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착각 - 허수경 유고 산문
허수경 지음 / 난다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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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관에서 쉬어 가세요, 착각 여관]

독일 어느 한 지점에 ‘착각 여관’이 생겼다.
한 시인이 지상에 차린 여관인데, 이곳에는 유한한 생각들이 머물다 가곤 했다. 머물던 생각들이 가끔 무한을 꿈꿨는데, 결국 참지 못하고 무한을 찾아 떠난 생각들은 길을 잃기도, 헤매기도, 주저 앉기도.
다시 여관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던 생각들이 지은 이름이 곧, 착각 여관.

“착각은 발칙하게도 시인이 지상에 차린 여관에 손님으로 와서는 어느 사이 여관 이름마저 ‘착각’이라고 개명해버렸다. 아주 오래된 일이다.” __(작가의 말)


[생의 절반 이상은, 아니 대다수는 착각이었음을]

한 단어에서 출발한 마음들은 제멋대로 뻗어나간다.
그러다 변질되고 다른 생각으로 전이되기 마련. 한 마음, 한 단어를 잃지 않고 다시 그러모으는 작업이 가능한 사람은 분명, 단어를 가꾸고 돌봐서 허투루 튀어나가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 자이리라.
그런 사람에게만 그 한 단어를 사용할 자격이 주어지기를. 나도 마음껏 쓸 수 있는 단어야, 라는 생각이 착각이라고 깨달을 수 있기를.

“착각 속에서 작아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크게 보이는 것도 없다. 착각의 영상은 유영이다. 부유하는 기억. 그 가운데 착각은 말한다. 나, 여기에 있었다고. 숨죽이며 그러나 떠돌며 그러나, 내가 있는 곳은 여기, 인식론적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 존재의 가장자리, 기억(혹은 시간의 흐름)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닌 나.” __(116p)


[그럼에도, 무수한 착각들이 나를 키워왔다는 말]

너무 일찍 자신이 유한함을 깨달아 버린 시인.
자신과 외부의 경계 사이에 생기는 균열을 인지해버린 사람.
지구라는 거대한 것이 움직이는 소리를 들어보려 했던 인간.
그 어떤 수식어도 착각으로 만들어 내는, 감히 수식되지 않을 이름. 어쩌면 이 모든 내 판단과 평가와 수식이 ‘착각’에 불과했음을 깨닫게 하는 시인.
죽음이라는 무지의 세계 또한 꿈을 꾸듯 인생을 버텨내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저 착각에 불과하기를.
착각하며 살아가는 이들이 이 작은 책으로 수렴하기를.

“우리가 ‘정신’의 영역에 속한다고 믿고 있는 많은 것은 어쩌면 우리 몸이라는 ‘물질’의 비균형에서 나온 것은 아닌가? 어쩌면 이런 생각도 착각의 산물이기도 하다. 논리적으로 설명될 수 없는 세계 앞에 서 있는 불안. 그리고 모든 것을 다 설명하고 난 뒤에야 안심이 되는 세계.” __(10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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