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 싶어서, 가고 싶어서 - 내게 왜 여행하느냐 묻는다면
박세열 글.그림.사진 / 수오서재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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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 싶어서, 가고 싶어서" / 박세열 / 수오서재


한때 여행은 그 나라의 명소를 방문해 인증 사진을 찍거나, 유명 맛집을 탐방하거나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자랑하기 위해 특별한 곳, 또는 멋진 곳을 찾아다니거나, 그렇지 않으면 수동적으로 주어진 대로 정보를 따라 여행하거나, 이런 식이 많았다. 어쨌거나 무언가를 또 성취해야 되는, 목적지향적인 그런 여행이었다. 하지만 근래에 여행이란, '자신만의 방식으로 살아보는 것', '느리지만 천천히', '목적없이 발걸음 향하는 대로' 뭐, 그런 것이라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

효율적이고 많은 것을 '얻는 것 같은' 그런 여행이 아닌, 정보 습득과 성취가 아닌, 느리고 비어있고 실수투성이일지라도 자신만의 걸음으로 빈칸을 채워가는 여행을 한, 또 한명의 사람이 여행 에세이를 썼다. 이 책을 읽으며 잠시 숨을 고르고 사람 사는 맛에 대해 생각해본다. 그만큼 맛이 깊고 짙었던 책이었다.

 

각 사진과 그림, 이야기마다 여행지가 적혀 있지만 그렇다고 그 나라의 명소나 특별한 장소에 대해 설명하고 있지는 않다. 저자는 그 장소에서 만났던 '사람'과 '삶'에 대해 이야기한다. 때론 에피소드를 통해, 때로는 기억의 단상들을 통한 짧은 글로.

좋았던 글귀들과,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들었던 생각을 적어본다

 

#.

"여행의 80퍼센트'만' 맞아도 그건 불행한 여행이라고요. 그러니까 너무 고민하지 말아요. 그렇게 계획한 대로 생각한 대로만 여행을 하면 얼마나 지루할까. 심심할까. 생각해온 여행 중에서 한 70 퍼센트만, 아니 그보다도 덜 해보려고 해봐요. 의외의 일들이 일어날 여지를 만드는 거죠. 그럼, 그 빈틈 사이에서 재미있는 일들이 일어날 거예요. 그리고 여행이 끝나고 행복했다고 이야기하겠죠."
-p 32,33


여행을 다녀와 가장 행복했고 오래 기억이 남았던 순간은, 길을 헤매고 고생하면서도 새로운 무언가를 발견할 때, 그냥 지나칠 뻔했던 그런 순간을 우연히 마주할 때, 또는 그 길 위에 있던 순간 그 자체였다. 반면 내가 이 돈 주고 어렵게 여행을 왔는데, 본전은 찾아야지! 라는 마음으로 열심히 찾아다니고 목적지를 향해 달렸던 여행은, 많은 것을 얻은 듯 했지만 정작 돌아오는 길은 '내가 뭐했지?'란 생각이 들 때가 많았다.

여행은, 의외의 일들이 일어날 여지를 만드는 것. 그 빈틈을 그곳이 채우도록 비워놓는 것.
여유를 가지고 삶의 빈 공간을 만들어 가는 것이 여행.

 

#.  

"... 여행은 참 뚝배기 같네요. 그러니까요, 뚝배기를 끓이면서 간이 안 맞다고 버리고 다시 하진 않잖아요. 거기에 소금도 더 넣고 파도 더 썰어 넣고, 된장도 풀어 넣고. 그렇게 상황에 맞춰서 맛을 만들어내죠. 여행도 버스를 놓쳤다고, 사기를 당했다고 해서 이번 여행 망쳤다고 처음부터 다시 하는 게 아니라 그 상황에서 다시 재미있게 지내보려고 노력하잖아요. 버스터미널에서 옆 사람이랑 이야기도 해보고 갑자기 행선지를 바꿔보기도 하고. 그런 게 결과적으로 더 재미있는 일들로 이어지게 하고 좋은 사람들도 만나게 해주고. 그렇게 제 여행이 더 즐거워지고 완성돼가는 기분이에요. 그래서 여행이랑 뚝배기랑 닮았다는 말이죠. 그렇게 여행이랑 사람 사는 일상도 비슷하겠죠?
여행 오기 전까지는 자꾸 '새로 대학 가고 싶다, 새로 스무 살로 돌아고 싶다. 새로 시작하고 싶다'를 입에 달고 살았는데, 이제 그냥 있는 상태에서 제 방식대로 간 잘 맞춰보렵니다."
- p 44,45


