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의 시대 - 공감 본능은 어떻게 작동하고 무엇을 위해 진화하는가
프란스 드 발 지음, 최재천.안재하 옮김 / 김영사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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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 신조어 중에 'TMI'라는 게 있다. Too Much Information, 그러니까 쓸데없이 과한 정보라는 말이다. 신조어 하나 알았다고 어려진 기분이 드는 것보니 갑자기 하루하루 나이먹는 것이 무서워진다. 각설하고, 고등학생 때인가, '정보사회와 컴퓨터'라는 과목이 있었는데 거기서도 지겹게 듣던 게 정보의 홍수 혹은 범람이다. 넘쳐도 너무 넘친다. 가공하지 않은 정보들이, 중요하지 않으면서도 투머치한 정보들이 넘쳐 흐르다 못해 발밑까지 차올랐다. 


 정보가 넘치는 것 자체가 무서운 일은 아니다. 정보를 잘 가공하고 필요하고 중요한 것만 거르고 나머지는 버릴 수 있다면 많은 표본이 도움이 된다. 하지만 문제는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을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은 고갈되었다는 점이다. 중요하지 않은 곳에 열을 올리고 필요한 곳을 바라보지 못하게 됐다. 개인의 가치관은 집단의 것에 묻혀버리고 엉뚱한 곳에 각자의 화를 내뿜는다. 구조적인 문제조차도 개인의 잘못으로 치부하고, 정작 개인의 잘못으로 봐야할 일은 집단의 것으로 확대해석한다. 그러면서 너무 많은 분노와 혐오가 사람들의 마음 속에 자리잡아 버렸다. 가장 지적인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불완전하고 불필요한 지성들이 팽배한다.


 이런 시대에 최근에 읽은 <공감의 시대>는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감동이 북받쳐서 평소 귀찮아서 하지도 않는 카드뉴스까지 만들었다.


 사실 나도 굳이 분류를 하자면 인간의 본성은 성악설에 가깝지 않나 생각한다. 아동센터에서 잠시 일하면서 어린 아이들의 철없는 행동들을 보고 '어떻게 저렇게 어린 애들이 저런 악독한 생각을 할 수 있을까?' 생각했다. 하지만 순자는 수양과 교육을 통해-자세한 것은 기억이 나질 않지만-악했던 성질을 선하게 바꿀 수 있다고 말했다. 선천적으로 악하다고 생을 마감할 때까지 악역으로 사는 것은 예술작품에서도 '너무 평면적인 캐릭터'라고 까일만한 설정이다. 성선설이든 성악설이든 모든 설의 방점은 선을 지향하며 찍힌다.

 이 사회를 이끌어가는 것이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 어린이들이 아니라 이미 다 자란 어른들이지 않은가? 간혹 어린이들이 공공장소에서 이상한 짓거리를 하면 그 아이와 더불어 그 아이의 부모를 비판하듯, 어린이들을 교육시키는 것은 어른들이고 어느 정도까지 책임 역시 어른들의 몫이다. 하지만 그 어른들이 탐욕스럽고 이기심으로 가득찼다-라는 것은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성인이 되었다면 그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분노들, Too Much Rage를 제대로 된 방향에 내뱉을 수 있고, 자신을 희생하지 않는 선에서의 이타심을 당연한 것으로 여길 수 있으며, 문제가 발생한다면 교감을 통해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춰야 한다. 이 책의 역자인 최재천 씨가 서문에서 밝힌 문장이 내 마음에 깊히 박힌다.

저는 이 책을 번역하며 깨달았습니다.

'공감은 길러지는 게 아니라 무뎌지는 것'이라는 걸.


 아무리 무뎌지고 묻혀졌다고 해서 사라진 것은 아니고 사라져야 할 것도 아니다. 세상 살기가 박박하다지만 우리들의 인성까지도 박박해질 필요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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