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자력의 거짓말
고이데 히로아키 지음, 고노 다이스케 옮김 / 녹색평론사 / 2012년 1월
평점 :
품절


책날개에 있는 저자소개부터 인상적이다.


고이데 히로아키.

1949년 도쿄 출생.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을 꿈꾸며 1968년에 도호쿠 대학 공학부 원자핵공학과에 입학. 그러나 그 위험성을 깨달아 원전으로 인한 방사선 피해를 입은 주민 측에서서 평생 활동해왔다.


후쿠시마 1주년이 지난 오늘. 일본의 바로 옆에 있는 나라이면서도, 핵 참사에 대한 무감각에 빠져 지내고 있는 보통의 한국사람이 읽으면 정말 좋을만한 책. 미덕이 많다.

 

중요한 기준인데, 중학생 정도의 과학상식이 있으면 충분히 소화할 수 있게 원자력 발전의 원리부터 쉽게 풀어썼다. 재미도 있다. 자신의 지식에 정통한 전문가의 내공일 것이다. 중1인 우리 큰 아들도 하루만에 다 읽을 정도였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 전후의 이야기들을 아주 현장감있게 들려준다. 방사능에 피폭된 원전 노동자가 어떤 끔찍한 과정을 거쳐가며 죽음에 이르는지, 무시무시하게 처참한 사실을 아주 건조한 문체로 풀어간다.


 

원 자력의 문제점은 한두가지가 아니지만, 일관되게 원전발전의 내생적인 차별적 성격에 촛점을 맞추고 있다. 우리나라랑 비슷한데, 원전을 수주하는 것은 일본 최고의 대기업이지만 실제 현장에 투입되어 일을 하는 노동자는 줄줄이 이어진 하청구조의 맨 끄트머리 빈곤층 노동자라는 사실. 이건 현재 시점에서 계층간의 차별에 해당한다.


 

왜 하필 후쿠시마였나, 하는 문제는 왜 원자력 발전소 건설 입지가 되었는지, 부터 따져봐야 할 터인데, 후쿠시마는 2차대전 이후에 토지개혁을 통해 자기땅을 갖게된 농민들로 새로 탄생한 지역이다. 즉, 인구가 적고 토착주민세력이 없어 저항이 적었다. 죽어라고 일해 농업을 제대로 일으켰고, 이제야 살아볼만했던 정직한 농민들이 사는 농촌지역이었다. 철저한 지역차별이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세대간의 불평등을 전제하는 에너지원이라는 점. 고준위 방사성 폐기물인 사용후 핵연료에 대한 통념과 진실을 적확하고 간결한 문장으로 알려준다.


memo


*체르노빌사건

- 사고가 난 체르노빌 4호기는 겨우 2년 가동한 기종. 그동안 히로시마 원자폭탄 2600발 분의 방사능 배출. 그 중 환경으로 나온 것이 800발 분.

- 사고 직후 반경 30km내 13만 5천명 주민 대피함. 300km떨어진 곳에서도 심한 오염 발견되어 추가 20만명 강제 피난. 폐허가 된 시골마을도 1,000곳에 이를 것으로 추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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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버블링 - 신빈곤 시대의 정치경제학 생태경제학 시리즈 3
우석훈 지음 / 개마고원 / 2011년 2월
평점 :
절판


디버블링 debubbling, - '부동산 투기로 과열된 경제의 거품이 빠지는 현상' 정도로 풀이할 수 있는 말이렷다.

 

'88만원 세대'부터 그랬듯이, '생태요괴전', '생태페러다임' 등 우석훈의 저서는 참신한 제목을 뽑는데 공을 들인 흔적이 역력하다. 이번 책도 그냥 그런 참신한 제목 쯤, 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500쪽이 넘는 두툼한 책장을 넘겨갈수록 이번 책의 제목은 '참신해보이려구' 뽑아낸 단어가 아님을 알게 되었다.

