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학시간에 곱셈에 대해 배우는데 아무리 해도 알아듣지 못해 선생님에게 꾸지람을 넘어 폭행을 당하는 장면으로 이 책은 시작된다. 주차장에 차가 몇 대인지 알아맞히는 문제였는데 곱셈이 안 되니 선생님은 일일히 차를 그린 다음 세어보라고 하지만 레이몽은 그럴수록 머릿속이 뒤죽박죽되면서 도대체 차가 몇 대인지 왜 세어야하냐고 묻는다. 나 자신이 숫자라면 일단 머리속이 하얘지는 터라 칠판 앞에서 쩔쩔매는 레이몽에게 심히 공감했다. 그래서 책에 빠져들었는지도. 책 제목인 '당나귀 귀'는 학교에서 선생님에게 늘 귀를 잡혀서 붙여진 레이몽의 별명이다.
레이몽은 이렇게 공부를 못한다고 선생님에게 구박당하고 친구들에게도 왕따를 당한다. 그리고 불행하게도 집안에서도 천덕꾸러기다. 푸주간을 운영하는 아빠는 세상에 돈이면 다 되는 줄 아는 속물에 거칠고 폭력적이다. 엄마는 게으르고 신경질적이다. 레이몽이 유일하게 마음을 터놓는 상대는 용돈벌이로 일하고 있는 빵장수 프란시스 아저씨다. 레이몽의 처지를 알고는 아저씨는 레이몽을 도제 삼겠다고 하며 집에서 탈출시켜주려고 하지만 안타깝게도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고, 레이몽의 꿈은 산산조각난다.
이 책은 아이들을 위해 샀지만 읽어보니 어른이 꼭 읽어야 할 책이다. 어른들이 내뱉는 말투와 행동에서 내 모습이 없지 않았다. 아직 어른만큼 살아보지 않은 아이에게 어른의 기준을 적용하는 게 얼마나 폭력적이고 잔인하고 터무니없는 짓인지.
집에는 1권만 있는데 알고보니 3권짜리다. 도서관을 뒤져서 전권을 읽었는데 어린이 책답지 않게 결말이 비극적이다. 레이몽은 학교에서 이상행동을 보이는데다 학습장애아로 판결 나 결국 학교에서 쫓겨나고 특수학교에 가게 된다. 모처럼 안정을 되찾고 첫사랑의 감정도 맛보게 되었을 때 다시 어이없는 실수로 집으로 쫓겨온다. 2권, 3권의 책 제목은 <난 죽지 않을테야>, <이별처럼>이다. 레이몽의 삶이 결국 어떻게 끝났을지 짐작케하는 제목이다.
"난 아직 어린애였다. 어린아이들에게는 그런 말을 하지 않는 법이다. 아이들은 꿈을 꾸기 위해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아직 꿈을 꿀 시간이 있는 것이다. 그들은 훗날, 좀더 시간이 지나면, 이런 모든 말들을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훌쩍 자랄 것이다. 이런 사실을 감당할 수 있을 정도로, 꿋꿋하게 혼자 울 수 있을 정도로 성큼 자랄 것이다. 하지만 내가 그렇게 될 때까지 아빠는 기다려야 할 것이다." 레이몽이 어른들에게 들려주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