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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링크로스 84번지
헬렌 한프 지음, 이민아 옮김 / 궁리 / 2004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이런 이야기가 '실화'라는 것에 감사함을 느낀다. 서간체로 이루어진 소설이었다고 해도 흥미롭게 읽혔을 내용인데 더군다나 '있었던 일'이다.
미국에 사는 가난한 무명작가 헬렌한프과 영국의 헌책방 직원 프랭크 도엘은 20년 동안 책을 주문하고 판매하면서 편지를 주고 받는다. 말하자면 주문서와 송장인데, 거기에 사사로운 이야기라던가 짖궂은 농담이 섞여 멋진 작품으로 탄생되었다. 헬렌 한프라는 무명작가는 정말 마음이 따듯한 사람이었을 거다. 물건을 쉽게 구하지 못하는 당시 영국의 실정을 생각해서 미국의 값싼 음식들을 보내주기도 하고 친구들이 영국을 여행갈때면 안부를 부탁하기도 한다. 그녀는 단 한번도 성공해보지 못했던 가.난.한. 작가였음에도 말이다. 영국 고서점의 프랭크 도엘은 장인정신을 발휘해서 서점일을 돌본다. 정성껏 헬렌에게 답장을 쓰고 헬렌이 요구하는 여러 서적들을 의욕적으로 찾아주기도 한다. 그의 가족들과도 서신왕래가 발생하면서 가족들은 헬렌한프가 영국에 놀러오길 기대했지만 끝끝내 그들은 직접 만나지 못했고 편지로만 왕래한다. 읽는 내내 '헬렌이 영국을 가면 얼마나 좋을까'하는 생각을 했다. 어쩌면 그렇지 못한 아쉬움이 더욱 그들의 관계를 빛내줄지 모른단 생각이 든다. 한번도 만나지 않아도 서로를 위하고 서로의 마음을 안다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고, 그래서 더 소중한 인연일 수 있으니까.
오전 일찍 주문하면 오후에 책을 받을 수 있는 요즘 세상에 책을 편지로 주문하고, 또 그것을 받기까지 몇달을 기다린다는 60년전 이야기는 너무나 낭만적이다. 참 불편했겠구나 하는 생각보다는 기다리는 시간을 기대감으로 채울 수 있는 것이 부럽기도 하다. (그러나 난 현재의 시스템에 너무나 익숙해져서 하루정도만 배송이 늦어져도 불안감으로 신경이 곤두서곤 한다.) 근대에 출판된 희귀서적을 눈으로 본적이 없어서, 헬렌한프가 감동받았을 책의 이음새, 겉표지에 쓰인가죽, 거기서 나는 냄새 등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 안타깝다.
* 전 속표지에 남긴 글이나 책장 귀퉁이에 적은 글을 참 좋아해요. 누군가가 넘겨보았던 책장을 넘길 때의 그 동지애가 좋고, 또 오래 전에 세상을 떠나 누군가의 글은 언제나 제 마음을 사로잡는답니다. - 헬렌한프-
* 친애하는 헬렌, 마음의 준비 단단히 하세요. 먼젓번 편지에서 요청한 세 권이 일제히 당신한테 가고 있습니다. 일주일이면 도착할 겁니다. 어떻게 한 건지는 묻지 말아요. 그저 마크스 서점의 서비스라고만 생각해줘요. - 프랭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