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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의 자리로 - 그 나라를 향한 순전한 여정
C. S. 루이스 지음, 윤종석 옮김 / 두란노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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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 소개된 루이스 책은 두꺼운 책이 거의 없다. 그러나 편한 마음으로 집어들었더라도 읽을 때마다 늘 어렵다고 느낀다. 하지만, 루이스의 책처럼 하나의 주제에 대해 쓰여진 얇은 책을 읽어 내려가다보면 감탄하게 만드는 책도 없다.


특이하게도 이번 책은 루이스의 책들에서 '신자의 자리로'라는 주제 아래 각 책들에서 선별하여 엮은 책이다. 개인적으로는 이런 방법으로 루이스의 글을 띄엄띄엄 보는 것은 조금 조심스럽다는 입장이지만, 읽고 나니 많은 책들에서 이렇게 한 주제 아래 책들의 부분, 부분들의 집합을 만들어 낸 결과물이 놀랍다고 느껴진다. 오히려 정교하게도 원래 한 책인 것 같은 느낌을 자아낼 정도였다. 루이스가 원래 서술 방식이 나름의 독특함이 있어서 그 서술 방식의 일관성이 빚어낸 놀라운 결과물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중요한 것은 변화 자체의 성격이지 그 일이 벌어질 때의 감정 상태가 아니다.

즉 자신의 노력을 믿던 우리가 이제 변화되어,

스스로 해내려고 애쓰는 행위를 모두 단념하고 하나님께 맡기게 된다는 것이 핵심이다.

신자의 자리로, C.S.루이스, 두란노, p.17


제목부터 심상치 않다. 루이스의 책은 주로 근본을 다루었다. 근본을 다루기에 주로 변증하는 방식이 주였다.(내가 읽은 책들이 주로 그랬다) 하지만, 이 책은 회심한 신자의 관점에서 '신자의 자리'를 고민하는 이 책은 변증보다는 실제적인 믿는 사람의 삶과 고민을 다루고 있다는 면에서 한켠으로 루이스와 내가 한 동지라는 느낌이 들어 즐겁기도 했다. 또 한켠으로는 신자의 삶을 바라보는 관점이 나와 격차가 너무 차이가 나면 어쩌지 하는 염려도 들었다.


읽고 나서 보니, 어느 부분은 비슷하고, 어느 부분은 차이가 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 차이는 신자로서 제대로 고민을 해 본 적이 있는 부분인가 아닌가의 문제이지 근본적인 차이는 없는 것 같았다. 루이스는 성년이 다 되어서 '예기치 못한 기쁨'에서 소개된 것처럼 회심했다. 대단한 것은 아니지만, 그의 회심기는 상당히 철학적인 물음 앞에서 답을 찾아가던 과정이었고, 변증의 과정이기도 했다. 아래 발췌된 것처럼 '내적 갈망의 대상'의 답을 찾아가던 과정에서 예기치 못한 기쁨의 대상을 찾아버린 것이었다.


“무엇이 내 갈망의 대상이냐?”라고만 묻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 질문은 나를 경외의 땅으로 밀어넣었다.

나는 절대 고독 속에는 자아의 바깥으로 나가는 길, 즉 그 무언가와의 교류가 있는데,

그 무언가는 감각의 대상이나 우리의 생물학적 필요, 사회학적 필요, 상상의 산물, 마음상태와 동일시되기를 거부하면서,

자신이 순전히 객관적인 존재임을 주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 무언가는 몸보다 훨씬 더 객관적인 존재이다. 왜냐하면 몸처럼 감각의 옷을 입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감각의 옷을 입지 않은 ‘타자’, 형상도 없고(우리는 상상력을 동원하여 오만 가지 형상을 만들어 내서 절을 하지만)

무엇으로 규정되지도 않는 미지의 존재, 갈망의 대상이었다.

기치 못한 기쁨, C.S.루이스, 홍성사, p.(어디쯤)


그 물음의 답을 찾아헤맸던 사람이었기에 그 과정에서 만난 많은 질문에 답을 이미 찾아 놓은 듯 했다. 이렇듯 정답인 것처럼, 루이스의 책은 늘 단호하다. 하지만, 진지한 고민 앞에 서면 그의 대답이 거의 정답에 가깝게 느껴진다. 이 책에서 소개된 신자로서의 고민과 질문도 마찬가지다. 루이스 만의 정답이지만, 함께 성장해 가는 신자로서의 정답이기도 하고, 나에게 있어 정답이기도 하다.


순전한 기독교 4장을 읽다가 퍼뜩 깨달음을 얻은 순간이 지금도 기억난다.

루이스의 설명에 따르면, 그리스도인이 될 때

우리는 우리를 온전하게 빚으시려는 하나님의 작업에 합류한 것이며,

과정에 수반되는 고통을 거부한다면 이는 하나님의 사랑이 미진하여

언제라도 우리를 포기하실 거라고 주장하는 샘이다. ... '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 단번에 이루어지는 사건이 아니라 기나긴 여정이며,

나와 가장 가깝기에 내 부족한 모습에 가장 큰 영향을 입을 사람들이

곧 이 성화 과정에서 하나님이 주로 쓰실 교실임을 일깨워주었다.

