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왕대전기 8
이정애 지음 / 서울미디어코믹스(서울문화사) / 200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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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정애를 읽을 때면 대단히 격렬하고 일관된 욕구가 북받쳐 오르는 것을 느끼곤 합니다. 그 격정적인 감정은 어떨 땐 주체하기가 힘들 정도여서 아득한 심연의 바닥을 정처없이 헤매고 있는 것 같습니다. 도저히 만화답지 않은 현학적인 문구들을 남발하는 것과 이국적 취향이 눈에 거슬리기도 하지만 이정애의 만화들이 존재론적인 우물의 깊이를 갖고 있다는 사실만은 부정할 수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존재라는 가상공간에서 인간이 느끼는 터질듯한 실존의 자각과 정신의 가늠할 수 없는 고통스런 단발마의 비명소리들.

마치 예수의 복음서들을 다시 쓰는?듯 느껴지는 열왕대전기의 경우 아마 90년대 만화판이 이룬 괄목할만한 성과로 남아야 하지 않을까요? 거의 10년 전에 시작했던 원고의 스케일 큰 구성과 철학적 주제의식은 이 작가의 상당한 식견과 안목이 있지 않고서는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현대판 구세주 신화라고 할 수 있는 <열왕대전기>는 과연 어떤 책인가? 새로운 시대에 대한 묵시론적 예감, 패러다임의 대전환적 격변기에 평범한 한 인간이 격는 눈부시게 아름다운 깨달음과 성찰의 과정이 여기에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상징주의 유파의 창시자 보들레르의 댄디를 운위하는 인물들. 지극히 명민하고 순수하게 세계를 자각하는 이들의 캐릭터는 대단한 매력을 발산하는데, 그러기에 이들의 도발은 전위적이고 파괴적이지만 매우 도덕적입니다.

모든 권위와 제도에 대한 아나키즘적 전복과 위반의 정신. 파열하는 세계 중심을 파고 들어가는 순수직관의 날카로운 통찰과 그것들의 무의미하고 지리멸렬한 일상에 대한 걷잡을 수 없는 허무감. 충동적으로 가슴을 뒤흔드는 자살에의 참을 수 없는 욕구들. 그리고 그 극한의 지점에서 온갖 인간 존재의 부조리한 조건들에 대한 절망이 홍수처럼 한꺼번에 쏟아져 내립니다. 세계와 소통이 단절되어 버린 의식, 깊은 자아의 기반에 대한 회의에 고동치는 정신이 절제없이 비틀거리며, 내면의 본질을 찾고자 하는 애타게 부르짖는 의지가 너무나 강렬하게, 거의 목숨을 건듯 아슬아슬한 질주처럼 치달리는 것입니다.

이 만화의 전체적 구도는 구질서와 새로운 질서의 대립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데, 그것은 이미 낡은 선악의 이원적 대립구조를 훌쩍 뛰어 넘어 섭니다. 세계를 바꾸고자 하는 자. 그리고 세계를 지키고자 하는 자. 이들은 모두 니체적 의미에서의 초인적 이상에 도달하고자 하는 그들만의 운명을 따르고 있을 뿐입니다. 균열하는 세계의 그 본성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나아가 그 모든 것을 사랑하고 보듬어 안기. 이 사랑이 말할수 없이 숭고하게 느껴지는 것은 무슨 까닭이었을까요? 그것은 아마도 작가가 이미 그 훌륭한 전범이라고 할 수 있는 가난한 목수의 아들 예수를 염두에 두고 있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때로 우리는 이데올로기가 삶을 유린하는 도구로 악용되는 것을 자주 경험합니다. 그러나 열왕대전기의 시닠한 등장인물들은 단지 그들을 휘어잡고 있는 전 우주적 의지에 맡겨져 있을 뿐입니다. 그 속에서 자신에게 부여된 삶과 우주의 궁극적인 섭리를 합일시키려고 하고, 인간이라는 고통스런 길을 찾아갑니다. 그 싸이클 안에서 얽혀버린 관계들은 숙명적인 동시에 너무나 치명적인 모습입니다. 그 누구보다 세계와 삶을 사랑하지만 고통스럽게 망가지고 처절히 피흘리며 죽어 갈수 밖에없는 절망적 운명의 풍경들이 펼쳐지는 것입니다. 죽음을 예감한 삶, 혹은 죽음 앞에 모든 것을 건 사랑, 그 슬픔에 대한 웅장한 대서사시를 그려내는 것이지요.

또 한가지 눈여겨 볼만 한 것은 야릇한 동성애적 감정인데, 그녀의 만화에서 빈번하게 등장하는 동성애는 이성애 중심의 권력적 성 구분을 타파하고 인간 그 자체에 대한 신뢰를 강조한다는 점에서 눈여겨 볼만한 대목인 것 같습니다.

