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케의 눈
금태섭 지음 / 궁리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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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쓴 금태섭 변호사는 현직 검사로 재직하던 2006년, 한겨레 신문에 <현직 검사가 마랗는 수사 제대로 받는 법>을 기고했다가 법조계에서의 논란 끝에 연재를 중단한 바 있다. 현재는 변호사 겸 라디오 프로그램 진행자로 활동하고 있는 조금 특이한 이력의 소유자다.  

  

한겨레에 글을 썼다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었기에 이 사람은 어떤 성향을 갖고 있을까 하는 궁금증을 품고 책장을 넘겼다. 법이라는 것이 원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목적을 갖고 있는지라, 법이 추구하는 개혁과 진보 역시 한계를 가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법조인 역시 법의 테두리 내에서 활동영역을 갖는 사람이기 때문에 급진적일 수 없음은 명백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의 곳곳에 소개된 그의 법에 대한 견해는 우리 현실에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징벌적 배상제도는 우리 나라에는 없지만 미국에서 채택하고 있는 제도이다. 거대 기업이 생산 및 유통과정에서 소비자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힐 수 있는 잘못을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개별적인 손해배상으로 적당히 때우려는 시도를 막기 위해 천문학적인 배상액을 매기는 것이다. 저자는 맥도널드사가 자사의 커피를 쏟아 화상을 입은 할머니에게 무려 24억을 배상할 뻔 했던 예를 들면서 징벌적 배상제도의 도입은 신중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재벌기업의 영향력이 사회 전반을 장악하고 있는 우리나라의 경우 공익을 위해 반드시 이 제도가 필요하다. 태안 기름유출사건을 보자. 만약 이 사건이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에서 발생했다면 1차적 책임자인 기업이 환경정화비용 전액은 물론 태안 주민들에게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했을 것이다. 그렇게 해야만 환경오염에 대한 경각심과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 재고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삼성은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고 배상액을 축소하기에 바쁜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자본의 방만한 행태에 대해 법이 제동을 걸어야 한다.  

 

사이버 포르노물에 대한 법적 논쟁을 소개하면서 법률만능주의에 대해 비판한 부분 역시 우리의 현실을 돌아보게 한다. '법치'라는 이름 아래 법으로 모든 것을 통제하려는 이 정권의 시도는 민주주의와 인권을 황폐화시키고 있다. 정부와 여당이 추진하는 통신보호법과 집시법 개정, 국정원법, 언론관계법 등 이른바 'MB악법'은 표혀의 자유, 언론의 자유를 심각하게 침해하는 법들이다. 미네르바 사건에서도 볼 수 있듯이 현재의 모호한 형법으로도 얼마든지 자신들의 입맛에 맞지 않는 개인을 잡아넣을 수 있는데도 말이다. 이에 대해 야당이 육탄으로 저항하자 이번에는 '국회폭력방지법'을 만들겠다고 나서는 정부여당의 행태가 바로 '법률만능주의'이다.  

 

법이 과도할 때 오히려 법은 무능해진다. 법이 사회구성원들의 신뢰에 기반할 때 법은 제대로 기능하게 된다. 우리 권력기관들은 지금까지 보여온 행태만으로도 너무나 많이 신뢰를 잃어왔다. 지금은 신뢰를 기반으로 한 법이 절실한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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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Scarlet Letter The Classic House 9
Nathaniel Hawthorne 지음 / THETEXT A YBM COMPANY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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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ultery'

 

헤스터 프라인의 가슴에 새겨진 주홍글씨는 간통(Adultery)의 약자 'A' 였다. 간통에 대한 죄악시는 비단 청교도 윤리가 지배하던 19세기 미국에서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얼마 전 탤런트 옥소리도 간통죄로 기소당하여 징역 8개월에 집유 2년의 형을 선고받지 않았던가. 옥소리는 간통죄를 규정한 형법 제 241조에 대하여 위헌법률심판제청을 청구했으나 헌재는 결국 이에 대하여 합헌 판결을 내렸다.

 

헤스터 프라인과 딤스데일 목사는 순순한 영혼을 지닌 지극히 아름다운 사람들이었고 7년의 시간 -- 프라인에게는 모멸감과 굴욕의 시간이었고 딤스데일에게는 양심의 짐이 점차 자신을 파멸시켜온 시간 -- 도 그들의 사랑을 갈라놓지는 못했다. 그들의 육체적 사랑은 단 한번이었지만 악마도, 죽음도 그들의 정신적 사랑을 파괴하지는 못했다. 어느 누구도 그들의 사랑을 두고 추잡한 성적 욕망을 제어하지 못하고 저지른 죄악이라고 말하지는 못할 것이다.

 

실정법이라는 이름으로, 여론이라는 마녀사냥으로 재단할 수 없는 개인의 감정은 시대를 초월하여 누구에게나 존재할 수 있다. 유명 연예인의 사랑이라고 해서 프라인의 그것과 다르겠는가.

 

간통죄가 가부장적 가족제도의 산물이며 여성에 대한 억압의 기제라는 진보적 명제를 믿기 때문에 간통죄에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개인의 감정, 특히 사랑이라는 은밀하고 미묘한 감정에 대해 제도의 잣대를 들이댈 수 없다는 판단만 일단 내리고자 한다.

 

그렇다면 프라인의 전 남편 칠링워스의 존재는? 프라인과 딤스데일의 사랑은 그를 악마로 만들었고 그 역시 한 명의 희생자였다. 내 아내가 다른 남자와 아름다운 사랑을 나누고 내 자신이 파멸된다면? 간통에 대한 판단은 역시 쉽게 내릴 수 없을 것 같다.

