용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저자가 말하려는 하나님 나라의 체제일 것이다.
겨자씨 비유로 힘의 개념을 완전히 뒤엎으신 예수님의 방법을 말하며, “젼염성 잡초이자 치료제이며 어마어마한 잠재력의 상징인 겨자, 이것이 예수 혁명의 공식 심벌이다.”(p.110~111)라고 체제전복의 혁명이 악과 대응하는 방법이 아니라고 저자는 말한다.
2부 마지막 부분에서 당시 로마황제의 즉위식과 예수의 골고다까지의 십자가 여정의 유사성을 비교한 부분(p.135~139)은 정말 놀랍다. 복음서에서 보여지는 예수의 메시지는 이렇게까지 로마제국과는 따로 떼어 놓고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즉 예수의 행보와 메시지는 매우 정치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3부 <제국이 세례를 받을 때>는 초대교회에서부터 현재까지를 다루고 있다. 물론 저자의 모국인 미국의 상황이 계속적으로 배경이 되며, 자주 등장한다.
눈에 띄는 것은 요한계시록에 대한 저자의 설명이다. 계시록은 묵시라는 장르로서 당시 로마 제국을 다른 언어로 표현한 것이라고 말이다. 그는 “요한계시록의 많은 메시지 중에서 한 가지 메시지가 단연 돋보인다. 세상을 착취하는 경제라는 지독한 음녀에게서 빠져나오라!”(p.162)라고 정리한다.
“성경에 왕과 대통령이 정도에서 아무리 벗어났어도 무조건 따라야 한다는 뉘앙스를 풍기는 구절은 거의 없다”(p.168)고 하고, 초대 교회의 행동들을 말하면서 이것들을 ‘혁명적인 복종’이라고 부른다. 당시 배경에서 바울도 “권력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혁명적 사랑이라는 창조적인 길을 제시하고 있다”고 말한다.(p.169)-(로마서 13장에 대한 언급은 부록3에 있다)
콘스탄틴 이후로 시작된 교회의 타락과 이 흐름이 이어져 ‘미국 예외주의’라는 현 흐름을 언급하며 꼬집고 있다. 이로 인해 “우리는 폭력과 국가주의의 제국이 교회 안으로 스며든 탓에 하나님의 피조세계가 경제적으로, 생태적으로 파괴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p.201)고 주장한다.
특히 많은 지면을 할애한 전쟁과 군에 대한 그의 날카로운 통찰은 인상적이다.
여기쯤에서 저자는 속내를 드러내는데, “경제 측면에서 교회가 공정 무역 유기농 커피보다는 아미시파의 생활방식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는 것이 우리의 짧은 소견이다”(p.201~202)라는 부분이다. 이미 아미시파를 알고 있는 독자들은 앞에서 저자의 설명을 통해 어느 정도 눈치 챘을 것이다. 이에 대한 실제적인 대안들은 4부에서 구체적으로 다루어 지고 있다.
4부는 <독특한 집단>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으며, 저자 스스로도 클라이맥스라고 밝히고 있는 것처럼 지금까지 설명했던 것들을 현재 우리의 삶에서 실제로 적용한 이야기들이 소개되고 있다.
그는 제국에 대항하는 공동체인 교회를 강조하는데, “이스라엘 백성이 이방인들이 사는 바벨론 땅에 포로로 잡혀갔지만 그곳에서 소금처럼 흩어져 살며, 그들의 집과 텃밭, 자녀, 평화로 인해 그들의 거주지가 복을 받게 되었다는 것이 바로 4부의 요점”(p.247)이라고 설명한다.
또한 “새로운 비전을 품고 살아가는 것은 외로운 길이다. 그래서 공동체가 필요하다.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려면 집단적 상상력을 통해 카이사르의 축제와 다른 의식을 만들어내야 한다. 이것이 유대의 명절이 그토록 많은 이유다. 유대의 명절들은 우리가 어떤 ‘이야기’에서 비롯했는지를 늘 상기시켜준다.”(p.248) 라는 문장은 교회라는 공동체의 필요성에 대해 잘 말해주고 있다.
