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물무늬 > 그리스도의 궁극성과 타종교와의 대화
오직 예수 이름으로만?
폴 F. 니터 지음 / 한국신학연구소 / 198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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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궁극성과 타종교와의 대화 -오직 예수 이름으로만?

문제제기

개혁주의 신앙에 기초한 복음주의 신학과 신앙에서 가장 중심을 이루고 있는 것은 예수의 인격과 그 사역에 대한 고백이다. 즉, 예수가 하나님의 성육신으로서 인성과 신성을 동시에 지니고 인간의 구원을 위해 죽고 또한 부활했다는 것이다. 이런 고백의 특징은 배타적 궁극성으로 예수만이 구원의 길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여러 종교를 만날 수 있고 역사 상대주의가 일반적으로 인정되는 상황에서 다음과 같은 의문을 던지게 한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신다는 것은 보편적인 것임(딤전2, 4)에도 왜 예수가 존재한 역사와 직접적으로 관계된 사람들에게만 구원을 주셨다고 봐야 하는가?", "카톨릭과 불교가 서로 왕성한 교류를 나누는 상황에서 기독교는 불상의 목을 자르는 일을 저질러 일반인으로부터 질시의 눈길을 받고 있는데, 이런 배타성은 옳은가?", "예수께서 가장 큰사랑은 친구를 위해 목숨을 내어주는 사랑이라고 하시고 그렇게 행하셨으며, 또한 그 열매를 통해 나무를 안다고 하셨는데(마12, 33), 타종교들 안에서 이런 선한 행위들이 나타나는 것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최후의 심판을 양과 염소의 비유로 말씀하실 때 천국에 들어가는 자를 가리는 기준은 단지 어려운 사람을 도왔는가에 달려 있었는데(마25, 31-46) 타종교인이 이렇게 행한 것은 어떻게 되는가?" 결국 이런 의문의 중심에는 '예수만이 구원의 유일하고 궁극적인 길인가?'라는 것이 있다. 이런 예수의 궁극성의 문제에 대해 기독교 내에 존재하는 의견들을 정리해보고 이를 기초로 타종교와의 대화는 어떻게 가능하고 또한 어떻게 전개되어야 하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종교적 다원주의를 향한 그리스도적 태도들  

1. 보수적인 복음주의 모델- 참된 종교는 하나이다 : 개혁주의 신학의 전통을 이어가는 보수적 복음주의 모델은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 계시된 진리에만 존재하고 다른 모든 종교는 불신앙이라는 배타적인 관점을 주장한다. 이런 주장의 근거로 그들은 성경의 증언과 예수를 통해 이뤄진 진리의 성취를 얘기하는데, 이런 관점을 학문적으로 잘 정리한 대표적인 신학자가 바르트이기에 그의 관점을 중심으로 살펴본다.
바르트는 역사 상대주의의 주장을 수용하지만 오히려 인간이 이런 유한한 존재이기에 하나님과 질적인 차이가 있고, 결국 이로 인해 오직 하나님의 직접적인 계시만이 진리를 드러낼 수 있다고 본다. 이 직접적인 계시가 바로 예수와 성경의 말씀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사실이 이런 계시의 내용과 반대되어도 이것은 유한한 것이고 거짓이며 오직 예수를 통한 구원만이 진리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이유로 복음이 아닌 다른 모든 종교는 불신앙이고 이것은 기독교에도 적용되는 것이 있다. 즉, 기독교가 참된 유일의 종교인 이유는 경험적으로 타종교보다 기독교가 우월한 어떤 역사적 내용이나 형식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오직 은혜로 주어진 예수 안의 계시와 구원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모델이 지닌 장점은 인간이 처한 현실에 대한 정확한 통찰을 준다는 점이다. 즉, 인간 스스로의 노력으로 구원에 이를 수 없고 이성과 선한 의지 그 자체는 자동적으로 진보를 보장할 수 없다는 진실과 '악과 인간의 본질적인 한계성'을 드러내 준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장점에도 불구하고 이 복음주의 모델은 몇 가지 문제점을 지니고 있다. 우선 이런 관점은 타종교와의 대화와 그것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신적 은혜의 충만함을 잃게 하고 기독교의 생동적인 두 출처인 전통(성서와 이에 대한 해석들)과 경험(실천을 통한 깨달음) 가운데 후자를 잃게 한다. 즉, 해방신학에서 말하는 것처럼 예수의 진리는 상황 속에서 실천을 통해 깨달아 가는 것임을 포함하는데 이를 잃게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현대의 신약성서학이 발견하는 사실과 상충된다. 또 그리스도를 기독교의 해석에 한계 지음으로 인해 예수와 하나님의 사랑이 지닌 보편성을 오히려 축소시키고 다원화되어 가는 시대 속에서 도태시킨다는 것이다. 게다가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것을 우리가 예수의 신비와 그 의미를 완전히 파악하여 소유한 것과 동일시하는 문제를 지니고 있다.