 

저자가 보기에 토건의 극한이 어떤 모습인가를, 그것이 신자유주의의 발호와 함께 벌어졌을 때 한 나라가 얼마나 끔찍하게 망가질 수 있는지를 21세기의 대한민국은 아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달도 차면 기우는 법, 토건의 시대가 활짝 꽃피었다면 이제 시드는 계절이 찾아온다는 것인데, 그 과정을 '디버블링'이라 칭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고보니 일본의 지난 1990년대를 '잃어버린 10년'이라고 부른다 하는데, 이게 바로 디버블링(거품붕괴)였다.

 

일본 못지않은 디버블링 과정이 우리에게 곧 닥칠 거라는 게 우석훈의 주장이다. 그가 예상하는 한국의 디버블링은 일본보다 아주 나쁠 가능성이 많다. 이유는? 일본은 최소한 디버블링과 신자유주의가 겹쳐서 찾아오지는 않았다는게 첫번째다. 그리고 일본은 한국경제의 역동성은 없지만, 경제가 돌아가는 '시스템'이라면 세계 최고를 자랑하는 나라다. 한국처럼 '되는 것도 없고 안되는 것도 없는'나라가 아니다. 예측이 가능하고 룰이 지켜지는, 한국보다는 훨씬 앞선 자본주의다. 중앙정부와 지방토호가 꿰어찬 지방정부의 합작품이 토건이라 할때, 그 대안은 의연히 '지역서민경제'의 회복에서 찾아볼 수 있겠다. 이런면에서도 일본이 우리보다 좋은 토양을 가지고 있는데, '가나가와 넷토'의 성공사례로부터 찾아볼 수 있듯 일본은 역사적으로 형성된 강력한 분권주의의 전통, 풀뿌리 주민 참여 네트워크의 경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본에는 없고 우리에게만 있는 특별한 요소들이 여기에 더해지면, 한국의 디버블링의 양상을 예상할 수 있다. 전체학생의 80%가 대학에 진학하고, '대치동'으로 상징되는 사교육 자본주의 - 학원자본이 증시에 상장한 경우는 우리나라가 유일하다 - 가 공교육을 완전히 케이오시킨 교육. 한국에만 있다. 일본도 대학진학률은 50%지만, 고교시절까지 한국처럼 애들을 사교육에 몰아넣어 잡지는 않는다. 한국은 정부가 앞장서서 농업을 포기시킨지가 오래되었다. 거기에다 뭐라 하면 '핸드폰 판 돈으로 쌀 사먹으면 되지, 촌스럽게 왠 난리냐'고 쏘아붙인다. 일본은 식량자급률이 우리보다 훨씬 높은데, 식량자급의 중요성을 진작에 깨닿고 '지산지소운동-내 고장에서 생산한 먹을거리를 먹자-을 활발하게 벌이는 등 민관합동으로 잘 대응해 나가고 있다.

 

여기까지 논리를 전개해본다면, 우리에게 닥칠 디버블링은 아주 끔찍한 것이 될 거라는 예상이 나온다. 예를들면 부동산 시장의 전환이다.1-2년 내에 부동산 투기의 거품은 본격적으로 빠지기 시작할 것인데, 최근 경험하고 있는 극심한 전세란은 그 전조다. 전세란 주택 보급의 급격한 확대 시기였던 과거 20~30년 전, 목돈을 댕겨 재산증식을 목적으로 아파트 구입에 투자하려는 집주인들의 높은 수요때문에 생겨난 오로지 한국적인 시스템이란다. 1950년대 전쟁 직후의 한국의 통계를 보면. 놀랍게도 자가 주택 보유자가 80%에 이르렀고, 오늘날 전세에 해당하는 용어인 '차가' 유형은 10%가 채 안되었다고 한다. 즉, 당분간은 전세란이 지속될 것이며 '반전세'의 출현등 일정한 조정국면을 거쳐 선진국의 경우같은 월세로 자리잡을 가능성이 높다. 외국의 경우라면, 한국보다 보증금이 훨씬 낮은(길어야 6개월 가량의 월세 선납)대신, 월세가 아주 비싸다.