실로 오래 간만에 참 재밌는 만화를 읽었는데, 제대로 설명하기는 쉽지 않은 것 같아 아쉽네요. 어떤 장면들의 인상적인 이미지들은 굉장히 상징적이고 거의 시적인 느낌을 안겨 주기도 하는 빼어난 수작인 것 같습니다.

궁금하면 직접 꼭 읽어 보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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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 세계문학총서 6
밀란 쿤데라 지음, 김규진 옮김 / 한국외국어대학교출판부 지식출판원(HUINE) / 1995년 8월
평점 :
절판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소설에서 그것은 토마스에 대한 테레사의 시선이다. 우리는 인생의 중요한 순간에 같은 눈높이에 있지 못할 때가 많다. 여기에 교묘한 엇갈림이 숨어 있다. 테레사는 토마스의 가벼움을 이해할 수 없었고, 토마스는 테레사의 사랑조차도 번번히 배신하며, 그 때문에 여자는 일평생 질투로 괴로워 하며 불안 속에서 지낸다. 이러한 가벼움이란 도대체 어디서 연유하는가?

1968년,소련군의 진주로 짓밟히는 체코의 정치적 상황을 보면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역사란 때때로 너무나 무겁다. 일찍히 아우슈비츠가 그러했고, 외세에 의해 무참히 좌절된 프라하의 봄이 그러하고, 군인들의 총칼에 사정없이 학살당한 1980년의 광주가 그러하다.

인간이 인간으로 여겨지지 않는 상황, 혹은 삶이 이성의 질서에 의해 거칠게 유린되는 상황, 여기서 우리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무거움을 경험한다. 선과 악이 명백히 갈라서고, 적과 아군이 피흘리며 대립되는 곳에서 심한 이율배반과 모순을 느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쿤데라는 그것을 키치라고 부른다. 키치의 세계 안에선 모든 것이 만능이다. 그 세계의 동조자가 되던가, 아니면 반대편에서 안티테제를 형성하고 영원한 타자의 낙인을 받아 투쟁하는 길이다(아! 위대한 변증법의 교리여..)

그러나 키치의 바깥에선, 놀랍게도 가벼움이 발생하고, 가벼움은 키치를 우스꽝스럽게 비틀어 버린다. 가벼움은 일종의 넘어섬으로 현실의 비극과 희극을 모두 포용한다. 삶은 얼마나 무시무시한 별종인가? 쿤데라의 뒤에서 은희경 씨가 갈파한 적이 있지만, 삶에서 아름다움과 따뜻함, 호의만을 발견한다면 반쪽짜리 관찰이다.

삶의 이면은 호의나 선의보다 장난과 악의, 짖궂은 심술과 투정으로 가득찼다. 따라서 배신이야 말로 예측불허의 삶에 맞서는 가장 훌륭한 무기이며 현명한 태도가 된다. '대열에서 일탈하여,낯선 곳으로 나아가기'를 충실하게 실현하는 사비나야 말로 가벼움의 화신이라고 할 수 있다. 토마스는 중요한 순간, 테레사를 선택함으로 자신의 인생에 족쇄를 채우는 결정적인 실수를 범하지만, 사비나는 프란츠마저 버리고 -결혼이야 말로 너무나 무거운 삶의 형식이다- 미국으로 떠나 버린다. 가히, 무소속한 존재의 상태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준다 하겠다.

그렇다면, 존재의 가벼움이 참을 수 없다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앞에서도 말했지만 테레사의 본성을 의미한다. 테레사는 천성적으로 무건운 삶을 살아간다. 그렇다고 그녀가 부도덕하거나 강압적인 기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아니다. 단지, 그녀는 삶을 진지하고 엄숙하게, 그리고 통일적으로 바라보고자 애쓴다.

그녀는 무질서하고 혼란한 것,정당하지 못한 것을 견뎌내지 못한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의 위치를 망명한 폴란드가 아니라, 자기 정체성의 근본모토인 프라하에서 찾는다. 테레사의 천성은 배신이 아니라, 키워 내는 것이다. 때문에 그녀는 신뢰의 반역을 용납할 수 없다.

토마스 부부가 키우던 개가 죽었을 때, 삶의 모든 것을 잃어번린 듯 슬퍼하는 테레사를 보라. 테레사는 무거움이지만,사랑과 온기가 있고,지켜 내려고 애쓸 뿐, 떠나려고 하진 않는다.사진기를 들고 프라하 거리로 진주하는 탱크에 저항해 용감하게 맞서는 것도 그녀의 무거움에서 기인한다. 그녀에게 가벼움은 비겁한 자기도피처럼 보이지 않았을까.

자,이제 정리해 보자. 우리는 어디를 향해 발을 내딛을 것인가? 이 소설을 읽어 보지 않은 사람이라도 제목을 모르는 사람은 별로 없다. 그만큼 이 단어가 우리의 시대정신으로 자리매김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자유롭게 훨훨 날아가고자하는 욕망. 존재의 외부에서 책임이니 의무, 신념 등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존재에 대한 비난과 힐책,강요 등으로 부터 가벼워지고자 하는 것은 인간의 근원적 바램이지 않겠는가. 그러나 누군가를 그리워하고 바라는 것은 분명 무거움의 정서이다.