2. 개신교 주류의 모델: 구원은 그리스도 안에서만- 개신교 주류 모델은 복음주의 모델처럼 그리스도 안에서만 구원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것과의 차이는 개신교주류 모델이 타종교에 대해 보다 적극적이고 대화적인 접근을 포함한다는 점이다. 이는 타종교에 하나님의 일반계시가 존재한다는 것 때문이다. 즉, 일반계시로 인해서 예수 안에 계시된 신이 타종교를 통해서도 참으로 말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반드시 그렇게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직접적인 근거는 신약성서와 인간의 종교적인 경험의 정황 속에서 동시에 발견된다. 즉, 신약성서에 고백되는 하나님의 사랑은 모든 인간에게 적용되고 동시에 자연계시를 포함한 일반계시를 증언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타종교 안에 나타나는 신적이고 궁극적인 경험들이 이를 지지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종교에 구원이 있다는 것은 아니다. 개신교 주류 모델은 예수의 배타적 유일회성을 강조한다. 즉 타종교 안에 드러난 일반계시를 통해 그리스도의 구원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준비케 하고, 오직 그리스도에게만 궁극적인 구원을 계시했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의 장점은 보편계시를 부분적으로나마 인정하기 때문에 타종교의 긍정성-타종교를 신의 사랑을 인식케 하는 신의 도구로 보는 것-을 인정하게 하고 이를 기초로 대화의 초석을 놓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점은 첫째로 "오직 그리스도로만"에 대한 확신이 맹목적으로 타종교에 대해 보고 싶은 것만 보게 하여 바른 이해를 가로막는 점이 있고 둘째는 타종교는 일반계시이고 기독교는 구원계시라고 구분하는 근거가 불충하다는 것이 있다. 게다가 이런 구분은 사랑의 신에 대한 신앙을 위협한다. 즉, 인간을 좌절시키고 죄성에 묶어두는 신지식을 제공하는 신은 변덕스럽고 고통을 주는 신으로 보게 한다. 그리고 셋째는 그리스도가 유일한 구세주라는 주장이 신의 보편적 구원의지와 공존할 수 없고 예수에 대해 '하나이며 유일한'이라고 진술하는 것이 그의 존재론적 본질에 대한 묘사로만 해석되어야 할 필연성이 없다는 것이다.   

3. 카톨릭의 모델: 길은 많으나 규범은 하나- 카톨릭 모델은 그리스도교 모델 중에서 가장 개방적이고 자유주의적이다. 이는 카톨릭 모델에서 타종교를 구원의 또 다른 길로 인정해야 하며 이 때 기독교적 구원이 타종교의 진리에 대해 모범적인 규범으로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주장의 근거는 신이 전 인류를 구원하려는 의지를 가지고 있다는 신념과 인간의 본성에 본질적으로 선험적 계시가 있다는 것, 그리고 계시하고 있는 은혜와의 만남은 다양한 실제적 삶의 정황 가운데 경험된다는 점에 근거한다.
카톨릭 모델의 장점은 첫째 그리스도의 신이 보편적 사랑의 신임을 일관성 있게 표현한다는 점이다. 물론 모든 종교에 구원의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 꼭 필연적으로 모두 구원이 있다는 것을 말할 수 없음이 지적되어야 한다. 둘째는 그리스도를 모든 종교 안에 작용하는 신적 현존을 분명히 표현하고 성육화시키는 구원의 긍정적 원인으로는 보는 점이다. 이는 초대교회 전통 중에 로고스 그리스도론에 일관되어 있지만 그럼에도 그리스도가 모든 종교의 규범이어야 할 근거는 불충분하다. 셋째는 개종이 아니라 인류공동체에 대한 공헌과 타종교에 대한 배움을 통한 기독교인의 성장을 목표로 한 대화로 인도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실제적 적용에서 문제점을 지니고 있다. 다음으로 단점은 이 모델이 대화로 인도하지만 이미 정답이 정해져 있기에 이를 엄밀한 의미에서 대화라 할 수 없고 그리스도의 규범성과 궁극성에 대한 신념이 기독교 메시지의 본질을 구성하고 있다고 주장할 충분한 근거가 없다는 것이다.    