 

즉, 일본식의 '잃어버린 10년'은 아주 점잖은 모델이 될 터인데, 일본보다 모든면에서 열악한 한국에게 닥칠 디버블의 양상은, 세계 5위권 경제대국으로 상승하던 정점에서 끝없이 추락한 과거 아르헨티나 수준이 될까? 한마디로 상상을 초월한 끔찍한 것이 될지 모른다. 전세가 사라지고 높은 월세가 자리잡힐 거라는 예 한가지만으로도, 그것이 바로 오늘 나의 일상과 직결된 문제이므로 충분히 공포스럽다.

 

한마디로 이 책 디버블링은 우석훈 식 '요한계시록'이다. 한편, 이 책을 잘 따라 읽어가다보면 우석훈의 '명랑한 공격성'을 이해할 수 있다. 일관되고도 집요하게 토건주의에 대한 정면승부를 해 왔던 그, 왜 한국 최초의 생태경제학자임을 자처하며 그리도 발랄하게 토건에 무릎꿇은 진보, 아무 대책없는 생태근본주의를 싸잡아 공격할 수 있었나, 하는 의문이 비로소 풀릴 수 있었다. 생태주의도 결국은 먹고사는 문제와 충돌하고, 충돌이 아닌 접점에서 비전과 대안을 찾아야 한다.

 

정치와 경제, 과학기술과 교육, 복지와 환경을 아울러 종횡무진하며, 탈토건 - 디버블링은 무섭게 말하면 거품붕괴지만, 희망을 섞어 풀어쓰면 '탈'토건주의가 된다 - 시대를 어떻게 능동적으로 맞이해야 하는지 아주 구체적인 대안 시나리오를 제시한다.

 

마지막 장 '디버블링과 국민경제의 생태적 대전환'에 딸린 글들의 소제목을 보자.

 

-일주일에 이틀 일하는 정규직, 재택근무 그리고 완전 연봉제 (노동)

-사교육 폐지, 주 4일제 수업 (입시와 제도교육)

-등록금 100만원 시대 (대학문제)

-집 대신 방을 꿈꾸는 세대를 위한 주거권 논의 (청년복지)

-디폴트와 모라토리엄 그리고 공간의 위기 (지방정부의 몰락, 슬럼화)

-교통 문제와 무료 버스 운행 (교통)

- 탈토건의 정부체계 개편/생태적 세제개편

-주상복합의 비극 그리고 공간의 재구성

-생태적 삶과 국민들의 경제생활, 마케팅 사회의 해체.

 

하나하나가 만만치 않은 우리 사회의 심각한 숙제들인데, 이 모든 것들이 연결되어 있음을 전제하지 않고서는 제대로 된 해법도 나올 수 없음을, 그는 '토건주의'라는 키워드를 동원하여 아주 설득력있게 보여준다.

 

오늘, 한국경제와 사회의 문제를 핵심에 '토건주의'가 있다는 진단에 동감하는 이라면 설령 그의 모든 주장에 동의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꼭 읽어보아야 할 필독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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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는 왜 싸우는가?
김영미 지음 / 추수밭(청림출판)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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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미는 분쟁지역 전문 PD다. 이라크, 팔레스타인, 콜롬비아,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소말리아 등 나라이름만으로 전쟁과 학살, 테러 같은 단어가 떠오르는 지역을 찾아다니며 다큐멘터리를 찍는 이다. 작년에 온나라를 들끓게 했던 '동원주얼리'호 사건에 대해, 혼자 몸으로 현지로 날아가 단독 취재해 세상에 진실을 알렸던 사람이다.

