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아바나의 시민들 슬로북 Slow Book 1
백민석 글.사진 / 작가정신 / 2017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한여름의 한가운데, 책을 읽는다. 태양 아래 느리게 걷는 여행객이 있다.
그 여행객은 작가 일수도 있고 나일 수도 있다. 그 여행의 걸음을 따라 걷다 보면 어느새 나는 아바나의 한 자락에 가닿는다. 나는 그 자리에 있다. 천천히, 느리게, 그러나 온몸으로 걷고 있다.
책의 끝자락에 다다랐을 때 나는 새로운 눈으로 나의 삶을 바라보고, 온몸으로 매 순간을 걷고 있다.
천천히, 그리고 느리게. 나는, 아바나에 있다."

- 2017. 8. 1. 「아바나의 시민들」 을 읽고 끄적이다 -

 

   

 

새로 나온 백민석 작가의 여행 에세이, 「아바나의 시민들」.
처음엔 제목을 보고 과연 무슨 이야기길래 이렇게 제목이 진지할까 싶었지만, 책을 집는 순간, 강렬한 빨강과 함께 책 표지의 질감이 너무 좋아 책을 펼치기도 전 마음을 빼앗겼다.

여행 에세이지만 독특하게 '당신'이라는 2인칭을 사용해 무언가 한걸음 떨어져 아바나를 바라보게 했고, 또 '당신'에 나를 포함시켜 읽는 내가 그 사진을 찍고 생각을 하며 같은 감정과 생각을 공유해보게 하기도 한다. 순서 없이 흩어져 있는 사진들, 그 장면 속에서 느낀 생각과 감정들의 짤막짤막한 이야기. 객관적인듯 담담하지만 그로 인해 뜨거운 태양 아래의 아바나가 서정적으로 느껴지기까지 한, 여행 에세이.

아바나는 쿠바의 수도다. 이 책은 아바나를 5군데로 구분지어 각 장소마다 비선형적으로 사진과 이야기를 배치해놓았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어떤 상황이, 또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지 알 수 없고, 그것은 작가가 여행하는 방식과도 비슷하다.

소비적인 여행, 여행 장소에 대한 수많은 정보들이 쏟아져 나오고 더 멋진 곳, 더 멋진 사진, 독특하고 자랑할만한 무언가를 찾아 계획하고 누군가가 좋다는 곳을 찾아 떠나는 요즘, 그런 여행의 형식을 벗어 던지고 작가는 아무것도 없는 아바나에서 무작위 여행을 한다. 아무것도 없어 도리어 많은 것을 찾을 수 있는 아바나에서 그 때 그때 마주치는 순간들을 기록한 이 책을 보며, 몇번이고 다시 돌아가 사진과 글을 마음으로 읽어본다.

 

 

"당신은 한국식으로 생각하고 한국식으로 궁금해한다. 당신이 알고 싶은 사항이 낚시꾼에게는 하등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 당신은 그런 의미에서 아직도 서울에 있는 셈이다." -p11


 

 

"마주치는 사물들, 책들, 사건들, 사람들을 뜯어보고, 나눠보고, 낱낱이 해체해본 다음, 그 결과들을 다시 이어 붙여 자신만의 의미를 구축하는 일이 습관이 된 당신이다. 당신은 그런 분석 절차를 거치지 않고는 어떤 생각도 내뱉을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 그래서 다른 여행지에서 본적이 없는 형태의 방파제, 말레콘에 대해 한동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p32

 

 

"무채색 배경을 부정하는, 생명이 거기 살고 있음을 보여주는 눈 시린 은유들처럼." -p50


"이 늙고 단순하고 물러설 줄 모르는 불굴의 낚시꾼 같은 말레콘은, 1902년부터 당신 같은 여행객들을 상대해왔다. 말레콘은 즐거움만을 주지 않는다. 고통은 말레콘이 준비한 또 다른 선물이다. 목마름과, 이런저런 사고와, 격렬한 햇볕에 반비례하는 어두운 상념 속에서 문득 당신은 중얼거리게 된다. 고통과 즐거움은 서로 다르지 않으며 에스프레소의 쓴맛처럼 고통이 때론 즐거움의 풍미를 더 깊게 할 것이라고."
- p52

 

 

 

우린 그들의 깊숙한 곳까지 들어가 보지 않았고, 그렇기에 그곳을 '안다'고 말할 수 없다.
사진을 보는 것, 찍는 것만으로 그 순간을 온전히 기록했다 할 수 있을까.

작가의 글이 좋았던 것은, 보이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게 하는 여행 서적이 아니었기 때문. 이 책엔 쿠바의 인위적인 아름다움만 강조하는 사진과 글이 아닌, 또는 편견으로 편집하는 것이 아닌, 무작정 걷는 곳에서 마주친 있는 그대로의 자연과 건물,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모습을 기록하고 그 순간의 단상들이 적혀있다. 그런 단상들은 단단한 편견과 인위의 틀을 깨고, 내가 보는 것이 전부가 아님을, 내가 하는 여행이 그곳의 전부가 아님을 생각하게 한다. 무작정 걷고 우연히 마주친 것들을 보고 느끼며 나만의 세계를, 편견과 고정관념들을 깨어가는 것.

이 또한 작가의 시선으로 바라본 것일 수 있지만, 그런 시도 자체가 지금의 나에겐 반갑고 의미있는 것이었다. 

 

 

 

"대중매체가 시민들의 눈을 잡아끌지 못한다면, 시민들 스스로가 즐길 거리를 자아낼 것이다. ... 인간은 소비할 때가 아니라 생산할 때 양질의 만족을 느낀다. ...그러니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생산해볼 것. ... 중요한 것은 결과보다는 생산의 행위이고 실천이다. 권태는 그때야 비로소 물러날 것이다. 생산의 행위 자체가 행복이다." -p306-308

 

 

"아바나의 어느 집 마당 풍경은 어떤 관광 명소보다 당신 기억에 뚜력하다. 배불뚝이 중년과 어린아이는 어떤 관계이고 무슨 얘기를 나누고 있을까. 여행객의 기억에 오래도록 생명의 불씨를 살려주는 것은 바로 이런 현지인의 삶의 현장이다." -p236



천천히 음미하며, 읽고 또 읽었던 책. 느린 걸음으로 작가의 시선을 따라 쿠바의 아바나를 생각해본다. 뜨거운 태양, 광활한 하늘과 바다, 그 아래 숨쉬는 생명력에 대해. 그리고 자유롭게 걸어다니며 보이는대로 느끼고 만나게 될 것을 기대해본다. 우연히 마주치는 값진 순간을 발견하는 행운, 그저 그 공간을 살아내는 호흡을 따라가다보면, 어느새 한국에서의 삶을 살아가다 잃어버린 것들을 떠올리게 된다.

「아바나의 시민들」은 현재의 모습을 잠시 떠나 나의 '삶의 가치'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했다. 그리고 정보가 주어지는대로 사람들이 살아가는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것들에 의문을 품고 반문해보며, 좀 더 깊이 있는 여행, 그리고 음미하며 살아갈 수 인생을 살아보고 싶게 만들었다.

정말 정말 좋았던, 「아바나의 시민들」. 두고두고 때때로 꺼내 읽고 싶은 책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