신자의 자리로, C.S.루이스, 두란노, 엮은이의 글 중에서, p.10


변증의 글도 포함되어 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이는 루이스의 독보적인 특기 아닌가! 그리고 그가 쓴 상당의 책이 변증서라는 것을 생각하면 당연하다. 특히 이성, 자기부인, 기독교의 불변성, 위선, 이분법을 다루는 장에서는 그의 주특기가 많이 드러난다. 신자로서의 삶을 위해 이렇게까지 고민의 과정을 거쳐왔다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다.


서두에서 루이스는 독자에게 신앙인으로서의 여정 중에 어디쯤 와 있는지를 점검하게 만든다. 이 영원한 우주 속에서 티끌에 지나지 짧은 시기를 살아가는 신앙인에게 그 시기를 어떻게 보내고 있는지 묻는다. 이 질문에 제대로 대답을 해야 신자의 고민에 합류할 수 있다. 질문의 핵심은 우리를 이끌어 이 세상이 아닌 세상 너머의 그 곳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께 제대로 의탁하고 있는지에 질문이다. 대답해야 한다.


중요한 것은 변화 자체의 성격이지 그 일이 벌어질 때의 감정 상태가 아니다.

즉 자신의 노력을 믿던 우리가 이제 변화되어,

스스로 해내려고 애쓰는 행위를 모두 단념하고 하나님께 맡기게 된다는 것이 핵심이다. (p.17)

...

처음에는 도덕과 의무와 규율과 죄와 덕이 기독교의 관건인 것 같지만,

기독교는 우리를 이 모두에서 이끌어 내 그 너머의 세계로 데려간다.(p.22)

신자의 자리로, C.S.루이스, 두란노, p.17~22


질문에 대답한 독자는 이제 루이스가 안내하는 신앙인으로서의 고민에 대해 함께 철학하게 된다. 철학하게 된다는 표현은 어렵게 들리지만, 생각하며 읽게 된다는 관점에서 보아도 그렇고, 루이스의 해설을 읽어보아도 저 표현이 자연스럽다. 어렵게 느껴질수도 있지만, 그 고민들은 정말! 실제적이다. 집에서 나는어떤가? 문제의 인간이 주변에 있으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용서를 어떻게 실천해야 하는가? 과학에 대해서는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가? 사랑하지 않는데 사랑해야 하는가? 삶의 현장에서는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이런 질문들이다.


역시, 루이스와 함께하는 우리의 고민, 우리의 철학은 실용적이다.


15개의 장을 통해서 루이스는 명쾌한 답을 제안하거나 '이런 상황에서는 이렇게 해야 한다'는 식의 해법을 제안하지는 않는다. 대신 독자들에게 생각할 기회를 던져주고, 함께 고민한다고 표현한 것처럼 그의 고민 내용을 들려준다. 그러다보면 나의 답, 나의 해법을 찾아갈 수 있다.


믿음을 공격하는 것은 당신의 오감과 상상이다.

신약에 나와 있듯이 이는 '믿음과 이성의 싸움'이 아니라,'믿음과 보는 것의 싸움'이다.

듣거나 보기에 너무 위험하지만 않으면 우리는 명백히 위험한 일도 능히 감당해 낸다.

대개 우리의 진짜 문제는 명백히 안전한 일이 무서워 보일 때다.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의 신앙이 흔들릴 때는 진정한 논증으로 공격당할 때라기보다

신앙에 개연성이 없어 보일 때다.

즉 온 세상이 그런 멍한 표정을 지을 때다.

이 표정은 실재보다 우리의 감정 및 인식 상태에 대해 훨씬 많은 것을 말해 준다.

신자의 자리로, C.S.루이스, 두란노, p.73


그런데 특이할만한 것은 이 책을 관통하는 루이스의 제안 사항이 있는데 바로 '하나님의 관점'이다. 예를 들어 3장의 '품기 힘든 문제적 그 인간이 있는가?'에서는 그 인간은 바로 나이므로 하나님의 관점에서 해석해 보라고 제안하고, 4장의 '재림의 복음, 나의 오늘을 어떻게 바꾸는가?'에서는 하나님의 마지막 날에 초점이 있으므로 모든 것을 그 초점으로 보고 어디에서 무얼하고 있었는지 정직하게 대답할 것을 루이스는 제안한다. 또한 5장 '줄기찬 일상 속 도발, 용서를 계속실천하려면?'에서는 용서하는 삶은 하나님을 빗대어 이웃을 어떻게 대하여야 하는지를 고민하라고 한다. 이런 방식으로 루이스는 '하나님의 관점'을 매 장마다 제안하며 나의 관점을 조정할 것을 요청한다.


자비란 '기독교적 의미의 사랑'을 뜻한다.

그런데 기독교적 의미의 사랑은감정이 아니다.

기분이 아니라 의지의 상태다.

