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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등이 생겼을 때는 자신을 반응하는 사람이라 설정
하지, 행동하는 사람이라 여기지 않는다. 우리가 스스로를 감
등 유발자로 인지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대부분 다른 사람들
때문이라고 여길 뿐이다. 이런 맹점 때문에 우리는 멀리 있는
것보다 바로 옆에 있는 자극을 더 강하게 받아들인다.

모든 사람은 언젠가 실망을 줄 것이기 때문에 모두를 의심
하고 아무도 믿을 수 없다고 인식하는 사람이 있다고 가정해
보자. 이 사람이 자신의 인식을 확신할 가능성은 얼마나 될
까? 물론 100%이다. 모든 사람은(아무리 친한 친구라
할지라도) 언젠가 한 번쯤은 상처나 실망을 주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나도 마찬가지이고 모든 관계가 그렇다. 그런데 마음속깊이 이런 인식을 갖고 있는 사람은 자신의 믿음을 확인하기 위해 그 증거를 찾는다. "내가 그럴 줄 알았어! 내 친구조차도믿을 수 없다니까! "
그러다 보니 계속해서 같은 경험을 반복한다는 느낌을 받
는다. 아무도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프라이밍 효과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 함께했던 일 중 아름답고 좋았던 아혼아홉 가지 일들은 인지하지 못한다. 그 대신 안 좋았던 한가지 일만 기억한다. 우리는 어른이 된 이후 매를 맞거나, 거부당하거나, 불친절한 대접을 받지 ‘않는‘ 경험을 천 번도 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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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책에서는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이 우리 스스로
끌어당긴 것이며 생각한 대로, 말하는 대로 삶에 나타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우리가 긍정적인 생각만 한다면 아름답고
건강한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삶의 인과관계는 원래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니다. 모든 결과에 한 가지 원인이 있는 것이 아니며 꼭 무슨 원인이 있어야그 결과가 나오는 것도 아니다.

과연 그런 책들이 주장하는 대로 내가 착하면 다른 사람들
도 모두 나를 착하게 대할까? 이런 생각은 순진할 뿐만 아니
라 끔찍하기까지 하다. 또한 일부 교회에서 내세우는 죄에 대
한 강론까지 떠오른다. 우리는 모두 원죄를 갖고 태어났으며
나에게 일어나는 일은 모두 내 탓이다, 원죄를 씻기 위해서는
내가 긍정적인 생각과 행동을 해야 하며, 그래야만 지상에서
천국을 누릴 수 있다 등등의 내용 말이다. 그런 이론에 의하면암에 걸리는 것도 자신이 생각을 잘못했기 때문이며 성폭력을 당한 것도 자신이 부정적인 생각을 끌어당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승자를 위한 이론일 뿐이다! 이 이론은 어려
움에 처했거나 약자였기 때문에 당할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
에게 혹독하게 책임을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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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생아를 가슴에 밀착시키는 순간 아기는 엄마의 심장 박동과 온기를 느낀다. 양분은 다정한 접촉과 육체적인 배부름의 결합이다. 아기는 자신이 이 세상의 중심이라고 느낄 수 있
어야 하고, 이것은 이후의 나르시시즘 장애(자기애성 인격 장애)나 자기중심주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오히려 그 반대인 경우가 많다). 아이의 욕구를 가능한 한 빨리 만족시켜 주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야만 자신이 욕구를 가졌을 때 바로 충족될 거라는 내적 믿음이 발달한다.
어린 시절에 관심이 결핍되면 어른이 되어서도 끊임없이 결핍감을 느낀다. 관심이 결핍된 사람들은 인간관계에서 자신의 욕구를 잘 표현하지 못한다. 또한 이들은 삶을 바라보는
관점이 부정적이며 체념이 습관처럼 몸에 배어 있고 어떻게 해도 충분히 채워지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는다. 이들이 갖고있는 감정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나는 내가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나는 할수 없다.
나에게는 아무도 없다.
언제나 부족하다는 느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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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어디에 살지, 결정자는 나다
정신적인 공간은 끝없이 확장될 수 있다. 이 공간은 우리가 이 세상에 왔다가 다시 돌아가는 통로이자 시간과 경계가 존재하지 않는 공간이다. 그런데 만약 몸을 자각하기 시작하면 사람들은 갑자기 죽음을 생각하게 되고 오히려 더 상처를 받거나 힘들어질 수 있다. 정신적인 공간은 두려움을 주기도 하지
만 동시에 안식처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렇듯 몸을 자각하는 육체화 과정은 오히려 두려움과 고통을 수반한다. 특히 처음에는 많이 힘들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내가 어디에 머무르고 싶은지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저항할 수 없는 상황에 그냥 내맡겨진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누군가 내 몸의 경계를 침범했을 때 "아니오" 라
고 말하는 연습, 몸이 느끼는 대로 행동하는 연습을 하기 시작하면 서서히 몸을 자각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
→우리가 어렸을 때 당한 일은 우리 책임이 아니다!
→어렸을 때 경험을 현재의 삶에 어떻게 적용하는가는 우리 책임이다.
→부모님을 꼭 용서해야 할 필요는 없다.
→몸의 세계에서 살 것인가, 정신의 세계에서 살 것인가 결정하는 사람은 바로 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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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가 최선의 수단이 아니다. ‘용서‘는 자신이 겪은 일들을 완전히 다 극복하는 경지에 이르면 자연스럽게 하게 되는 것이지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이 결정은 스스로 해야 한다. 가해자를 용서할지 말지는 제삼자가 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만약 누군가에 의해서 용서를 강요당한다면 어떻게 될까? 오히려 이 경우가 더 위험하다. 분노 표출의 대상이 자기 자신이 되는 경우를 너무나 많이 목격했다. 내면에 잠재돼 있는 상처는 분노를 유발하고 이 감정은 어디론가는 향하게 돼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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