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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기의 즐거움 - 우리가 사랑한 작가들의 매혹적인 걷기의 말들
존 다이어 외 지음, 수지 크립스 엮음, 윤교찬.조애리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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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완서는 수필 <나의 환상적 피서법>에서 여름에 혼자 집에 남아 있어 보면 에어컨이나 선풍기가 없어도 시원하다고 썼다. 이웃집에서도 인기척이 들리지 않으면 약간은 고독하겠지만 고독처럼 산뜻하고 청량한 냉기는 없다는 것이다. 물론 텅 빈 집에 홀로 있으면 시원하기야 하겠지만 방해받지 않는다는 사실만으로는 온전히 털어낼 수 없는 무엇이 우리 위에 여전히 그늘을 드리울 때가 있는 것도 부인할 수 없다. 그건 집안에서 홀로 있더라도 자기 자신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버지니아울프가 <런던 거리 쏘다니기>에서 말하듯이 내 방의 물건 하나하나에 내가 들어있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함께 지내왔던 익숙한 사물들이 집안 곳곳에 놓여 있다. 물건마다 내가 들어있다면 나는 도대체 얼마나 많은 나와 함께 지내는 걸까? 의자 등받이에 항상 걸쳐져 있는 낡은 카디건과 하루에도 수십 번은 바라보게 되는 벽시계, 창밖으로 보이는 목련과 장미 덤불까지, 낯익은 것들에 눈을 감아 봐도 소용이 없다. 내게서 온전히 벗어날 수가 없는 것이다.

 

피부처럼 익숙해진 집에서 나가보기로 한다. 집 앞 골목으로 향하는 문을 연다. 다만 이곳에서 사라지기 위해서다. 가족과 친구들에게는 어쩌면 나 자신으로 보일 수도 있는 카디건을 벗어버리고 나도 모르는 내가 되어보기로 하는 거다. 그러므로 지금 이곳은 여기에 남겨둔다.‘나도 모르는 나는 바로아무도 아닌 사람이다. 이름도 없고 어쩌면 형체도 없는, 마치 투명인간처럼. 머물던 곳과 사로잡혔던 모든 일과 생각들에서 벗어나는 것, 그리하여 홀가분해지는 것, 가능할까?

 

문을 닫고 밖으로 나서면 우리를 감싸고 있던 껍질이 부서진다. 아침마다 식탁을 차리고 식구들을 깨우는, 마당의 고양이들에게 다가가 야옹거리는 내가 갑옷처럼 뒤집어쓰고 있던 라는 껍질이다. 버지니아 울프는 그 껍질을 우리 영혼이 그 안에 들어 살기 위해, 스스로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모습을 갖기 위해, 자기 분비물로 만들어낸 외피라고 불렀다. 이 외피는 집 밖으로 나가면 금세 부서져버린다. 껍질을 벗어버린 나는 몸 전체가 거대한 하나의 눈처럼 되어 세상의 모든 것들을 바라보고 받아들인다. 홀로 거리를 걸으며 내가 아닌 채로 또 다른 내가 되는 것이다.

 

 

 

[걷기의 즐거움]은 바로 그 걷기에 관한 글들을 모았다. 17세기 중엽부터 20세기 초반까지 걷기라는 주제를 다룬 시와 에세이, 그리고 소설 속의 장면들을 모았다. 엮은이 스스로 언급하듯 이 책에 실린 글들을 역사적인 맥락에서 볼 때 걷기는 대개 백인 남성 위주의 활동이었다. 버지니아 울프가 아버지가 죽고 난 후에 이사를 한 블룸즈버리에서 매일 산책을 다닐 수 있었던 건 운이 좋았기 때문이었다. 여자들이 비교적 자유롭게 도시를 걸어 다닐 수 있게 된 건 얼마 되지 않았다. 산책은 새로 얻은 자유였다. 그 이전까지는 거리에서 어슬렁거리며 지나가는 사람들을 관찰할 수 있었던 건 비교적 부유한 남성들뿐이었다.