누구나 본인을 향해서는 그런 의지가 본능적으로 있으나

타인을 대할 때는 이를 학습해야 한다.

신자의 자리로, C.S.루이스, 두란노, p.136


루이스의 제안에 동의했다면, 우리는 위 인용구의 예처럼 루이스는 신자에게 의지를 가지고 실천할 것을 강하게 말하고 있다는 것에도 동의해야한다. 신자의 삶은 단순히 고민하고, 사유하는 것에만 그치지 않는다. 실천하는 삶을 살기 위한 부단한 노력의 한 가운데 믿음이 있고, 하나님의 관점으로 세상을 보는 눈이 있다는 사실을 은연 중에 알려준다. 우리는 의지를 가지고 하나님의 관점으로 세상을 부단한 노력으로 살아가야 하는 신자다!


#신자으자리로 #CS루이스 #두포터10기 #두란노 #나를복음으로살게한문장 #독서 #신앙서적 #독후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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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에서 답을 찾다 - 모든 시작점은 '나'가 아니라 '하나님'이어야 한다 조정민 목사의 창세기 돋보기 1
조정민 지음 / 두란노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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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시작에서 답을 찾기 위해서 창세기에서 시작한다. 모든 것의 시작 창세기를 통해 답을 찾으려는 저자의 시도는 아마도 표지에 '창세기1'로 표시된 것으로 보아 시리즈 설교를 염두해 둔 것 같다. 본 책에서 창세기 6장까지 다루어졌으니 저자의 책은 그 이후 장으로 이어질 것으로 기대된다.


책을 읽으며 나갈 때 한 권의 책을 관통하는 주된 키워드가 무엇인가를 늘 염두하며 읽는 습관이 있는데, 이 책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둘인 것 같다. 바로 안식과 동행. 실제로 안식은 책의 앞 부분에, 동행은 책의 뒷 부분에 주로 다루어지지만, 이들 두 키워드는 모든 내용의 기반이 된다.


하나님의 창조를 믿는다는 것은 관점의 뿌리가 바뀜을 의미합니다.

세상의 관점이 뿌리째 뽑히고, 하나님의 관점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거기서부터 모든 관계가 새롭게 시작합니다.

시작에서 답을 찾다, 두란노, 조정민, p.61


바로 그 시작을 위한 이야기의 시작은 ‘원형 origin’에 대한 내용이다. 창조, 하나님의 형상, 안식, 죄, 부끄러움, 죽음, 후손, 타락에 이르기까지 성경에서 창조를 기점으로 세상의 원형이된 중요한 사건들을 다룬다. 저자의 말대로 성경이 과학책은 아니기 때문에 창세기의 한 단어 한 단어를 꼽씹어 보는 것보다 맥락과 의미가 더 중요하다고 본다.


시작에서 답을 찾기 위한 저자의 시작은 당연히 창조이고, 창조는 믿음을 요구한다. 창조 없는 믿음은 없고 믿음 없는 창조도 없다. 여기에서 신앙인과 비신앙인이 갈리는 지점이고, 삶이 달라지는 지점이고, 향후 이어질 안식을 누릴 수 있는지 여부의 지점이 되고, 동행 여부가 결정되는 지점이 된다.


더우기 중요한 것은 이 창조를 믿는 믿음을 통해 구원이 가능하다. 저자는 구원을 재창조라고 언급한다. 결국 창조의 개념은 하나님이 이 세상을 맏드셨다는 기원을 믿는데서 나를 구원하셨다는 믿음으로 이어진다.


구원은 창조주의 재창조 사역입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라는 말씀이 믿어지지 않으면, 구원을 받아들 일 수 없습니다.

창조가 믿어지지 않으면, 구원은 내 사건이 되지 않습니다.

십자가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하면, 구원은 한낱 개념에 불과하게 됩니다.

시작에서 답을 찾다, 두란노, 조정민, p.25


저자는 구원의 본질을 알기 위해 창조를 이해해야한다는 주장이며, 그 내용을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볼 수 있다. "창조의 이해 > 창조의 동의 > 창조의 관점 > 새로운 이해 > 새로운 관계" 이러한 순서를 통해 '창조는 새로운 삶의 시작이고, 출발점(p.63)이라고 저자는 강조한다. 결국 창조를 믿음으로 새로운 관계가 성립되는데, 그것은 사람들과의 관계가 아니라 우선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다. 그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이 믿음이다.


창조에 대한 개념 이해를 통해 우리는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욱 깊이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성경은 기본적으로 태초에 하나님이 만물을 온전하게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전제합니다.

그래야만 하나님에게 돌아갈 때 회복할 수 있고, 구원에 의미가 있습니다.

창조를 들여다보면 볼수록 구원의 본질이 무엇인지에 다가가게 됩니다.

창조를 이해하지 못하면, 구원은 무의미할 뿐입니다.

하나님의 창조는 하나님의 질서입니다. 온 땅과 하늘의 질서이고, 온 우주의 질서입니다.