4. 신 중심적 모델 : 중심에 이르는 많은 길들-이 모델은 카톨릭 모델보다 더 나아가 타종교의 구원을 인정하는 것은 물론이고 동시에 기독교의 구원이 모범적 규범일 필요가 없으며 타종교에도 나름의 유일성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을 대표하는 죤 힉의 신학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힉은 모든 종교의 배후에 하나의 신적, 궁극적 실재가 있는데, 인간의 유한한 경험에 역사적, 문화적, 심리적 차이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각 종교의 차이가 생겨나고, 결국 모든 종교적 표현은 상대적이 된다는 것이다. 이 때 이런 표현들은 경쟁적이거나 동등하게 충분한 것은 아니다. 이 때 이 상대성이 동등성을 의미하지 않기 때문에 종교 간에 우열을 가릴 기준이 필요하게 된다. 이에 대해 힉은 한 종교의 가치나 진리는 그 종교가 "자기 중심성에서 실재 중심성에로의 전이 속에서 발생하는 인간 실존의 무한한 질적 향상을 촉진하는지의 여부, 또는 그 정도에 대한 검토를 통해 알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유일회적 궁극성을 제외하면서도 그리스도인들에게 예수가 유일회적 구세주일 수 있는가의 문제에 대해서 성육신에 대한 신화적 해석-그 내용이 거짓이라는 것이 아니라 그 의미에 대한 문자적이 아닌 신중한 해석-을 해결로 제시한다. 그리고 예수 안에 구현된 신성을 물리적 개념이 아니라 목적을 수행하는 행위로 보면 성육신은 신의 아가페가 역사 안에서 예수를 통해 온전히 구현되었다는 의미로 해석 가능하다. 결국 이런 해석은 타종교의 구원 가능성을 인정케 하여 하나님을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가 아니라 '참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만날 수 있게 한다. 그러므로 규범적 유일회성이 아니고도 기독교인에게 그리스도가 삶의 중심적이고 규범적인 것으로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신중심적인 모델에 대해 복음주의적 관점이 제시하는 비판으로는 구체적 역사에 나타난 하나님을 궁극적 실재라는 개념으로 추상화한다는 것과 그리스도를 상대화시킨다는 것, 그리고 신약성경을 신화화한다는 것과 우상숭배의 계명을 어긴다는 것이 있다. 이런 반론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구체적으로 대답할 것이기에 간략하게 얘기하면 우선 추상적이라는 것이 반론인 이유가 예수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구체성을 상실하게 한다는 것인데 오히려 신중심 모델은 이런 구체성을 포함하는 것이기에 추상성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리스도를 상대화한다는 지적은 상대화하면 구원이 존재할 수 없다는 반론인데 구원의 길이 더 있다고 해서 예수의 구원이 상실되야 한다는 필연성은 없다. 그리고 우산숭배라는 것은 하나님이 아닌 다른 존재를 숭배하게 된다는 것인데 사실 예수를 통해 현현된 하나님의 신비를 해석한 어느 한 관점만이 유일하다고 하는 것이 오히려 하나님을 형상화하지 말라는 계명을 어기고 그 형상만을 숭배하는 우상숭배인 것이다. 