 

리베카 솔닛이 [걷기의 인문학]에서 "왜 여자들은 나와서 걸어 다니지 않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진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로런 엘킨이 역시 [도시를 걷는 여자들]의 서문에서 플라네리(산보)란 단어를 얘기하면서 플라뇌르(남성)란 단어는 있는데 플라뇌즈(여성)라는 단어가 없다는 걸 발견하고 믿을 수 없었다는 표현을 쓴다. 걸어 다니는 기쁨이 성별에 따라 다를 리가 없는데 말이다. 버지니아가 대영 박물관에서 여성들에 관해 제대로 쓰인 책들을 발견할 수 없었던 때 느꼈던 감정과 비슷하지 않았을까?

 

산책하는 여성들은 매우 희귀한 존재였다. 19세기 여성들이 쓴 글을 보면 당시 부르주아 여성은 혼자 집 밖으로 나가는 바로 그 순간에 평판이 손상되고 명예를 잃을 위험에 처한다. 거리에 나온 여자는 말 그대로 거리의 여자, 성매매 여성일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라고 비평가들은 말하지만 이런 자료들도 대체로 남자들이 작성했을 것이다. 남자는 남자의 방식으로 보고 쓴다. 걷기에 관해서는 물론 평범한 여성의 생활에 대한 기록도 많지 않다. [걷기의 즐거움]에서 브론테 자매, 제인 오스틴, 버지니아 울프, 엘리자베스 개스켈, 조지 엘리엇 등을 비롯한 여성 작가들의 글을 발견하는 기쁨이 더욱 각별한 이유다.

 

읽다 보면 즐거워진다. 마음 가볍게 읽다 보면 신기하게 몸도 가벼워진다. 걷다 보면 나도 그들처럼 즐거워질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오래 눌려 납작해진 마음이 몽실몽실 부풀어 오르는 느낌이 사랑스럽다. 그리고 또 한 가지, [걷기의 즐거움]이란 제목을 달고 있긴 하지만 [읽기의 즐거움]까지 준다. 덤이라 부르기에 넘칠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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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인생에 바람을 초대하려면 - 세계적 지성이 들려주는 모험과 발견의 철학
파스칼 브뤼크네르 지음, 이세진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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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관 앞에 택배상자가 놓여있다. 상자를 열어 내용물을 정리하는 것이 아침에 제일 먼저 하는 일인 때가 많다. 온라인 쇼핑몰에서 식재료, 냉동식품, 욕실용품까지 한 번에 구입할 수 있으니 여러모로 편리하다. 잠시나마 무거운 장바구니를 들고 다니지 않아도 되고 상점들을 돌아다니며 필요한 물건들을 찾아 헤매지 않아도 된다. 그뿐인가. 외출준비를 할 필요도 없고 꽉 막힌 도로에서 오도 가도 못하는 상황을 겪지 않아도 된다. 한밤중에 침대에 누워서 쇼핑을 해도 다음날 새벽이면 어김없이 내가 선택한 물건들이 도착한다. 온라인 쇼핑이라고 하면 알라딘 정도밖에 이용하지 않았던 몇 년 전과 비교하면 그야말로 상전벽해(桑田碧海)다.    

  

  그뿐만이 아니다. 얼마 전에는 속해 있는 문학회에서 연락이 왔다. 교류하고 있는 해외문학회와 화상회의가 있으니 사무실로 오라기에 참석하기 어렵다고 했더니 줌(zoom)으로도 가능하다며 연결코드를 보내겠다고 했다. 회의가 열리는 시간까지 집에 돌아올 수가 없어 그도 어려울 것 같다고 하자 스마트폰으로도 연결할 수 있다는 친절한(?) 설명이 덧붙여진다. 아.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나는 보이지 않는 상대방에게 거듭 고개를 숙이며 항복하고 만다.      


