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은 조화 - 심미적 경험의 파장
문광훈 지음 / 아트북스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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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악의에 맞서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은 크게 없어 보인다. 그러나 내게는 빗장이 있다.”(표지 뒷면) 이 책의 표지에서 저자가 독자에게 ‘심미적 동행’을 권하면서 하고 있는 말이다. 세상을 선의와 악의로 구분할 수 있다면-아마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선의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악의에 맞서는 방법이 최소한 ‘빗장걸기’이어서는 안될 것이다.

‘빗장’이란 어찌보면 ‘감당할 수 없는 자유와 두려움으로부터의 무책임한 도피수단’으로 이용될 우려가 있다. 까뮈의 말처럼 예술가는 ‘괴로움과 아름다움에 동시에 봉사’해야 한다.(예술가와 그의 시대) 마찬가지로 예술가는 선의와 악의에 동시에 맞서야 한다. 악의 없이는 선의도, 추함이 없이는 아름다움도, 괴로움이 없이는 행복이란 애초에 존재할 수 없는 것들일 것이기 때문이다.

저자도 “아름다움이란 단순히 ‘예쁘다’거나 ‘편안하다’라는 뜻이 아니라 추악성을 포함하는 넓은 의미의 아름다움이다.”(21쪽), “폐허의 흔적을 지니지 않은 아름다움은 거짓이다.”(191쪽)라고 말하고 있다.

어떤 편견도, 의미도 부여함이 없이 독자의 눈으로 ‘예술가의 의지’를 찾아내는 것, 그것이 갈등의 현상이든, 숨은 조화든, 있는 그대로를 인식하는 것, 그것이 ‘심미적 개인’의 몫이 아닐까 싶다. 현재의 조화를 탐색하기 위해서는 과감하게 빗장을 풀어야 한다. 예외없이 숨겨둔 그 빗장의 용도는 아마도 ‘빗장풀기’이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상호주관적이면서 동시에 객관적인 ‘심미적’ 경험(10쪽)을 통해 저자는 다양한 예술의 재현형식들이 사회에 어떤 구속력(?)을 가진 공공재(11쪽)로서 기능할 것을 희망하고 있는 듯 하다. 이것은 아마도 하나의 ‘시대정신’을 탄생시키기 위한 ‘시대적 처방’으로서의 ‘심미적 경험쌓기’를 강조하고자 함일지도 모르겠다.

그것이 개념상으로는 ‘미적’인 것이든, ‘심미적’인 것이든, ‘공공재로서의 그것의 경험’이란 아마도 소통과 공유를 통해서만 가능한 일이리라. 그런 각자의 ‘내적 경험들의 소통과 공유’, 그것이 이 시대가 요구하는, 또는 ‘인간 이후의 인간’들이 의지할 수 있는 ‘동행으로서의 휴머니즘’이 아닐까 싶다.

그런 측면에서 저자가 소개하고 있는 자신의 경험과 그 파장들은 하나의 파급으로서의 의미는 충분히 갖고 있다고 본다. 이미 그는 씨를 뿌리고 있으므로 수확과 그 이후는 전적으로 ‘심미적 독자’의 몫일 것이다. 그렇게 연결되어 있는 한, 각자의 삶들은 그 형식 여하를 불문하고, 또 하나의 예술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보면서 보여지고, 느끼면서 느껴지는 존재’(31쪽)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세계로 난 통로’(29쪽) 중 하나로서 듣기의 대상인 소리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소리의 개별적 표현 가능성은 다른 소리의 가능성에 의해 보장되고 동시에 제한받는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공동체 속에 거주하는 개인의 가능성과 크게 다를 바 없다.”(38쪽) 공동체 속의 개인의 자유라는 것도 그 ‘가능성의 보장’만큼 ‘관계 속에서 제한’받을 수 밖에 없는 것이리라. ‘관계속에서의 평형’(178쪽), 그것이 ‘정의의 길’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심미적 경험’을 ‘공감적 이해의 반성적 감수성을 연습하는 일’(74쪽)로 가둬둘 필요가 있을지는 의문이다. 규범과 제도 속의 자유는 ‘최소한의 보장’에 그치고 있을지라도, ‘심미적 체험’을 위한 자유는 ‘최대한의 보장’을 지향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러므로 ‘공감’하더라도 서로 ‘연인’아니라 ‘적’으로 맺어진들 그리 상관없는 일일 것이다. 예술이란 그조차 자유로운 영역에 속한 것일 터이니, ‘반성’이 아니라 ‘반항’이더라도 무방하리라.

제2부 이하에서 서술하고 있는 저자의 고요한 심미적 경험의 파장에 ‘동행’함으로써 분명 하나의 문턱을 넘어선 세상, 그 확대된 어떤 지평을 확인할 수 있다. 그것은 저자의 바램대로 희망과 절망의 경계에서 그 틈을 메우는 양식(115쪽)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있는 그대로의 소음현실’이 ‘있어야할 것으로서의 고요현실’(119쪽)임을 깨닫는 삶, 그 자체가 바로 ‘예술로서의 삶’이 아닐까 싶다.

그럼으로써 예술가들과 그 심미적 경험들을 전하는 저자의 힘을 빌어 스스로의 ‘존재의 확장’(169쪽)을 도모할 수도 있을 것이다. 마침내 예술가들의 그 은밀한 ‘숨은 조화’들을 찾아낼 때, 그것은 새로운 ‘세상의 창조’이며, 더불어 ‘신의 탄생’일지도 모를 일이다. 그럴 때만이 ‘신’은 절대 타자로서의 ‘영원성’(192쪽) 속에 소외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생성, 소멸되는 자신 속에서 새롭게 발견되고, 발견되어져야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저자의 염려대로 가장 두려워해야할 것은 ‘미숙한 채로 굳어버리는 일’(232쪽)이거나, ‘그냥 살아감’, 그 ‘살아감의 위대함’(231쪽)을 모르는 일일 것이다. 그것이 ‘소박’한 삶인가의 여부는 차치하고라도 그냥 살아감의 ‘용기’를 실행하고, 각자의 ‘길 위에서 흥얼거릴 가락’(237쪽)을 찾는 것도 또한 온전히 ‘심미적 독자’의 몫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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