그이가 10년전 우연히 묵은 게스트하우스에서 경험했던 에피소드가 이 책을 집필하게 된 동기가 되었단다. 세계 여러나라의 배낭여행족 젊은 이들이 함께 묵었던 게스트하우스에서 영국학생과 독일학생들이 '듀랜드라인'을 주제로 열띤 토론을 벌이는 모습을 흥미롭게 지켜보던 그는, 문득 한쪽 구석에 말 없이 모여 맥주잔을 기울이던 한국학생들을 발견했다. 그들은 토론에 참여하지 않은 이유를 묻는 작가에게 '그런 재미없는 이야기보다 관광지에 더 관심이 많기 때문'이라 대답했단다.
김영미 PD는 그 이야기를 들으며 충격을 받고 안타까왔다. 이웃나라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아무런 관심도 없이 오로지 수능과 대학만을 바라보며 자라는 그들이 우물안 개구리가 될 것임에. 그의 아들 얼굴이 겹쳤다고 한다.

이 책은 그래서 눈높이가 높지 않다. 세계사와 세계지리에 대한 초보적인 지식을 갖고 있는 고등학생 정도면 쉽게 읽을 수 있다. 아이를 키우는 엄마의 마음으로 썼을 것이다. 이야기의 배경은 아시아와 아프리카, 중남미를 종횡무진하지만,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참상과 분쟁의 원인과 본질에 대해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도록 풀어나가고 있다.
무엇보다 좋은 점은 '테러리스트', '이슬람' 따위의 낱말과 개념들에 대한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서 균형잡힌 시각으로 바라볼 것을 일관되게 일깨워주고 있다는 것이다.

게릴라=반정부세력=테러리스트=이슬람과격분자=섬멸대상.. 이런 등식은 사실 대상을 바라보는 입장을 전제로 한다. 곧, 대체로 미국이나 그들의 충견 노릇을 하고 있는 독재정권의 시각이다.
그런데 일본의 식민지 하에서 무장투쟁도 두려워하지 않았던 우리의 선조 '독립투사'들도 그들이 맞서싸웠던 지배자의 눈으로 보자면 게릴라, 반정부세력, 테러리스트가 되었다.
미국의 신식민지하 박정희 전두환 독재정권에 맞서싸웠던 우리의 '민주화운동가'들도 그들을 억눌렀던 압제자의 눈으로 보면 과격분자, 공산주의자, 빨갱이가 되었다.
'균형잡힌 시각'이란 이래서 중요하다. 시선의 방향을 바로 잡지 않는다면 문제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 파악할 수 없다면 해결책도 찾을 수 없다. 그 피해는, 고스란히 내게, 우리에게 돌아온다.

분쟁지역의 다수가 이슬람 권에 몰려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볼 것인가? 과격파 테러집단의 괴수, 빈 라덴이 사살되었으므로 과연 세계는 더 평화에 가까이 다다르게 될까? 빈라덴 사망소식이 전해진 날 밤, 뉴욕의 그라운드제로에는 많은 미국인들이 모여 환호했다. 과연 이들의 바람처럼 정의는 실현될 것인가.
오늘날 미국이 관련된 아랍지역 분쟁의 핵심적인 원인은 종교 문제나 문명의 충돌이라기 보다는, 석유자원에 대한 수그러들줄 모르는 미국의 탐욕에 있다. 안정적으로 석유를 계속 확보할 수 있으려면 미국에 협력하는 현지 독재정권과의 협력이 절대적이다. 당연히 그 정권들을 위협하는 세력들은 미국의 적이 된다.

곧, 평화를 앞당기는 길은 원수를 죽이는 게 아니다. 꼬인 문제의 실타래를 차근히 풀어가야 한다. 나도 모르는 사이 나와 내 가족의 이해관계가 어쩌면 학살과 죽음의 체제를 지탱시키고 있는 것은 아닌지 성찰해야 한다.
미국의 석유에 대한 탐욕의 원동력은 철저하게 석유에 기반하고 있는 현대 미국인들의 소비문명이다.