스마트폰이 세상을 내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네! “     


  스마트폰으로 사람들과 연락을 한다. 음악도 듣고 영화를 본다. 쇼핑은 물론 회의도 가능하다. 이렇게 말하면 마치 스마트폰 한 대만 있으면 세상을 가질 수 있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사실 스마트폰이 하는 일은 우리에게 세상을 가져다주는 대신 세상을 쓸모없는 것으로 만든다는 것이 [우리 인생에 바람을 초대하려면]의 저자 파스칼 브뤼크네르의 지적이다. 그의 말대로 실재하는 세상을 외면하고 스마트폰 속에 머문다 해도 문제는 없어 보인다. 휴대전화의 본래 기능은 바로 '연결'이었다. 이제 우리는 다른 대륙에 있는 낯선 이들의 삶을 들여다보느라 곁에 있는 이들과 소원해진다. 나란히 앉아서 각자의 휴대전화를 들여다보고 있는 연인들을 보는 게 어렵지 않다. '연결'을 위해 대화를 멈춘 이들에 나도 포함된다. 휴대전화가 우리들을 지배한다. 알람이 울리면 감전된 듯 손이 떨린다. 무슨 일일까? 누구일까? 살아 있는 실감, 누군가와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 당장 확인하지 않으면 삶을 바꿀 수 있을 기회를 놓치기라도 할 듯 서두르지만 다음 순간 멋쩍게 휴대전화를 내려놓는다. 할인행사 시작 시간을 알려주는 동네마트 아니면 택배가 도착했다는 알림일 뿐이다. 시간 맞춰 영화관에 가고 차를 갈아타며 모임에 참석하고 무거운 장바구니를 들고 오가는 대신 휴대전화를 쥔 채 집에 머무는 우리들은 예전보다 행복한가.     


  코로나 19 바이러스는 좋은 핑계였다. 집에 있으면 마스크를 쓰거나 출입명부를 작성하는 수고를 덜 수 있었다. 서로 다가가지 않는 것이 미덕인 시대였다. 재택근무와 재택수업, 온라인쇼핑은 내가 원한 게 아니라 상황이 강제한 것이었다. 만남은 미뤄지고 조금씩 더 게을러졌다. 아무도 걱정하지 않았다. 어쩐지 삶이 조금 느려진 것도 같았다. 계속 이렇게 살아도 괜찮겠다고 했던 사람들은 팬데믹 사태가 끝났을 때 당황했다. 강제가 없어진 곳에 선택의 부담이 들어섰다. 다시 주어진 자유는 불안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집에서도 충분한데 왜? 인터넷이 있잖아! ‘자유로운 시간은 악몽이 되었다’.    

  

  재앙은 끝나지 않는다. 펜데믹, 전쟁, 기후위기에 관한 뉴스가 넘쳐나는 세상에 지친 사람들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보통의 날을 꿈꾸지만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 일상도 고단하다. 오늘이 어제 같고 내일도 별다를 게 없을 게 눈에 보인다. 간간이 들리는 위층의 소음, 자질구레한 불안과 가벼운 충돌도 버겁다. 이런 날들이 끝도 없이 단조롭게 덧붙여지는데 여기에 자기답게 살아가야 한다는 피로가 추가된다. 저자는 이를 ‘현대적인 피로’라고 썼다. ‘제자리에 있기 위해 온 힘을 다해 달려야 하는’ 삶은 주어진 게 아니라 우리가 선택한 것이다. 우리에게 ‘진정 필요한 건 평정심이나 차분함이 아니라 진짜 사건, 자신을 벗어나는 경험이다. 현명함 대신 가벼운 광기, 영적인 치료제가 아니라 짜릿한 도취’가 필요하다. 팬데믹을 경험한 우리가 정말로 배웠어야 할 건 손을 제대로 씻어야 한다는 것에 더해 ‘죽음 이전에 진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어린 시절 오후의 볕이 툇마루에 내려앉으면 엄마는 오늘 저녁은 뭘 먹나 중얼거리곤 했다. 그러다가 시장에 가볼까 몸을 일으키면 나는 놀이터에라도 가는 양 신이 났다. 단골 가게들을 들른 뒤 올망졸망한 바구니들을 앞에 늘어놓은 할머니들 앞을 지났다. 엄마는 미리 정하지도 않고 장을 봤다. 물이 좋은 생선을 구하는 날도 있었고 낯선 채소가 눈길을 끄는 날도 있었다. 나는 엄마를 따라간 시장에서 기대하지 않았던 걸 발견하는 기쁨과 둘 중 더 좋은 걸 선택하는 어려움을 배웠다. 시장에서 계절이 오고 가는 걸 실감했다. 살맛이 나지 않으면 시장에 가보라는 말을 하던 시절이었다. 엄마의 일상은 나의 그것보다 설렘이 많았다. 무엇보다 진짜였다. 만져보고 냄새 맡는 기쁨이 있었다.