시작에서 답을 찾다, 두란노, 조정민, p.57


드디어 안식에 대한 개념이 직접적으로 등장한다. 저자는 안식은 존재의 근원을 기억하는 시간임을 설명(p.93)한다. 안식을 통해 인간이 하나님과 관계해 있음을 깨닫기 때문이다.


독특한 해석이기도 한데, 안식을 누리는 것을 쉽게는 편안한 삶, 평안한 상태, 몸과 마음이 즐거움, 이렇게 쉽게 이해하는 편인데, 저자는 안식을 하나님과의 관계를 기반으로 생각하라고 권면한다. 안식은 몸과 마음이 편한 상태를 향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인간의 본질의 안정적인 상태를 향한다. 인간의 본질은 결국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발견될 수 있고 이해될 수 있는 관계이므로, 결국 기독교인들이 \말하는 ‘안식을 누리는 삶’은 하나님과 친근하게 관계하며 나의 본질을 깨닫는 삶이다.


안식은 시간의 분리이며 일에서 사람을 건져 내는 시간입니다.

일에서 잠시 떨어져 일을 시작하신 분을 바라보는 시간입니다.

우리는 그 시간 안에서 일의 의미와 목적을 회복합니다. 그래서 비가시적입니다.

시작에서 답을 찾다, 두란노, 조정민, p.89


3부에 이르러 드디어 죄의 문제에 도달한다. 창조로 시작하여 안식에 이르렀으나 죄가 등장한다. 저자는 죄의 시작과 죄로 인한 결과인 죽음을 설명한다. 죄의 파괴력은 실로 대단해서 저주가 내렸을 뿐아니라 죽음에 이르게 된다. 창조 이후 죽음의 등장은 이 세상을 말할 수 없는 탄식의 상태로 전환시킨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대로 내버려 두시지 않는 반전이 있다. 하나님은 죄인을 부르신다. 죄로 인해 인식할 수 없는 삶을 살아가게 된 인간을 부르신다. 그 부르시는 목적은 용서를 위한 목적이고, 용서를 통해 안식할 수 있도록 인도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하나님과 관계하며 함께 하기 위함이다. 이렇게 죄인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가 창세기 전반에 서려있음을 우리는 볼 수 있다.


하나님이 그를 용서하기 위해 부르십니다.

심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원하기 위해서 부르십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기회요 특권입니다.

시작에서 답을 찾다, 두란노, 조정민, p.163


자연스레 죄의 상태에서 우리를 불러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는 가장 중요한 화두인 동행으로 이동한다. 그런데 11장의 소제목이 가슴을 찌른다. ‘교회를 다녀도 왜 죄를 이기지 못하나?’ 4부의 소제목으로 너무나 적절하다. 이제까지 창조를 거쳐 안식에 이르고 죄가 등장하고 이름을 불러주시는 하나님의 은혜, 긍휼을 경험했으나, 우리는 왜 죄를 이기지 못하는가.


저자는 하나님을 아는 인간이라도 안식하는 삶과 안식하지 못하는 삶은 구분되며 그 차이를 이 장에서 충분히 보여준다. 히브리서 기자의 말씀대로 ‘하나님을 알았으나 등을 돌리고 떠난 사람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는데 하나님을 모르는 인간의 행위가 아니었다. 이러한 행위는 현대를 살아가는 모든 인간에게도 동일하다.


4부에서 저자의 기술 방법은 ‘대조’다. 하나님을 알거나 모르거나 결국은 하나님과 동행하며 사는 사람과 동행하지 않는 사람과의 대조다. 동행 여부에 따라 성경의 인물들의 삶은 극명히 대조된다. 결국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아가는 삶이 동일한 상황에서 어떻게, 무엇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갈라지지는데, 그 순간에 세상과 다른 무엇을 위해, 세상과 다른 방법으로 선택하는 사람이 결국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이며, 하나님 안에서 안식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다.


하나님의 사랑을 양껏 받으면,

세상 속에서 살면서도 세상에 속하지 않은 자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속에서 살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사는 것입니다.

시작에서 답을 찾다, 두란노, 조정민, p.247


#시작에서답을찾다 #조정민 #두포터10기 #나를복음으로살게한문장 #두란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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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잠언 : 성공편 황명환 목사의 잠언 강해
황명환 지음 / 두란노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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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기 위해, 그리고 읽다만 책을 다시 읽기 위해서 항상 책 표지를 보게 되는데, 책 표지에는 많은 의미가 담겨 있다. 이번 책은 어떤 힌트가 표지에 있을까 곰곰히 살펴보다가 정말 다양한 색으로 채워진 화폭이 먼저 눈에 들어왔고, 정 가운데 흰 손 글씨의 The Proverbs가 눈에 들어왔다. 의도한 것일지는 모르겠으나, The Proverbs의 양 끝 손글씨는 좌에서 우까지 쭈욱 뻗어 있다. 다양한 색으로 채워진 인생들은 정말 갖가지 형태이겠지만, 잠언의 교훈이 이들 인생을 감싼다는 의미일까? 혼자서 이렇게 의미를 부여해 본다.