이 책을 읽으며 '백린탄'과 '집속탄' 이라는 놈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
백린탄은 일종의 화학무기다. 강력한 인화물질인 백린(P)으로 만든 폭탄이다. 하늘에 터져 하얀가루로 떨어지는데 멋도 모르고 그 연기를 쳐다보다 조금이라도 백린이 사람몸에 달라붙으면 기름에 불을 붙인듯 온몸이 타들어가게 된다. 그 불은 절대로 떼어낼 수가 없다. 백린이 몸에 달라붙은 사람은 뼈가 앙상하게 드러나고 오랜 시간에 걸쳐 장기가 다 타들어가야 숨이 끊어진다.
재빨리 이 지옥불을 피할 수 없는 어린이와 노인이 가장큰 피해자이다. 워낙 위험하고 잔인한 무기라서 1980년에 제네바 협약에서 백린탄의 민간인 사용을 금지했다. 하지만 2004년 미국은 이라크 팔루자에서 백린탄을 사용했고, 이스라엘군도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공격에 백린탄을 사용해 전세계의 비난을 받았다. 
아프간 전쟁에서도 백린탄이 사용되었던 모양이다. 검색을 해봐도 이 무기를 사용한 것이 탈레반인지, 프랑스군인지는 알 수 없지만.  


집속탄은 그 잔인성 면에서 백린탄 버금가는 끔찍한 놈이다. 엄마폭탄 한개가 공중에서 터지면 그안에 든 수많은 아기폭탄이 흩어지며 연쇄폭발을 일으키는게 집속탄이다. 무서운 건 한번에 터지는 게 아니라 40% 아기폭탄은 땅속에 계속 묻힌 채 남아 있다가 계속 피해를 준다는 점이다. 이 아기폭탄은 생긴게 꼭 장난감같아 역시 아이들이 가장 큰 피해를 입게 된다고 한다.
2006년 이스라엘은 레바논 침공 시 전쟁 종료 전 72시간 전에 집속탄을 360만 발이나 발사했다.전쟁이 끝나는 것과 상관없이 한명이라도 더 죽이고야 말겠다는 거였다. 그 결과 전쟁이 끝나고도 하루 평균 세명이 집속탄에 희생을 당하고 있다.

어떻게, 사람이 이렇게 잔인할 수 있는가. 

그런데, 한국은 집속탄의 주요 생산국이다. 2008년 5월에 열린 집속탄 생산 사용 전면금지 회의에도 불참했다. 돈 때문이겠지.

한국에서 계속되는 집속탄 생산에는 눈감으면서 이스라엘과 미국의 잔학성을 비난할 수 있을까? 얼굴 반이 어그러진 아프간 소녀 라지아의 얼굴을 외면하지 말고 대답해야 한다.