  파스칼 브뤼크네르가 걱정하는 것은 작은 방 안에서 모든 것이 가능한 이 시대에 익숙해진 인간들이 무기력해지는 것이다. 위장된 평온으로 자신을 감싸고 스스로에게 족쇄를 채우고 감금된 채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경종을 울린다. 책의 어디쯤에서부턴가 스스로 만든 세계가 완벽하다고 느낄수록 그 세계는 점점 작아지고 있다는 걸 깨닫게 된다. 자유롭다는 착각 속에서 권력에 지배당하고 작은 방에 갇혀 세계가 점점 넓어지는 환각에 취한 자신을 들여다보는 건 놀랍다. 삶은 휴대전화와 온라인 쇼핑과 인터넷만으로 이루어진 게 아니라 자유와 선택과 결단으로 이루어진 것이라는 걸 외면했던 자신을 발견하는 낭패감, 그리고 막막하고 불안해하면서도 자유 앞에 선 자신을 발견한 기쁨!


  익숙한 작가들과 문학작품들이 등장한다. 제임스 조이스와 캐서린 맨스필드, 버지니아 울프, 아니 에르노,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이름이 나란한 문장을 읽는 즐거움이 있다. 책을 읽는 동안 휴대전화가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속도감 있는 독서가 가능하다. 흐르는 강물처럼 유려한 문장들이 단정하기까지 하다. 철학이 하는 일이 우리의 삶을 설명하는 것이라면 그 정의에 부족함이 없다. 그 삶을 어떤 방향으로 이끌지 선택하는 건 독자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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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론테 자매, 폭풍의 언덕에서 쓴 편지 - 뜨겁게 사랑하고 단단하게 쓰는 삶 일러스트 레터 3
줄리엣 가드너 지음, 최지원 옮김 / 허밍버드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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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론테 자매

폭풍의 언덕에서 쓴 편지

by단어벌레2분전

여자가 남자에게 묻는다.

“새로운 삶은 즐거운가요? 가끔은 당신이 부러워요. 매일 아침 갈 곳이 있다는 게.”

 이번에는 남자가 묻는다.

“당신은 어때요? 삶이 만족스러운가요?”

 여자가 대답한다.

“저 같은 여자에겐 삶이 없어요. 옷과 연회장을 선택하죠. 자선을 하고 휴가도 갑니다. 하지만 결혼하기 전까지 대기실에서 기다려야 해요.”

 남자가 난처해한다.

“제가 당신을 화나게 했군요.”

 여자는 담담하다.

“제 삶 때문에 화가 난 거예요. 당신이 아니라.”     


  드라마 <다운튼 애비>의 한 장면이다. 단지 남자라는 이유만으로 하루아침에 작위와 영지의 상속자가 된 남자와 그 남자 때문에 상속에서 제외된 여자의 대화다. 배경은 세계 1차 대전이 일어나기 직전, 당시에 영국 여성들에게는 상속권은 물론 참정권도 없었다. 여자들은 화가 나 있었을 터다. 하긴 여자들이 화를 내지 않을 때가 있었던가? 드라마 속의 남녀가 대화를 나눈 때로부터 거의 백 년 전에 태어난 브론테 자매들도 예외는 아니었을 것이다.     



 [브론테 자매, 폭풍의 언덕에서 쓴 편지]는 브론테 자매들이 요크셔의 작은 목사관에서 평생을 보내며 쓴 일기, 편지, 그림들로 그들의 비범했던 삶을 재구성한다. 샬롯 브론테가 종이를 아끼기 위해 이중의 사선으로 글을 쓴 편지, 돋보기가 없으면 해독할 수 없을 만큼 작은 필사본들, 어른들의 신문을 흉내 내어 만든 미니어처 신문들 속에서 그들의 비범함이 빛난다. 거듭되는 낙담과 좌절은 차라리 횃불이었다. [폭풍의 언덕]이나 [제인에어]를 쓸 종이를 한 번에 몇 묶음밖에 살 수 었었던 가난, 잠시도 멈출 수 없었던 운명과의 격투를 비쳐주던. 마침내 싸움이 끝났을 때 샬롯 브론테의 나이는 서른아홉, 그녀는 자매들 중 가장 오래 살아남은 사람이었다.     

