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엔 돌아오렴 - 240일간의 세월호 유가족 육성기록
416 세월호 참사 기록위원회 작가기록단 엮음 / 창비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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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의 아픔은 시간으로 치유될 수 있는 것이 아니구나, 하는 깨달음으로 이 기록은 남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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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와 영토
미셸 우엘벡 지음, 장소미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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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프랑스 문단이나 작품에 지속적인 관심을 가졌던 바 아니니, 미셸 우엘벡에 관한 논의는 한국 여론의 전달 이상이 될 수 없겠다. 소문에 의하면, 우엘벡이 공쿠르 상을 받은 <지도와 영토>는 그의 작품 중 가장 순한 편에 속한다. 그가 내보이던 강렬한 이미지들이 많이 상쇄되었다고는 하나 작중인물인 미셸 우엘벡의 살인, 죽은 자의 살점으로 한 편의 예술작품을 조잡하게 모사하는 장면에서 전작의 끔찍스러움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처음으로 읽은 작품이니 우엘벡에 대한 인상 정도만 서술하겠다. 우엘벡은 이 작품에서 인공적인 세계에 감싸인 인간군을 묘사한다. 주인공인 제드 마르탱이 고장난 난방기의 소음 속에서, 인공적인 열기 속에서 세상 속의 적절한 조각들을 모아, 그리고 "상표"로 표상되는 물감의 선택군에서 미술상을 그리고, 그 작품에 만족하지 못하는 첫 장면에서 그 인공적인 세계는 두드러진다. 고장난 난방기가 하이데거의 용어를 빌자면, "손 안에 있음"이라는 자연스러운 생활 환경에서 "눈 앞에 있음"이라는 사유 촉발, 곤경 속의 감각적 거스름으로 등장하는 것이다.

그가 그리고 있는 미술상이 완성되지 못하고 구토 속에 찢기워지고 마는 것은, 인공적인 세계 속에서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란 미술상에 의존하기 마련이라는 점에서 독특한, 삐딱한 시점에서의 자화상이라는 특성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세계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간접적으로 그리려는 시도가 애착과 경멸이라는 복합적 감정 속에서 내파하고 마는 것이다. 그러므로 제드 마르탱이 자신의 자화상을 그리기 위해 과거 서사를 불러오고 아버지나 전시회에 평을 써달라고 찾아간 미셸 우엘벡이 내보인 열정에 과도하게 집착하는 것은 나름의 이유가 있다. 자화상을 그릴 수 없게 된 예술가가 자화상을 그릴 수 있는 간접적인 영역에 집착하는 것이라 볼 수도 있는 것이다.

지도의 실용성과 상업성이 결국 평면성에 투영된 세계의 반영에서 비롯되며, 인간이 이 반영을 통해 자신의 위치와 자신이 가고자 하는 곳을 확인하는 기능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그것은 아름다울 수 있다. "지도는 영토보다 위대하다"는 제드 마르탱의 첫 지도 사진 전시회 제목은 어쩌면 먼 곳, 신의 시선으로 자신의 위치를 찾고자 하는 모호한 욕망의 간접적 체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언제나 자신이 무엇을 하고 싶어하는지 모르는 사람으로 자인하고, 예술가의 본능에 따라 새로운 영역을 찾아나선다고 하지만, 기존의 작업에 만족하지 못하는 그의 변화, 그리고 사물은 사진으로 찍을 수 있지만 인간은 회화로 그려야 한다는 그의 의식 같은 곳에서 어느 정도 그러한 욕망의 좌표를 그릴 수 있다.

우엘벡의 죽음, 아버지의 죽음은 그러한 면에서 자신의 대체 좌표가 상실된다는 충격을 갖는다. 그리고 인공적인 세계에서의 삶만이 아니라 "죽음"이 그의 작품세계 속으로 투입되는 효과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이 작품의 3부에 나오는 추리소설적 구성은 우엘벡을 죽인 진범을 찾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제드 마르탱 작품에 '시간'과 '죽음'(인공적 사물의 죽음이기도 한)이 도입되는 원인-효과로서 중요하다. 세세한 설명을 하기에는 이 지면이 익숙하지 않아서 단적인 결론만 제시하자면, 이 '시간'과 '죽음'의 도입은 인공적인 삶의 방향에 정치성을 부여한다. 작품 후반부의 고립-외출-예술작품으로 이어지는 장면을 곰곰히 생각해보기를 권한다.

이와 함께 우엘벡과 아버지 사이에서 제드 마르탱에게 중요한 것은 우엘벡은 사적으로는 고립되어 있으나 예술가라는 점에서 세상과 소통하고 있다는 점(이는 우엘벡이 죽은 이후 프랑스 외의 여러 나라에서 예전의 애인들을 찾아낸다는 유머스러운 모습으로 나타난다), 제드의 아버지는 사적으로는 대단한 성공을 거둔 건축가이지만 정작 자신의 꿈이었던 예술적 건축(윌리엄 모리스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드러난다)은 평생 숨기고 살아온 일종의 냉소주의적으로 분열된 주체였다는 점이다. 제드 마르탱을 상업적인 성공으로 이끈 연인 올가와 재회하는 지점에서 우엘벡과 그 중요성이 교차하면서 우엘벡과 아버지가 서사의 전면에 등장하는 것을 보면, 그가 상업적인 성공의 최정점에서 자신의 분열과 모순을 해소하려고 노력했다는 단초를 찾을 수 있다.

우엘벡의 장점은 자신이 표현하려는 어떠한 사상(?)도 직접 설명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자신의 주관을 많이 내보이는 제드 마르탱의 경우에도 그는 이러한 점을 지켜 제드를 "모르면서 아는 자"의 위치에 둔다. 그는 충동의 주체로 계속해서 새로운 변화를 시도하지만 그 변화의 궁극적인 지점을 추론해야 하는 것은 독자에게 맡겨져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절제가 작품 전반에 퍼져 있기에 작품 해석의 단초를 찾고 싶어하는 독자는 흥미로운 재독, 삼독에 몸을 던지는 것이다.

생각나는 점을 주저리주저리 말하다 보니 문장도 엉망이고 구성이라 할 것도 없어진 지리멸렬한 글이 되지 않았나 좀 불안하다. 그래도 독서의 한 기록으로 올려 놓는다. 언젠가 다시 이 작품을 읽고, 또는 우엘벡의 다른 작품을 읽고 새로운 글로 써 올릴 때 최소한 부끄러운 글이 아니었으면 하는 생각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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