이 책은 분명 잠언의 '강해' 책임에도 불구하고 부제가 '성공편'이라는 단서가 붙어 있다. 사람들은 단 한번 뿐인 인생을 살아가며 '이망생' 보다는 '성공'을 꿈꾼다. 하지만 하나님을 믿으면 믿을수록 그 성공을 향한 갈망은 조금 그 결을 달리하게 된다. 그런 차원에서 부제가 붙어 있는 것에 대한 약간의 아쉬움, 실망감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오해는 서문에서 풀린다. 잠언의 대 주제인 '지혜', '성공', '행복' 가운데 성공에 대한 주제에 대한 내용을 다루기 때문이다. 세상에 나와 있는 많고 많은 자기개발서들은 한결 같이 성공을 추구하고, 그 성공을 위한 실질적인 가르침을 주려고 하는 책들이 얼마나 많은가. '000하기 위한 00법, 000를 위한 0가지 방법, 이대로만 하면 000한다' 하지만, 내용은 우리가 많은 자기개발서들에서 기대하는 그런 내용이 아니다. 그런 내용을 기대한다면 오히려 오산이다.


세상은 놀랍게 변하고 있습니다.

시시각각 변하는 세상의 속도를 따라가려니 자꾸 기준이 흔들립니다.

하나님은 변함없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 그것이 확인되고 인정되고 고백되지 않으면

우리 삶은 불안합니다. 결코 행복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인생 잠언, 황명환, p.108


이 책은 잠언의 12~21장을 다룬다. 성공이라는 큰 주제 아래에서 다시 네 갈래의 내용을 이 책은 쓰여졌다. 인격의 성숙, 행복이 오는 길, 더불어 사는 삶, 품격있는 삶. 잠언을 읽어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잠언 각 장의 주제가 항상 명확하게 딱 떨어진 주제 아래 쓰여 있지는 않다. 몇 가지 주제가 섞여 있는 것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저자는 너른 범위의 말씀을 네 가지의 큰 갈래로 묶는데 좋은 능력이 있다. 모든 말씀이 하나의 주제로 모여진다.


예를 들어 3부는 더불어 사는 삶이다. 그 갈래 아래, 스스로 외톨이가 되지 말라는 제안, 말 때문에 산다는 조언, 성실함이 삶의 key라는 힌트, 질서의 자세를 설명한다. 특히 질서의 자세는 잠언 19:12-17의 말씀이 배경이다. '왕의 노함 & 그의 은택'은 지도자와의 관계에서의 질서, '미련한 아들, 다투는 아내'는 가정에서의 질서, '계명을 지키는자, 자기의 행실'은 일터에서의 질서를 이야기 한다.


느낄 수 있겠지만, 이 책은 강해서이지만 풀어주는 강해서라기보다는 적용하기 위한 강해서에 가깝다. 잠언의 특징은 그 말씀 그대로 이해될 정도로 난해하거나 어렵지 않음에도 이렇게 하나의 주제로 묶여지니 더 잘 이해되고 적용될 수 있을 것 같다.


행복의 중요한 요소가 관계입니다.

다른 사람을 받아들이는 만큼 행복해집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들에게 마음을 여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21세기의 핵심 용어 중 하나가 '공동체'입니다. 외톨이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내게 주신 공동체를 소중히 여기고, 함게 살아가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인생잠언, 황명환, p.120


알다시피 잠언의 특징은 대구(對句) 혹은 대조(對照)에 있다. 거만한 자 vs 지헤 있는 자, 마음의 즐거움 vs 마음의 근심, 명철한 자 vs 미련한 자, 마음의 고통 vs 마음의 즐거움, 악인 vs 선인, 악한 사자 vs 충성된 사신, 젊은 자의 영화 vs 늙은 자의 아름다움. 정말 여러가지의 대구절로 채워진 잠언은 비슷비슷해 보여도 그 한 절, 한 절이 매우 아름답고 금언에 가깝다.


이 잠언의 특징이 이로운 점은 독자로 하여금 기억하기 쉽게 하는 것도 장점이지만, 그 교훈을 명확히 하고, 이해하기 쉽게 한다는 데에 있다. 이 점이 잘 드러나는 곳은 바로 제2부의 행복편의 '행복은 목적이 아니라 결과입니다' 부분이다. 행복은 목적이 아니라, 결과다,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것이 나의 행복,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부터 주어지는 것, 이렇게 저자의 풀이 조차도 대구, 대조로 이루어져 있어서 쉽게 다가오고 마음에 자리 잡힌다.


사람들이 사실이라고 하는 것은 사실처럼 보일 뿐입니다.

진정한 사실은 하나님이 보시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변명합니다.

그러나 변명은 사람에게나 통하는 것이지,

하나님 앞에서는 통하지 않습니다. 더 깊은 것을 다 아시기 때문입니다.

인생잠언, 황명환, p.58


확실히 수서교회의 목사님이신 저자의 글쓰기는 거의 설교문에 가깝다. 저자는 목회자의 관점에서 수서교회 성도에게, 그리고 이 책을 읽은 한국교회의 성도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먹기 좋게, 씹기 좋게, 소화하기 쉽게 전해주려는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져 온다.