그 사이에서 기우뚱 거리며, <프라하의 봄>에선 테레사에게 애정을 보내고 싶다.-왜냐면 줄리엣 비노쉬가 너무 예쁘게 나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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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쇄자 the Closer 2 - 완결
유시진 지음 / 서울미디어코믹스(서울문화사) / 200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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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별 기대없이 오래 간 만에 들른 만화방에서 우연히 유시진의 신작 단행본<폐쇄자>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만화라고 우습게 여기실지도 모르겠지만, 90년대를 관통한 지금의 시대상황에서 유시진이라는 여류 만화가의 존재는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고 생각합니다.

왜냐면 그는 무엇보다 여자고-그렇기 때문에 페미니스트라고 불릴 자격이 충분히 있다고 봅니다.- 시대적 분위기를 읽어낼 줄 아는 섬세한 통찰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녀의 화폭에서 제가 처음 받았던 인상은 하루끼적인 허무와 상실감, 왕가위에게서 느껴지는 독특한 캐릭터의 비중, 키에슬롭스키의 이미지 등이 였는데, 한 마디로 포스트모던 하다고 할까요. 뭐, 그렇다고 그녀가 의식적으로 그런 작가들을 배합하고 뒤섞어 놓았다는 뜻은 아닙니다.

특히, 그녀의 미덕은 만화적인 이미지를 매력적으로 잘 사용할 줄 안다는 것인데,<폐쇄자>에서 사용된 불타는 주황색의 강렬하고 눈부신 날개와 눈빛으로 상징되는 샨카의 자유의 이미지는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마력같은 분위기를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렇지만 <폐쇄자>는 그녀의 전작, <쿨 핫>과 <신명기>를 봤던 독자라면 좀 처지는 느낌이 들었을 것 같습니다. 판타지적 요소는 <마니>와 <신명기> 때부터 줄곧 써먹어 오던 방식이고, 세계로 부터 소외되어 고독하고 불안한 쿤과 냉소적이고 허무한 히시라, 따뜻하고 사랑스런 샨카의 캐릭터들도 유시진의 만화에선 너무나 익숙한 인물들입니다. 좀 미안한 말로 전작들의 안일한 재탕을 통한 나른한 매너리즘에 빠졌다고 할까요. 초반 부에서 박진감 있게 전개되던 긴장감이 후반부로 옮겨 가면서 느슨하게 흐트러지고, 뭔가 거창한 것을 얘기하려는 듯하다가 맥빠지게 이야기의 밀도를 떨어뜨린 감도 듭니다.

그럼에도 <폐쇄자>를 읽는 동안 무척 즐거웠던 것은 함축적 의미를 동시에 전달하는 유시진의 풍부한 이야기 전달 방식과 여전히 신선하게 느껴지는 감각적인 표현이 살아있었기 때문입니다. 유리조각에 손가락을 빈 듯한 내면적 아픔에 대한 세밀한 묘사는 이 만화가 갖는 탁월한 흡입력을 느끈히 보여 줍니다.

앞과 뒤, 뒤의 앞이란 문구로 포장된 책의 표지에서 이미 암시하듯 인간의 본성에 대한 두 가지 이면에 천착해 들어 가면서, 그런 본연의 삶을 억압하는 여러가지 사회적 기제들의 위선에 대해서도 비판하고, 역시, 상당히 공을 들인 허무주의적 성향이 짙은 캐릭터에 대한 묘사도 감칠 맛이 느껴집니다.

그녀는 <쿨핫>에서도 기억의 표피적 묘사와 삶의 다양성에 대해 언급 했었는데, 제가 생각하는 <폐쇄자>의 주제는 일상의 평온함 뒤에 감추어진 카오스, 무질서와 혼돈이 아닐까 합니다. 그것은 특별한 감각의 전이를 통해 경험되는 전혀 다른 차원의 세계이고, 개인적 진실이 발판으로 삼고 있는 기억의 근거를 뒤흔드는 행위입니다. 손쉽게 규범화되고 계획된 삶의 일면을 벗껴내면 광끼와 혼란으로 가득찬 카오스의 세계가 등장하는 것 입니다.

이상으로 유시진의 <폐쇄자>에 대한 대략적 감상을 정리해 봅니다. 그녀의 캐릭터는 대체로 세계로 부터 고립되어 있고, 그래서 유아적인 독단론에 빠져있다는 비난으로부터도 자유로울 수 없을 것같습니다. 하지만 <쿨핫>에서의 동경이 만큼이나 고집스레 자신의 세계를 만들어 가고 있는 역량있는 작가의 다음이야기가 저는 무척 궁금해 지지 않을 수 없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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