김영미 PD는 나보다 겨우 한 살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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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과 필연 궁리하는 과학 6
자크 모노 지음, 조현수 옮김 / 궁리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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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에 대한 정보는 누군가의 독서안내서에서 얻었다. 이런 복잡한 철학책이므로, 아마도 대학교수였을터. 아마도 극찬을 했을 것이다. 꼼꼼히 어딘가에 기록해두었다가 재작년엔가, 헌책방에서 샀다. 바로 삼성출판사 간 세계사상전집 31번, <<科學과 近代世界/遇然과 必然>>
- 그런데 삼성출판사 간 세계사상전집은 어릴적 우리 집에 한 질 전체가 다 있던 시리즈였다. 1982년에 나왔으니 아마도 큰 형 대학 입학 직후, 어리버리하게 책장사의 꼬임에 넘어가, 부모님을 졸라서 사냈을 것이다. 형이 이 전집을 얼마나 봤는지는 잘 모른다. 모두 32권에 이르는 전집가운데 내가 본 책은 한권도 없다. 비뇨기의사해서 먹고사는 소부랄이 우리집에 들렀다가 <<장자>>를 훔쳐간 적은 있다. 아, 이 책은 그러나 내 학창시절 유용한 쓰임새가 있기도 했다. 할일없이 방에서 뒹굴거리며 누워있을때, 책 등이 가지런하게 번호를 맞춰 서가에 꽂혀진 모양은 내게 지식욕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제목이 모두 - 조사를 빼놓고는 - 한자였으므로, 심심풀이 한자공부를 이 전집을 이용해서 했던 기억이 난다.
- 이 전집류를 손도 대지 않았던 이유는, 이 책의 편집탓이 많을 것이다. 2단 세로쓰기다. 요즘 애들은 구경도 못한 편집일지도 모른다. 국민학교 고학년때, 역시 소유자는 큰형이었던, 간간히 흑백삽화가 들어가있던 <소년소녀 세계문학전집>을 몇권 얻어 읽었다. 그 놈들도 2단 세로쓰기고 한자가 섞여 있었다. 욕지기를 참으면서, 몇 권 겨우 읽었다. 나는 아마도 2단 세로쓰기로 책을 읽은 거의 최후의 세대이자, 한글전용 1단 가로쓰기로 전문서적을 본격적으로 읽기시작한 최초의 세대가 아닐까.
- 즉, 내가 헌책방에서 책을 사들이기전 십수년 동안 우리집 서가에는 같은 책이 꽂혀 있었던 것을 나는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인터넷으로 주문한 책을 받고 나서 허탈했다, 조금. 결국, 1년이 넘도록 그 책은 손도대지 않은 채로 내 방 서가 맨 윗칸에 던져져 있었다.
- 그러다 작년에 새로 완역된 책이 나온 것을 도서관에서 우연히 발견했다. 역자후기가 꽤 매력적이라 어려운 책일거라는 부담을 무릅쓰고 빌려왔다. 대출기한을 한번연장하고 3주에 걸쳐 겨우 읽었다. 번역도 괜찮았고 역주가 충실했으며 무엇보다 철저한 과학자인 원저자의 글재주가 보통이 아니게 뛰어났지만, 분자생물학과 유전학, 서양 고전철학을 종횡무진하는 저자의 스케일을 대하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고전반열에 올랐겠지. 다시 생각해보면, 아주 재미있는 책이기도 했다.  띄엄띄엄 읽었지만, 한번 잡으면 한 챕터씩은 그냥 넘겼으므로.


* 책의 간략한 내용과 간략한 감상.

- 대단한 책이다. 아주 충격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벗들과 함께 읽고 토론해 보면, 참 좋겠다.
- 당연 꼼꼼한 독후록을 작성해야 할 가치가 있는 책이나, 밑줄을 그을 수 없었고 반납기한이 정해져있었으므로 어쩔 도리가 없었다. 중고라도 사들여서 독서노트를 해야겠다.
- 제목 '우연과 필연'은 생명의 본질과 기원에 대한 저자의 철학적 해석을 말한다.(뭔얘기냐..) 그러나 아주 도전적인 문제의식을 품고 있는 개념이다.
- 책의 중간중간에 여러번 정통으로 언급되는, 저자가 빈번히 공격하는 맑스의 '변증법적 유물론'. 오래 전 벗들과 했던 세미나의 주제 가운데에도 '우연과 필연' 을 다룬 장이 있었다. 맞다. 바로 그 우연과 필연이다. 역사에서의 우연과 필연으로도 읽어도 좋다.
- 내 기억으로는, 변증법적인 법칙성을 가진 자연의 운동과 마찬가지로, 인간 역사의 발전 또한 법칙성을 갖고 있다 (사적 유물론!), 그것은 필연이다.
- 또 다른 기억. 아마도 변증법적 유물론 세미나 중이던가 아니면 고교시절 생물시간 이던가. 다윈의 진화론에 대한 다분히 왜곡된 독해. 생물종은 더 복잡하고 더 우월하고 높은 종으로 상승발전하는 과정을 갖는다. 그것이 곧 진화고, 그러한 발전이 필연이다.
- 곧, 변.유와 사.유에 대한 나의 천박한 이해를 아주 거칠게 정리하면 이런거였다. 자연과 인간의 역사 모두는 과학적인 발전법칙의 지배를 받는다. 발전은 나선형의 곡선을 따르며 상승하는 방향성을 갖는다. 더욱 복잡하고 지능이 뛰어난 종으로 진화해 나가듯, 사회도 더욱 발전되고 우월한 사회로 발전하고 상승한다. 인간의 역사에서, 그 발전의 단계는 생산양식-사회구성체로 개념화되며, 그러므로 현재의 체제, 자본주의 생산양식이 붕괴하고 그 다음단계로 인간의 역사가 진화하는 것은 필연이다!!