책을 읽고 나니, 표지로 다시 돌아간다. 인생 잠언의 성공편, 성공은 '하나님과 얼마나 가까이 지내는가'가 그 척도이고, 하나님과의 삶은 나의 목적, 마음, 행동, 인격, 언어 등 삶을 바꾸어 놓는 주체라는 사실이며, 그것은 나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며, 나와 가까이 하시는 하나님의 은헤로 말미암는 것이라는 나만의 결론에 이른다.


이 짧은 문장의 모음집인 잠언은, 이렇게 우리의 성공 가도에 가이드가 되어 준다.


우리는 선과 악이 공존하는 모호한 세상을 살아갑니다.

사람들은 그 모호한 세상의 겉모습만 보고, 현재의 모습만 봅니다.

그러나 겉이 아닌 깊은 곳, 현재를 넘어 더 멀리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선은 반드시 승리합니다.

선을 따라갈 때, 하나님은 우리 양심에 위로와 평강을 주십니다.

그 길을 바로 걸어갈 때 승리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인생잠언, 황명환


#인생잠언 #황명환 #두포터10기 #두란노 #나를복음으로살게한문장 #독서 #후기 #독후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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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남에 관하여 팀 켈러의 인생 베이직
팀 켈러 지음, 윤종석 옮김 / 두란노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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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에 관하여’ 책을 먼저 읽은 후에 읽게 된 ‘태어남에 관하여’. 책을 읽기 전에 예상은, '흠.. 분명 구원, 거듭남에 대한 내용일거야. 그것만으로 100페이지는 충분할거야'라는 추측으로 읽기를 시작했다. 읽고서 보니 그 추측은 1/3 정도 맞은 것 같다.


팀 켈러는 태어남에 대하여 두 가지 측면을 설명하고 있다. 쉽게 표현해보면 육체적인 태어남, 그리고 영적인 태어남이다. 두 번째를 일컬어 거듭남이라고 한다. 이 둘에 대하여 설명하는 책이라면 흔한 책 중의 하나일 수 있다.


그러나 육의 태어남, 영의 태어남 이렇게 순서가 있다는 것을 감안할 때, 자녀가 있는 사람들이면 나의 영의 태어남 이후 내 자녀의 영의 태어남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이 책은 그 부분에 무게가 실려 있다. 내 가정 뿐 아니라 교회공동체 안에서 태어나게 되는 자녀를 염두하며 읽으면 더 흥미롭다.


우리가 처음 세상에 태어남은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셨기 때문이고,

영적으로 다시 태어남은 그분이 우리를 구속하셨기 때문이다.

이렇게 주님은 양쪽 출생 모두의 주인이시다.

팀 켈러, 태어남에 대하여, p.12


팀 켈러는 현대인들이 현대문화의 영향으로 육적인 탄생, 즉 자녀 출산에 대해 양가감정을 갖는 것에 대하여 심히 우려한다. 하나님이 주신 지상명령이기도 하고, 생명 자체로도 신비롭고 영광스러운 것임을 감안하면 우려할만한 대상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현재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는 양가감정을 가질 수 밖에 없다.


팀 켈러는 그 이유를 현대 문화는 개인의 자율성과 자아실현을 전례 없이 강조한다는 점과 자식을 키우는 데 쏟아붓는 재정과 정서 자본이 사상 최대라는 점으로 설명한다. 두 가지 이유 모두 현대인들 누구에게나 고민스러운 부분인다.


하지만, 더 큰 고민은 그 다음에 있다. 부모들의 우려 가운데 육적으로 태어난 자녀들을 어떻게 두번째 태어남으로 인도할까? 부모가 현대문화의 영향을 받아 어렵게 첫번째 태어남을 통과한 자녀들. 그 자녀들은 어떻게 해야할까? 부모가 거듭났기 때문에 그 거듭남에 영향을 받아 자녀들도 거듭날 것인가? 삶을 통해 배우고, 주일에 예배드리는 자리로 안내하면 거듭날 수 있을까?


팀 켈러의 지적은 명확하다. ‘우리가 가르치지 않으면 다른 누군가가 가르친다!’


우리가 자녀를 가르치지 않으면 받드시 다른 누군가가 가르칠 것이다.

우리가 도덕 생태계를 구축하여 그리스도를 닮은 자녀로 길러 내지 않는다면,

세상의 도덕 생태계가 우리 아이들을 함부로 빚어 버릴 것이다.

팀 켈러, 태어남에 대하여, p.41




세상이 자녀들을 빚어내지 않기 위해 팀 켈러는 우리만의 생태계가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그의 말대로 일주일에 한번씩 교회 데려가는 것만으로 그리스도인이 될 것이라는 기대는 하지 않는 것이 좋다. 부모의 지극한 노력도 중요하지만, 자녀를 키워 내는 별도의 생태계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에 의하면, 이 생태계의 특징은 그 목표가 하나님을 마음 깊이 경외하고 경탄하는 것이며, 구분되는 세계관을 가지고 있어야 하며, 지침으로서 성경을 기본으로 해야하며 도덕적 강화와 도덕적 상상력, 도덕적 본보기가 있어야 한다. 자녀가 사려 깊은 그리스도인으로 자라나 복음에 기초를 둔 도덕적 인성을 갖추려면 그리스도인 부모와 함께 그런 도덕 생태계에서 살아야 한다고 설명한다.