 

아, 한가지 더. 데미무어가 주연한 영화 주홍글씨도 꼭 봐야겠다. 섬세한 감정묘사와 아름다운 뉴잉글랜드의 풍경이 군대에서 메마른 내 마음을 적셔줄지도 모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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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
김훈 지음 / 학고재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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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훈의 글은 묘하다. 칼의 노래, 현의 노래, 남한산성까지 그의 소설을 세 편째 읽지만 작가 김훈의 글은 묘한 맛이 있다는 것을 새삼 다시 느낀다. 비어있는 것 같으면서도 차 있는 문장, 짧게 끊어치면서도 길게 여운이 남는 문장. 그의 문장은 역설적이다.

 

병자년 겨울, 남한산성에서는 두 개의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성벽을 가운데 두고 대치한 청군과 조선군의 싸움. 그러나 어차피 결론이 정해진 이 싸움은 언제 그 결론이 맺어지는가를 향한 지루한 기다림만이 있었을 뿐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지루한 기다림 속에서 또 하나의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것은 말의 싸움이었다. 말과 말이 얽히고 섥힌 진흙탕싸움이었다. 결국 청나라와 화의하고 임금이 굴욕을 당하는 것이 정해진 수순임을 알면서도 구태의연한 성리학 교리와 대의명분, 실현불가능한 전략을 무책임하게 쏟아내며 척화를 주장하는 사대부들. 스스로 역적이 되지 않기 위해 주화파 최명길을 역적으로 만들며 결국은 살 궁리를 하는 그들의 모습은 말의 전쟁터에서 흙탕물을 뒤집어쓴 패잔병의 모습이었다.

 

사대부들의 무능력과 어리숙함은 자신들의 왕조를 몇번이나 풍전등화의 위기로 몰아갔고 그 때마다 희생은 민중들의 몫이었다. 그러나 이를 극복하고 그 과정에서 새로운 세계에 대한 희망을 발견한 것 역시 민중들이었다. 왕이 도성으로 돌아가고 난 후 대장장이 서날쇠는 가족들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와 새해 농사롤 시작하고 나루는 초경을 한다.

 

나는 서날쇠와 나루를 통해 민중들의 생명력을 발견했다. 병자년 겨울에 벌어졌던 두 전쟁을 통해 청의 승리도, 주화파의 승리도 아닌 민중들의 승리를 발견했다.

 

따라서 병자년 겨울은 아직 현재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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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리데기
황석영 지음 / 창비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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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자신의 현실인식이라는 기반 위에 새로운 인물과 세계를 창조해내고 이야기를 구성한다. 작가는 현실을 재구성한 허구를 독자에게 제공하며 독자에게 제공하며 독자는 이 허구를 통해 현실을 다시금 곱씹어보며 작가와 현실인식을 공유하게 된다. 따라서 진정한 작가로서 반드시 갖추어야 할 조건 두 가지는 다음과 같다. 첫째, 동시대인들이 처해있는 현실을 냉철하게 인식하고 투철하게 고발할 것. 둘째, 높은 문학적 완성도로 설득력있게 새로운 세계를 창조할 것.

 

황석영은 이 두 가지 조건을 완벽하게 갖추고 있는 작가다. 게다가 그의 현실인식과 문학적 완성도는 여전히 진화중이다. 산업화와 독재,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스러져가던 무명의 인간군상들을 그린 그의 단편작들, 80년 광주에서부터 베를린 장벽의 붕괴까지 우리 현대사와 세계사를 아우르는 <오래된 정원>, 그리고 탈북문제와 9.11테러, 이라크전쟁까지의 진행중인 역사를 그리는 <바리데기>까지 역사라는 웅장한 강의 흐름이 굽이치는 지점마다 그의 작품이 하나씩 우뚝 서 있는 것만 같다.

 

<바리데기>는 바리공주 설화를 모티브로 하여 탈북민 바리가 현실에서는 세상의 평지풍파를 온 몸으로 겪어내며, 환상에서는 세상의 비극을 정화시켜줄 생명수를 구하는 여정을 걷는 줄거리를 갖고 있다. 바리는 84년생이다. (94년에 열한살이었다고 한다) 만일 남쪽에서 태어났다면 학점과 취업의 굴레에서 신음하는 유약한 88만원 세대의 일원이었을 그녀는 20년의 삶 동안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최말단에서 중심부까지 이동하며 온갖 시련들을 이겨낸다. 삶 자체가 고난인 그녀가 생명수를 찾아나선다는 설정은 매우 상징적이다. 그녀가 생명수를 찾아낸다면 분열과 증오로 얼룩진 21세기의 피해자인 제3세계 민중들이 인류를 구해낼 희망이라는 의미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국 그녀는 생명수를 찾지 못하고 돌아온다. 그리고 소설은 그녀가 아이를 임신한 채로 2004년 런던 폭탄테러를 목격하는 것으로 끝맺는다. 그렇다면 희망이란 없는 것일까? 인류는 계속해서 고난의 행군을 가야만 하는 것일까?

 

작가는 이제 독자들에게 작가가 창조해낸 허구의 세계에서 빠져나와 현실을 돌아볼 것을 주문하고 있다. 자본의 무자비함과 종교적 아집, 전쟁과 테러를 극복할 진정한 인간성을 찾는 것은 바리의 숙명일 뿐만 아니라 <바리데기>를 읽는 우리 모두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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