- 우연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필연적인 역사속에서 개인의 역할에 대해서도 언급을 했던 기억. 어떤 위대한 개인이 출현하는가가 우연의 문제였던가. 아뭏든, 이 세미나의 효과는 대단했다. 나는 그 후 여러번 반복해서 변.유와 사.유를 학습했고, 때로 후배들을 학습'시키'기도 했다. 그리고 나는 '믿음'을 가져왔다. 맑스주의 역사발전의 이론은 '법칙=필연'이라고. 필연과 법칙의 흐름을 타고 살고 있는 나는, 당장 녹록치 않은 하루하루가 고되더라도 필연과 자유의 왕국을 꿈꿀 수 있었으므로 행복했다. 필연을 인식한다는 것은 그래서, 적어도 내겐 중요했고, 아마도 변유/사유의 세미나의 목적가운데 중요한 한가지가 나같이 따지기 좋아하고 스스로에게 들이미는 명분을 중요시여기는 놈들에게 '필연과 자유'에 대한 논리적인 설명을 수행하는게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다.

- 역사발전과 필연에 대한 인식은 그저 관념만은 아니었다. 그 후 겪었던 많은 개인적인 혹은 집단적인 체험은 나의 신념체계를 강화시키는데 많은 경우 부족함이 없었으므로. 대중투쟁은 상승발전했고(한동안), 민주정부가 두 차례 들어서며 이렇게 역사가 '상승';발전하는구나 하고 믿기도 했다.

- 이 책의 저자, 자크 모노는 맑스주의사상의 위대성과 역사에 대한 공헌을 결코 부정하지 않는다. 사적 유물론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고 다만, 엥겔스가 수행했던 당시 스타학자였던 다윈의 진화론에 대한 유물론적 해석의 오류, 그로부터 이어지는 변증법적 유물론에 대한 공격에 주력할 뿐이다. 그가 공격하는 것의 핵심은 바로 '우연과 필연'의 문제다. 그 요체는 생명의 기원과 진화의 문제다.

- 저자는 20세기 - 맑스와 엥겔스는 물론 '유물론과 경험비판론'을 써서 당대의 자연과학 논쟁에 적극적으로 개입했던 레닌까지 모두 죽은 후인 - 초중반기에 이루어진 현대 자연과학의 명백한 성과와 증거를 동원하여 자신의 논지를 펼쳐나간다. 그 무기는 양자역학과 분자생물학이다.
- 생명의 본질, 특히 인간의 사고에 대한 저자의 탐구는 가장 미시적인 단위에서 시작한다. 단백질과 DNA, 그리고 세포와 개체를 구성하는 신체기관을 거쳐 동/식물 개체와 생물종으로 나아간다.
- 생명체의 본질과 진화의 메커니즘은 분자적 속성에 근거하고 있다. 분자와 원자 단위에서 운동은 어떠한 법칙을 따르는 것이 아니고, 그 변화는 확률에/우연에 근거하여 발생한다. (양자역학과 불확정성의 원리!) 이 분자적 속성의 실체가 바로 우연에 있다는 것이다. 생명체의 기원에서도, 진화에서도 그렇다. 진화는 생물종의 불변적 영속성을 추구하고자 하는 경향에 대해 '우연'히 발생하는 변이들이 불러일으키는 현상이다.