 

 샬롯이 자신의 시를 묶어 계관 시인이었던 로버트 사우디에게서 보냈을 때 그녀가 받은 건 환대와 응원이 아니라 비웃음과 조소였다. 그들의 재능과 용기와는 무관하게 당시의 여자들이 문학이란 링에 오르려고 했을 때 가장 먼저 맞닥뜨려야 했던 것.   

   

 "문학은 여성에게 필생의 사업일 수 없으며 그렇게 되어서도 안 됩니다. 여성은 자신에게 합당한 직분에 몰두할수록 그저 교양이나 기분 전환을 위해 문학에 시간을 쏟을 여유가 없어지니까요. 당신은 아직 그러한 직분으로 인도되지 못했지만 장래에 그렇게 된다면 명성을 얻고 싶다는 열망도 줄어들 겁니다. 즐거움을 위해 상상력을 발휘하려 하지도 않겠죠."     


 그 ‘직분’은 바로 아내가 되는 일이었지만 브론테 자매들은 그 직분으로 인도되기 이전에 스스로 생계를 꾸려야 하는 상황에 직면했고 그들이 찾아낸 직분은 바로 가정교사였다. 그들이 목사관을 떠난 건 가정교사가 되기 위한 교육을 받기 위해, 혹은 가정교사로서 돈을 위한 때가 전부였다. 만일 그녀들이 하워스의 황량한 들판을 헤매는 대신 분주한 세계와 활기가 넘치는 도시를 여행하고, 생계를 꾸리고 아버지와 남자형제인 브랜웰을 돌보는 대신 그들이 열망했던 부류의 사람들과 접촉하고 다양한 인간들과 교제를 했더라면 어땠을까?    


  샬롯 브론테는 감자 껍질을 벗기고 양말을 기우며 침묵하는 동안에도 경험과 교제와 여행을 꿈꿨다. 샬롯이 [제인 에어]를 쓰면서 드러내놓고 운명과 한바탕 격투를 벌인 것은 영원히 허용되지 않을 그 욕망을 잠재우는 데 실패한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리하여 등장인물에 대해 써야 할 때 자신에 대해 쓴 건 아니었을까? 작가로서 이야기를 이끌어나가는 대신 자신의 비탄에 머무르는 실수를 저지른 것도 그래서였을까?      

  그녀가 서른아홉이라는 나이에 죽어버리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마땅히 누려야 할 경험과 교제와 여행에 굶주리지 않았다면, 낙담과 좌절 대신 환대와 응원을 받았다면 어땠을까? 그녀의 삶만큼 그녀의 이야기도 넓어지고 깊어졌을까? 인생이란 다면체이고 머물러 있지 않으며 끊임없이 움직인다는 걸 알게 됐을까? ‘미워하고, 사랑하고, 괴로워하는’것 외에도 삶의 틈을 메우는 비밀들이 존재한다는 걸 인정했을까?      

 그녀들의 글을 읽는 건 하얀 재에 살짝 덮인 잉걸불에 다가가는 것 같았다. 누군가가 후후 작은 바람이라도 일으키면 금세 활활 타오를 뜨거운 불꽃들로 가득 찬 화로. 브론테 자매들이 태어난 때로부터 이백 년이 지났다. 지금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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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의 미친 여자
샌드라 길버트.수전 구바 지음, 박오복 옮김 / 북하우스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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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이렇게 두꺼운 책인 줄 몰랐기에 어이쿠 하고 놀랬다. 지금은 이렇게 재미있는 책이라면 더 두꺼웠더라도 괜찮았겠다 싶은 마음. 하긴 샬롯 브론테와 제인 오스틴이라면 할 말이 많긴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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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토옙스키 컬렉션 (도스토옙스키 탄생 200주년 기념판) - 전11권 - 가난한 사람들 + 죄와 벌 + 백치 + 악령 + 카라마조프 씨네 형제들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지음, 석영중 외 옮김 / 열린책들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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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다 겨울이면 러시아 작가들을 읽어왔습니다. 올해는 도스토옙스키와 함께 보내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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