별도의 생태계에 쉽게 접근하지 못할 현대인의 상황을 감안하면, 가정 공동체와 교회 공동체가 이 몫을 감당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자녀를 하나님께 드리고 공동체 안에서 심성을 길러 주고

부모로서의 희생을 기도와 은혜로 감수하면, 당신의 자녀도 어느새 성령으로 '거듭나고' 싶어질 수 있다.

팀 켈러, 태어남에 대하여, p.45


나의 거듭남, 자녀의 거듭남을 위해 내가 할 일은 무엇일까? 팀 켈러의 조심스런 지적은 여기에 등장한다. '믿는 것 이후에 당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거듭남의 여정의 주체는 내가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지적이다. 내가 믿은 후에 하나님은 나의 삶에 들어와 느리지만 확실하게 당신을 그분 아들의 형상으로 변화시켜 주신다.


그래서 거듭남 이후에는 새로운 영적 감각, 즉 영적 실재를 지각할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되고(p.58), 하나님의 자녀라는 새로운 정체성(p.64)을 갖게 된다. 그러나 이 모든 과정은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로 가능한 것이고, 이 은혜는 그리스도의 죽음에서 연유(p.77)한다.


성경에 하나님을 믿으라는 말은 수없이 나오지만 스스로 거듭나라는 말은 한 번도 없다.

어떻게 스스로 태어날 수 있겠는가? 은유 자체에 어긋난다.

심령의 거듭남 즉 성령의 내주하심은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반면에 믿음으로 하나님께 돌이키는 일은 우리에게 명하신 것이다.

회심은 하나님께 가기 위해 당신과 내가 하는 일이지만, 거듭남은 하나님이 우리 안에 행하시는 일이다.

팀 켈러, 태어남에 대하여, p.76



팀 켈러는 태어남에 대하여를 마치며 마지막 당부의 말을 남긴다. 에둘러 부드럽게 우려섞인 질문으로 던졌지만 실은 이 당부는 당신은 거듭났느냐의 질문에 가깝다. 육적으로 태어났으며, 믿음의 테두리 안에 있으며, 자녀의 거듭남을 고민하는 신앙인에게 거듭났는지, 제대로 믿는지를 묻고 있다.


당신이 그리스도인인데 삶에 근본적 변화가 없다면 변명의 여지가 없다.

당신은 변화를 포기한 부분이 있는가?

일상에 뿌리내린 나쁜 습관과 관행을 방치하는 데 익숙해졌는가?

심중에 잘못된 태도와 두려움과 원망이 있는데도 적당히 타협하는가?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이 당신에게 주어져 있다. 이제 얼마든지 은혜 안에서 성장할 수 있다.

팀 켈러, 태어남에 대하여, p.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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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에 관하여 팀 켈러의 인생 베이직
팀 켈러 지음, 윤종석 옮김 / 두란노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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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남에 관하여’, ‘죽음에 관하여’ 두 책을 받고, 마음 속으로 저울질 했다. 어느 책을 먼저 읽을까. 팀 켈러는 ‘태어남에 관하여’를 당연히 먼저 썼을 것으로 예상되는데, 나는 이 책 ‘죽음에 관하여’를 먼저 손에 들었다.

 

고르라면 먼저 힘들고 어려운 것을 먼저 선택하는 성격 상, 마음이 어려워질 것만 같은 책을 먼저 들었다. 그런데 펼치기도 전에 다시 내 성격에 따른 이 선택에 대해 잠시 회의 섞인 혼잣말이 귓가에 스쳐 지나갔다.‘아차, 우리의 죽음은 좀 의미가 다르잖아. 그래도 슬픈 건 슬픈거지 뭐.’

 

정말로 이 책을 당연히 먼저 읽었어야 했을까? 놀랍게도 혼잣말에 대한 설명들이, 그것도 팀 켈러의 설명들이 명쾌하게 적혀 있었다. 우리가 생각하는 죽음은 다르다. 그래도 처절하게 슬퍼해야 한다. 그 뒤에 기쁨이 있지 않은가! 죽음도 감당하셨고, 슬퍼하셨던 그 분이 있지 않은가! 하고 말이다. 이 책을 한 문단으로 요약하라고 하면, 제2장의 맨 끝, 팀 켈러가 손수 요약해 준 세 문장을 제시할 수 있다.

 

슬퍼하되 소망을 품으라. 부정이나 착각에서 안심하고 깨어나라.

죽음 앞에 웃으며 장차 일어날 일을 생각하며 기뻐 노래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손을 잡고 계시면 당신도 노래할 수 있다.