- 긴 시간 열띤 토론속에서 이루어졌을 말년의 대학자의 강연을 압축해놓은 책이다보니, 분자생물학에 대한 기본지식이 없이는 논지를 빼먹지 않고 따라가기는 쉽지 않은 텍스트이다. 그러나 이 사상체계가 갖는 함의는 너무 엄청나다. 저자는 위와 같은 주장을 뼈대삼아, 자연(존재)과 정신(의식)의 기원을 아예 별도로 놓거나 - 기독교 사상체계 - 혹은 자연의 발전과정을 뒤따르는 단계에서 동일한 법칙성을 찾아 인간역사의 발전을 설명할 수 있다는 사상체계 (맑시즘!) 전체를 붕괴시키려 하기 때문이다. 적어도 이 책 안에서 저자의 공격은 매우 성공적인 것으로 보인다. 사실상 인류 역사 전체를 거쳐 도달했던 화려하고 장대한 정신의 체계가 완전히 무너지는 장면을 연출해 버린 것이다. 모래성이 무너진 다음에 남는 것은, 바로 우연성의 세계. 신과 관념론 철학의 설명이 사라진 고독하고 차가운 우주속에 던져진 자신에 대한 깨달음이다.

- 이 책이 내게 가한 또 하나의 충격. "의식에 독립에 존재하는 물질을 거울처럼 반영하는 것이 의식의 속성이고 자연과 인간의 세계전체가 법칙의 지배를 받는 다면 세계의 본질을 인식할 수 있다"는 ML주의 인식론에 대한 통박. 발전법칙의 존재에 대한 부정은 인식가능성에 대한 회의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 어쨌거나 대단한 스케일이다. 흥미롭게도 저자는 말미에 '참된 사회주의 세상의 건설을 위해서(라도!) ML주의 신앙이나 기독교윤리와 하루 빨리 결별하고 과학의 메시지 자체에 충실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꺼낸다. 이 사람은 자연과학자, 생물학자다.

- 새로운 세상을 제대로 만들려면 철학이 필요하다. 선배세대들이 그렇게 열심히 철학학습을 강조하고 후학들을 가르치려고 했던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문제는 그 과정속에서 획득해나가야 할 '앎'이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 하는 점일 것이다. 공부의 과정속에서 그 '앎'이 도그마가 아닌지, 과연 현실세계에 대한 끝없이 창조적인 설명력을 생성해 낼 수 있는 살이있는 앎인지에 대한 검증이 수반되어야 한다. 맑스고 레닌이고 주사고 헤겔이고, 예수고 부처고 간에 말이다. 이 비판적 사고의 과정을 거쳐 살아남은 앎이 아니라면, 앎은 오히려 자기와 타인의 삶을 구속하는 족쇄가 되기 쉬울 뿐이다.

- '우연과 필연'이 자극한 키워드, 정리.
맑스의 역사발전법칙이 여전히 유효한가. 아니, 역사발전법칙이라는 개념자체가 성립 가능한 것인가.
자연법칙과 동일한 법칙성을 인간의 사회와 역사에 대해 적용할 수 있는가.
그 법칙을 인간이 인식할 수 있는가.
맑스주의가 진화론을 - 의도적으로 - 오독하지는 않았는가. 아니, 지금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진화론은 어떤 의미인가.
이 시대에 진화론이 갖는 함의는 무언가.

가장 중요하게도, 우주와 생명의 본질을 나의 언어로 설명할 수 있는가, 나, 고독해하거나 두려움이나 허무에 빠지지 않고
우주속에서, 역사속에서의 내 生의 의미를 찾을 수 있는가. 내가 생존하고 살아가는 일의 가치를 찾을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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