여행은 뚝배기와 같은 것. 주어진 상황에 맞춰 맛깔나는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것. 그렇게 스스로 이야기를 완성해가는 것. 그것이 여행의 맛, 삶의 맛.

 

#. 

 

중간 중간 귀여운 아이들, 아련한 풍광들, 그리고 손으로 하나하나 그린 그림들로 페이지가 채워진다. 저자만의 색깔과 여행의 모습이 채워진다.

#.
 

때론 길을 잃은 그곳에서 따뜻함을 만난다. 여행도, 삶도 그러하다. 그저 보고 싶어서, 가고 싶어서 가는 여행이라지만, 여행을 통해 삶의 맛을 보는 이야기들이 참 좋다.

#.
 

"그 안에는 미얀마가 있었고, 태국의 목이 긴 카렌족 아가씨가 있었고, 캄보디아의 얼굴들이 있었다. 그는 누구보다도 이 그림 속 풍경들, 사람들을 오래 바라보았을 것이고 떠올렸을 것이다."
-p92


나의 시선과 마음이 오래 머무는 여행. 
이런 여행을 해보고 싶다. 많은 것을 보지 않아도, 사소해도, 오래도록 머물며 바라보고 마음에 담아보는 그런 여행.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것이 아닌, 오래도록 바라보는 여행.

 

 

#. 

"한때는 다른 여행자의 이야기를 지나치게 갈구했었다. 그리고 그들처럼, 빨리 익숙해지고 싶었고 그럴듯해 보이고 싶었고 여권의 입국 도장이 가득하길 바랐었다. 그런데, 지나고 보니, 첫 여행은 첫사랑이었더라. 미숙하고 실수뿐이었던 시간. 그래서 더 아름다운. 그러나 그땐 그걸 알지 못한 딱 한 번의 소중한 기억."
-p95


이 책을 읽다보면 지난 나의 여행들을 떠올리게 된다. 여러 여행지를 다녀보며, 때론 남들을 부러워하며 많은 곳을 가려했고 때론 여유롭게 지도도 없이 발이 닿는대로 걸어보기도 하며, 때론 일행의 일정에 떠밀리듯 다녀도 보며, 그 모든 순간이 아련한 추억이 되어 있음을 발견한다. 그러나 가장 좋았던 여행은 아무래도 발 닿는대로, 그렇게 함께 다녔던 여행.


#.
 

"건강히 겸손하게, 그리고 매 순간 행복하게 여행하길."
-p 131


이 말 앞에 오래동안 머물러 있었다. 남들보다 더 여행을 잘하고 싶은 마음, 그럴듯한 이야기를 만들고 그럴듯하게 보여줄 무언가를 만들어낼 여행을 향한 욕심이 오히려 여행을 버겁게 만드는 것. 그런 경험 속에 '겸손하게' 여행을 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잠시 생각해본다.
아직 완전히 다 알 수는 없겠지만, 그 말을 마음에 새겨본다.

#.
 

여행 에세이를 읽으며 아련한 기분을 느낀 것은 또 처음이다. 어쩌면 내가 보았던 그 장소가 사진 속에 담겨 있기에 그럴수도 있고, 또 어쩌면..

작가가 가보았던 그곳을 다시 보며, 내가 왜 그 때의 아름다운 그 순간을 잊고 지냈을까- 싶은 마음이 들었기 때문일수도 있다. 눈을 감고 가물가물, 흐릿해진 기억을 애써 더듬고 찾아야 떠올릴 수 있는 그 순간들, 그렇기에 더 아련한 기억들.