죽음에 관하여, 팀 켈러, p.79

 

저자는 먼저 죽음에 대한 인식에 대해 현대인의 인식과 그리스도인의 인식을 대비 시켜 준다. 특히 현대인은과거인에 비해 죽음에 대한 준비(생각함)가 부족하다고 지적한다. 그 이유를 세 가지로 설명하는데, 1. 현대의술의 축복이 죽음을 잘 보이지 않게 가려 놓았다는 점. 2. 세속화된 시대가 현세의 의미와 만족만을 추구하게 한다는 점. 3. 죽음의 존재를 부정하다가 깊은 무의미감에 빠진 점. 4. 현대 문화에 죄와 죄책과 용서라는범주가 없어 진 점. 이렇게 네 가지를 그 이유로 들었다.

 

하지만, 우리 그리스도인은 늘 죽음을 인정하며 살아간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첫 순간에 이미 우리는 ‘한 죽음’을 인정하며 그것이 나 때문임을 인식하게 되는 순간을 경험했다. 죽음과 함께 사라져버릴 세속화된 시대의 만족과 현대 문화는 우리에게는 설 자리가 없다. 우리는 죽음 전에 늘 죄를 생각하며 죄를 인지하면 회개의 자리로 나아가고 용서를 구하는 삶을 살아간다. 저자의 말대로 죽음은 우리를 흔들어 깨워 이생이 영원하리라는 착각에서 벗어나게 해 준다(p.34)

 

기독교는 다르다.

기독교는 나 혼자 죽음에 맞서 내 인색 이력으로 충분하기만을 바라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다.

기독교에는 죽음을 이기신 챔피언이 계시다. 그분이 사랑으로 우리를 용서하고 덮어 주신다.

죽음에 관하여, 팀 켈러, p.39

 




죽음에 대한 현대인과 그리스도인의 인식을 대비해 준 팀 켈러는 이제 ‘사랑하는 이의 죽음, 어떻게 받아들이고 감당할 것인가’라는 주제로 나아간다.

 

이 주제에 대한 저자의 대답은 단호하다. ‘소망을 품고 슬퍼하라’ 충분히 슬퍼하되 깊은 소망을 품으라고 한다. 예수님도 창조 세계를 일그러뜨린 죽음이라는 괴물 앞에 노하여 눈물을 흘리신 것처럼(p.49) 말이다.

 

팀 켈러는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만이 누리는 그 독보적 소망의 특징이 무엇일까 궁금해지는데, 이렇게 설명한다. 1. 소망은 인격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죽는 사람의 미래는 무한한 사랑의 세계다. 2. 소망은 물리적인것으로 죽음 후에 회복되는 세계는 물리적으로 회복된다. 3. 주님과 함께하는 세계이므로 기쁨으로 충만하다. 4. 불확실한 내세가 아니라 죗값을 치른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그 소망은 확실해졌다이렇게 그 특징을 설명한다.

 

팀켈러의 마지막 당부는 명확하다. 죽음을 통해 그분의 손안에서 마침내 우리가 하나님이 뜻하신 본연의 모습으로 완성되므로 웃고 노래해야 한다(p.76).

 

친절한 저자는 죽음을 생각하며 실질적인 묵상의 가이드도 제시해 준다. 첫째는 나의 죽음을 생각하며 묵상하기 위한 1주일간의 묵상말씀, 두번째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죽음을 맞이했을 때 묵상하기 위한 1주일간의 묵상말씀이다.


팀 켈러가 처제의 죽음을 경험을 계기로 이 책을 쓰게 되면서 경험하고, 긴 목회 현장에서의 경험을 통해 전달하는 세심한 목소리가 독자에게 큰 위로가 된다. ‘물론 즉시 되는 일은 아니다.’, ‘당신의 기도 생활이 당장확 좋아지기를 기대하지 말라’, ‘이런 상처는 여간해서 아주 사라지지 않는다’, ‘삶 전반처럼 기도도 비현실감에 휩싸일 것이다’, ‘너무 서두르지 말라’, ‘꽤 오랫동안 비현실감이 떠나지 않을 수 있다’, ‘그냥 하루 단위로 살면서 당면한 일만 하면 된다’.

 

이런 상처는 여간해서 아주 사라지지 않는다.

하지만 예수님 손의 못 자국처럼 이 ‘상처도 영광 중에 빛날’ 수있다.

그러니 지금의 허망감이 늘 계속되라는 법은 없다는 희망을 품으라

죽음에 관하여, 팀 켈러, p.102

 

팀 켈러의 적절한 지적처럼 죽음은 막연하며, 두렵고, 회피하고 싶고, 생각하고 싶지 않은 대상이다. 하지만이 책을 통해 우리의 죽음은 특별함을 다시 깨닫는다. 죽음을 뛰어넘게 만드는 소망을 품고 우리는 살아가지않는가.

 

나의 사랑하는 사람이 죽음을 맞닥뜨리게 되었을 때가 언제가는 오게 되겠지만, 그때는 마음껏 슬퍼할 수 있겠다. 내게 소망이 있으니 더더욱 슬퍼할 수 있겠다. 그리고 내게는 소망 중에 기뻐할 희망도 다시 살아날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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