여기에 소개된 일화나 사건들을 모두 소개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그만큼 어느 것 하나 버릴 이야기가 없다) 몇 가지만 소개하도록 한다.
“벨리즈 우림 지역의 농부들은 우림의 열기와 습기로 힘든 농사를 짓는데, 어느 날 한 강도에게 집을 털리게 된다. 다행이 경찰이 범인을 찾아 감옥에 가두었는데, 이 때 이 농사 공동체는 다른 곳에서는 쓸 수 없는 독자적인 화폐를 찍었고, 강도가 복역을 마치고 나오자 그를 찾아내어 집을 지어 주었다는 것이다. 결국 그 강도는 회심했다.”(p.270) 여기서 저자는 농부들의 비폭력과 창의성이 가장 빛난다고 말하며, 이러한 비폭력이 가능한 이유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한 믿음이 순종과 창의성의 뿌리가 되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이들의 경제적 삶은 시련을 통해 형성되었고, 적은 물질로 견디는 법을 배웠기 때문에 이러한 폭력과 절도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것을 ‘강력한 협력의 경제’라고 하고 경제적으로 무너질 염려가 없기 때문에 원수를 용서하기가 쉽다고 말한다.(p.271)
이 한 가지 사건 안에도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엄청나게 크다. 시련, 비폭력, 창의성, 강력한 협력의 경제, 용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저자(셰인)와 카심이 우체국 가는 길에 불량배들을 만난 사건이다. 그들의 폭력에 대응하지 않고 먼저 인사를 건내고, 맞고 나서도 “너희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어. 너희 한 명 한 명이 다 그래. 너희는 이렇게 살 존재가 아니야. 카심과 나는 예수님의 제자야. 그래서 싸우지 않을거야. 대신 너희가 무슨 짓을 해도 우리는 너희를 사랑할거야”(p.278)라고 대답한 것은 정말이지 우리 같은 사람은 상상도 못할 일이다. 필자는 이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삶이고, 하나님 나라의 평화임을 다시금 깨닫게 되었다. 특히 그런 위급한 상황에 그런 말이 나올 수 있다는 것은 정말 내면화 되지 않았다면 불가능 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말한다. “물론 비폭력 전략으로 모든 상황을 다룰 수는 없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인격과 정신을 내면화하는 것이다. 우리는 매일 성령의 열매를 묵상하며 우리 안에서 그 열매를 맺기 위해 기도해야 한다. 그러면 나쁜 상황에서 예수님처럼 행동할 지혜와 용기가 생길 것이다.”(p.283) 이렇듯 4부는 자칫 추상적으로 흐를 수 있는 주제들을 실제 사건들을 통해 구체적이고 가시적으로 보여준다.
■ 결론
신자유주의 금융자본주의 시대, 민주주의가 후퇴하고 있는 시대, ‘경제’라는 새로운 제국이 잡아먹을 기세로 세상뿐 아니라 교회까지 넘보고 있는 이 시대 저자의 주장들은 아주 적실해 보인다. 그 제국의 통치 방법은 폭력인데, 그것은 단지 지금 뿐 아니라 이미 예수님의 시대에서도 있었던 일이다. 당시 예수의 본을 따라 우리도 창조적 비폭력의 방식으로 사탄의 체제에 맞서야 할 것이다. 그것은 혼자만의 힘으로 불가능하다. 이러한 삶을 살아가는 공동체를 통해 이루어질 것이다. 저자는 4부 마지막 부분에서 새로운 축제, 새로운 언어, 새로운 예식, 새로운 영웅, 새로운 노래, 새로운 전례, 즉 새로운 세상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전통적인 교회의 틀 안에서는 힘들 것이다. 저자는 새로운 공동체를 시작하라고 우리에게 속삭이고 있는 듯하다. 희년의 삶을 살아가는 공동체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