아그라의 시장판을 헤치며 삼엄한 경비를 지나 마주한 타지마할 앞에서 느꼈던 경탄, 타지마할 옆에 한없이 앉아 그것을 바라보며 시간이 멈추길 바랬던 시간들. 푸르른 벽들의 아름다움, 인도의 신비로움과 꿈과 같았던 그 시간들은, 정말 꿈과 같이 일상으로 돌아온 후 어슴푸레 기억 너머로 사라져갔다.
나는 설렜던 그 순간들을 왜 잊고 살았을까.

이 책을 보며 그런 아련함이 다시 떠오른다. 그리고, 다시, 가고 싶어진다.
다음엔 좀 더 오래도록 머물고 싶다. 오래도록 마음에 그 순간을 머무르게 하고 싶다.

 

#. 

 

"이렇게 여행의 감동은 늘, '그곳'이 아닌 그곳에 가는 길 위에 있다." -p192

#.  

"어느 도시에 '가봤다'가 아니라 '살아봤다' 라는 것은..." - p236,237

#. 

"여행 그 순간보다도 더 중요한 건 여행 후에 남을 기억일지도 몰라." -p324,325

#. 

"막상 여행이 끝나고 나니 가지 못한 곳이 아쉽지는 않았다. 다만, 조금 더 오래 머물지 않았던 곳들이 아쉬울 뿐이었다. 다음에는 조금 더 느리게 여행을 해야겠다." -p393


*

여행을 마친 사람들의 이야기처럼, 일상을 여행처럼 산다는 것은 어쩌면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나 또한 늘 다짐하고 다짐하지만, 일상에 돌아오면 어느 순간 여행의 기억은 흐릿해지고, 바쁘고 분주한 나날들로 삶을 빼곡하게 채워가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하지만, 여행의 맛을 본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다시 여행의 삶을 갈망하게 될 것이란 것을, 그리고 매 순간 기억하고 있다는 것을. 그래서 저자는 스케치북을 들고 서울의 한 장소를 향한다. 나는 다시 한번 하늘을 바라보고 익숙해 주의깊게 바라보지 않았던 일상의 순간들을 다시 한번 바라본다.

그러면서 일상을 여행처럼 산다는 것은 어쩌면 일상을 겸손히, 매 순간 행복하게 살아가고, 때때로 무의미해보이는 비생산적인 일을 하면서 자신의 삶에 여유를 준다는 것, 그런 것이 아닐까? 한번 생각해본다.

이 책은 여행을 통한 삶의 이야기다. 그저 보고 싶어서, 가고 싶어 우린 여행을 떠나지만 그곳에서 우린 삶의 또다른 맛을 보고 돌아오기도 한다. 저자는 여행의 여정 속에서 그림을 그리고 사진을 찍으며 '사람'을 만났고, 그들과 함께 삶을 나누는 시간을 보낸다.

여행을 좋아하지만 낯선 이들에 대한 두려움과 수줍음이 많아 말을 걸어보지 못하고 내가 보고 싶었던 것들, 경험하고 싶었던 것들만 보고 듣고 느끼며 올 때가 많았는데, 이 책을 읽으며 여행에서 사람을 만난다는 건 여행의 또 다른 맛이란 생각을 한다.

작가의 이야기를 들으며, 새로운 설렘을 느꼈다. 그곳에 사는 사람들과의 대화, 내가 일방적으로 생각하고 느끼는 것이 아닌, 그곳의 삶에 맞닿아 보는 것의 즐거움을 느껴보고 싶다.
소통하는, 사람 냄새 가득했던 여행이 부러웠다. 낯선 곳에서 낯선 사람들을 만난다는 것은 여전히 두렵기도 하지만.. 이런 맛을 직접 경험해보고 싶게 만드는 그런 책이었다. 느리고, 빈틈 많은 여행을 떠나고 싶다.

따뜻하고 편안하고, 아련한 떨림을 주는, 그런 책, '보고 싶어서, 가고 싶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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