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이름 사전 - 모든 색에는 아름다운 이름과 이야기가 있다
아라이 미키 지음, 정창미 옮김, 이상명 감수 / 지노 / 2022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책이 이쁘고 아담하다.
색을 좋아하는 나에게는 참 좋은 책인 것 같다.
색의 기원도 나와 있고 참으로 다양한 색분류가 흥미롭다.
색연필도 좋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종교는 인간이 품고 있는 이기심이라는 문제가 자동적으로 해결되는 장소가 아니다. 오히려 종교야말로 인간의 교만과 하나님의 은혜가 마지막까지 격전을 벌이는 전장이다. 인간의 교만이 전투에서 승리하면, 종교는 인간이 범죄하는 데 필요한 수단으로 전락하고 만다. 그러나 전장에서 인간의 자아가 하나님을 만나 자신의 유익을 초월하는 부르심에 항복하면, 그때서야 종교는 우리 모두가 붙들고 있는 자기중심적 관심사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열어 준다. 이러한 해방은 정말로 필요하지만 상당히 드물게 일어난다

오늘날은 개인의 선택과 의사를 강조하는 시대이다. 젊은이들은 더 이상 스스로 선택하지 않은 길을 그대로 따라가려고 하지 않는다.

탈기독교시대에는 아직 한 번도 기독교 부흥이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모든 위대한 일은 전례없이 일어난다. 예수님이 말씀하셨다. "내가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 16:18). 이 약속에 마감 기한은 없다.

왜 협력적인 사고가 필요할까? 지금까지 설명한 모든 사안에 두루 강점을 갖춘 단 하나의 교단이나 전통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곧 복음 전도와 양육, 기독교 세계관과 문화 비판, 부흥과 영적 각성, 정의와 자비의 사역, 신앙과 일의 통합, 그리고 성 윤리에 관한 역사적 기독교의 관점 등 모든 문제에 대해 완벽하게 준비된 개인이나 교회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왜 독립적인 사고가 필요할까? 뉴비긴이 반복해서 강조한 바와 같이, 오늘날 교회가 세속 문화에서 발생하는 온갖 우상에 사로잡혀 있지만 실제로는 서로 다른 배경에서 서로 다른 우상을 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지금까지 언급한 모든 논의에 전부 다 찬성하는 교회 역시도 존재하지 않는다. 전통적인 배경에 속한 교회에서는 현대 복음주의나 성 윤리에 관한 담론이 불편하게 여겨질 수 있고, 마찬가지로 인종이나 경제 관련 이슈에서 정의를 강조하면 민감하게 반응하는 교회도 있을 수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시 말해, 동일한 문화권 안에서 종교를 이어받은 모든 사람들은 신앙에 있어 아무런 차이가 없었다. 그들의 민족이 그들의 신앙을 결정했기 때문이다. 이는 각 민족과 문화가 신성한 권위를 지니고 있기에 그 자체로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없었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기독교인이 가진 신앙은 달랐다. 그들은 참된 하나님이 오직 한 분이며 모든 사람은 그분을 믿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들에게 신앙이란 민족의 배경과 상관없이 더욱 근본적인 차원에 속하는 문제여서 다른 무엇보다 깊은 연대감을 주었다.

그래서 이교 신앙을 가졌던 로마 황제 율리아누스는 기독교인의 혁신적인 신앙생활을 보고 "가난한 기독교인뿐 아니라 가난한 이교도인까지 돌본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17]
이는 이교도인이 보기에 불편하면서도 동시에 매력적인 모습이었다(갈 6:10; 눅 10:25-37 참고).

공손한 자세는 ‘겸손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우리가 증명할 수 있는 사실에는 한계가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거기서 겸손한 모습이 나타난다. 이는 모든 사람이 자기 나름대로 증명 불가능한 신앙을 가지고 있으며 그에 따라 인간 존재와 현실을 해석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모습이기도 하다. 따라서 타인의 신앙 체계에 근거하여 그들을 비판하는 일은 삼가야 한다.

공손한 자세는 ‘인내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인내는 지속적으로 경청하고 이해하며 공감하는 태도를 요구한다. 이때 두 가지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하나는 우리가 겪은 상이한 경험이 우리를 서로 구분시킨다는 사실이고, 또 하나는 우리가 지닌 동일한 경험이 우리를 서로 연합시킨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우리는 성경에 약속된 소망에 뿌리를 둔 인내를 함양하되 진보적인 낙관주의라든가 보수적인 전통주의를 모두 경계해야 한다.

공손한 자세는 ‘관용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관용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타인을 존중하는 태도를 말한다. 심지어는 상대가 도덕적으로 비난받을 만한 사상을 옹호하더라도 그러한 태도를 유지해야 한다. 이는 우리가 잘못된 관점이나 행동까지 받아들여야 한다든가 그러한 잘못조차 묵인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공손한 자세는 ‘자기 의를 부인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복음은 우리가 의롭지 않게 살아가고 있음을 상기시킨다. 그렇기에 우리를 억압하는 자가 있더라도 그들을 경멸하거나 모욕하지 않도록 지켜 줄 뿐 아니라 우리 자신이 그러한 억압을 반대하면서 도리어 타인을 억압하는 자가 되지 않도록 지켜 주기도 한다.

초대 교회는 정치적인 차원이 아니라 실천적인 차원에서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데 앞장섰다. 그래서 의도하지 않은 아이를 임신했다고 하더라도 그 아이의 삶 전체를 책임지고 돌보는 일에 헌신했다. 단지 아이의 생명을 살리는 데서 그치지 않고 성장하며 살아가는 데 필요한 가족의 손길과 사랑을 베푸는 데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