5. 예수가 어떻게 유일회적인가? : 신중심적 그리스도론을 향하여-예수가 유일회적이라는 것은 신약성서를 그 본문의 역사적 상황으로만 해석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불충분하고 경험과 의미의 지평 안에서만 이해될 수 있다. 이는 그러한 지평이 역사를 통해 확대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그리스도의 유일회성이란 표현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사실 그리스도의 원초적 메시지의 초점과 중심 내용은 하나님 나라-올 것이며 이미 현재에 활돌하는-였으나 신약에서는 그리스도 중심으로 바뀌었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경험을 당시에 존재하는 유대교적 모델이나 그리스 이교적 모델로-신의 아들, 주, 로고스, 신적인 기적을 행하는 자 등-조심스럽게 표현한 초기 신자의 예수에 대한 고백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해와 신약성서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초기의 그리스도론이 다양했으며 대화를 통한 진보적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그리스도론은 어떤 변화의 과정을 거쳤는데 그것을 정확하게 추적할 수 없음에도 분명한 것은 초기에는 "신의 아들", "종말론적 아들됨"의 개념이 사용을 통해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 전해주는 부활하는 힘에 초점이 있었다-이는 막, 눈, 마, 바울에게서 확인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제2세대 신앙인들 때-요한복음의 저자의 영향 하에-에 선재적 아들됨, 성육신 신앙이 나타났다.
이런 변화를 살펴봄으로 알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론이 '단정'이 아니라 '해석'-사진이 아니라 인상화-이라는 것이다. 결국 그리스도론을 문자적으로가 아니라 상징으로서 재해석되어야 하고 다양한 상징들이 제각기 정당성을 지닌 채 보존, 조화되어야 함을 알게 된다. 즉, 어느 하나가 모든 것을 표현할 수 없기에 어느 하나가 나머지를 흡수하면 안된다는 것이다. 또한 그리스도에 대한 신약성서의 증언을 절대화시키지 말고 그것에 충실하되 새롭게 발전시키고 당시에 타종교나 문화의 상징을 이용했던 것처럼 그리스도론을 새롭게 해줄 이미지들에 개방시켜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신중심주의의 갱신과 복귀가 중요하다.
물론 신약성서의 증언에 나타나는 그리스도의 배타성과 규범성의 문제는 남는다. 그러나 그리스도론이 진보적이기에 새로운 해석이 필요하고 게다가 이것은 그 메시지의 핵심이 아니라 표현의 한 방식이다. 즉, 하나이며 유일하다는 제한은 그렇게 밖에 말할 수 없는 역사적- 문화적 문맥의 영향과 그 표현이 신앙 고백적 언어이기에 본질적인 내용이 아니기에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그리스도의 상대화는 유일성과 인격적 위임이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는가는 다음과 같이 설명된다. 그리스도가 절대적이지 않다는 것을 통한 위기감은 고전주의 의식과 진리는 오직 하나라는 서구철학의 전제에서 오는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에 대한 전적 위임은 예수를 통한 전적 변혁의 경험에서 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유일한 것이 아니어도 상관이 없고 타종교에 개방적일 수 있다. 또한 신앙인이 특수한 중개자를 통해 진리를 수용하게 되면 그것을 절대적이고 배타적인 것으로 바라보게 되는 문제가 있다. 그러나 중개자를 통해 알게 되는 보편적 진리에 깊이 다가갈수록 그것의 신비를 더 깊이 깨닫게 되기 때문에 자신의 신앙이 상대적임을 깨닫게 되기에 이 문제는 해결된다. 그러므로 예수의 유일성이나 규범성을 주장하지 않고도 예수를 자신의 주로 고백함이 가능하게 된다.

결론 및 타종교와의 대화
우린 지금까지 예수 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인가라는 문제에 대한 기독교 내의 의견을 살펴보았다. 이를 통해 그리스도에 관한 모델 중에서 신중심적 모델이 가장 타당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것은 모든 종교에 동일하고 동등하게 구원이 존재함을 의미하지 않는다. 사실 이 모델은 그리스도의 궁극성이 가장 규범적인 것일 수 있는 가능성을 인정한다. 단지 기독교의 구원이 가능하기 위해 굳이 그리스도의 유일성과 규범성을 주장할 필요는 없고, 우리가 모두 파악할 수 없는 하나님의 신비에 대해 개방적이고 타종교와 대화를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는 타종교에도 하나님의 보편적 구원이 존재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인정해만 한다는 것이다.
이런 결론을 근거로 구체적인 타종교와의 대화를 살펴보자. 이미 얘기된 예수의 규범성에 대한 미해결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고백적인 접근방법이 필요하다. 그리고 대화는 상대의 경험과 이해 속에서 성장할 것을 목표로 경험과 이해를 교환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우선 자기 종교에 대한 경험과 확고한 진리주장에 기초해야 한다. 그리고 모든 종교에 공동의 기반과 공동의 목표가 존재한다는 가설과 참된 변화, 전환의 가능성-어떤 개종이 아니라 신의 진리에로의 접근-을 인정해야 한다. 또한 구체적인 방법으로 타종교에 대한 지적 자료와 이를 이해하도록 돕는 상상력-유비적 상상력-이 필요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런 대화에는 새로운 진리형태가 필요하기에 이에 대해서도 개방적이어야 한다. 예를 들면 진리를 배타적 유일성으로 보지 않고 관계적 유일성으로 보는 것이 있다. 이 관계적 유일회성이라는 것은 진리가 다른 모든 진리를 패배시킴으로써 자기증명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타진리와의 관계능력 곧, 서로를 포함하면서 동시에 그 관계성을 통해 자신만의 독특한 유일성이 존재하게 되는 것을 말한다.

▶참고도서◀
다니엘 L. 밀리오리, 기독교 조직신학 개론, 장경철 역 (서울:한국장로교출판사, 1994)
폴 F. 니터, 오직 예수 이름으로만?, 변선환 역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94)
김경재, 해석학과 종교신학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97)
목회와 신학 92년 10월호, pp.55-72, 크리스 라이트, 종교다원주의와 그리스도의 유일성.
죤 H. 힉, 종교철학개론, 황필호 역 (서울: 종로서적,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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